66. 누가 보면 우리가 원수진 줄 알겠습니다.2017.08.06.
“와, 지금까지 데이트?”
유원은 야구 모자를 삐딱하게 쓴 채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지금까지 일했거든. 데이트는 무슨. 넌 지금 시간에 어디 가는 거야?”
“훗, 이런 날 외박을 해야지. 엄빠한테는 비밀. 알지?”
“알긴 뭘 알아.”
“근데 다리 왜 그래?”
유원이 유정과 대화를 하는 사이, 준서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이 시간에 외출이라니, 답은 하나였다.
“지금, 부모님 안 계십니까?”
준서의 말에 유원이 먼저 대답했다.
“지금 그거 알고 올라가려는 거 아니었어요? 근데 집에 라면 없던데. 라면은 못 드시고 가겠네요.”
“야, 서유원!”
“난 간다. 알지? 누나가 얘기하면 나도 똑같이 얘기할 거니까. 무덤까지 가져가는 걸로.”
유원이 긴 다리로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유정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사이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는 도로 올라갔고, 준서는 묵묵히 유정이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유정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그러니까, 여행을 가셨는데, 뭐, 그게 뭐 어때서요.”
“누가 뭐랬습니까. 그냥 궁금해서요.”
“주, 준서 씨는 그만 돌아가세요.”
“알겠습니다.”
유정은 자기가 지금 준서를 뭐라고 불렀는지도 잊은 채 시키는 대로 돌아서서 걸어가는 준서의 뒷모습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가란다고 그냥 가냐.
계단 앞에 우뚝 멈추어 선 준서가 몸을 돌렸다. 유정은 마음이 들킨 것에 놀라 얼른 고개를 숙였다.
“왜 안 들어가요?”
이번에는 준서가 물었다.
“가시는 거 보고 들어갈게요.”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들어가세요.”
그러나 마주 선 누구도 먼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에 취한 남자가 준서를 밀치듯이 하며 유정 쪽으로 걸어 갔다.
비틀거리는 모양이 위태해 보였다.
유정은 남자가 다가서는 것에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고, 그 순간 빠르게 다가선 준서가 유정의 팔을 잡았다.
“기다렸다가 타세요.”
“그럴...... 생각이었어요.”
취객이 엘리베이터에 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던 준서가 유정의 팔을 놓았다.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참, 저 분 우리 옆집 사시는데.”
엘리베이터가 닫히는 것을 보던 유정이 갑자기 생각이 난 듯이 말을 꺼냈다.
“아, 그래요?”
“네. 평소에는 엄청 정중한 분인데 취하면 좀 달라지셔서...... 전에는 자기 집인 줄 알고 우리집 문을 부서져라 두들기시는 거예요. 엄청 무서웠어요. 다행히 아빠가 나가서 해결했지만.”
유정은 말하고 나서 입을 막았다.
“그렇다고, 제가 뭐 무섭다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안 건드릴게요.”
준서가 작심한 듯이 유정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유정이 눈을 크게 떴다.
“네?”
“저 분, 언제 유정 씨 집 문 두들길지 모르는 거 아니예요.”
“아니, 안 그럴 수도 있는데.”
“불안해서 안 되겠어요. 가족도 아무도 없는데, 다리도 다쳐서. 물 하나 떠 먹는 것도 불편할 거 아니에요.”
내내 그 걱정이었던 걸까.
“뭐 알아서 잘 걸어다니면 되죠, 조심 조심.”
“가족들 올 때까지만요.”
“뭐, 뭘 하려는 거예요?”
“정말 안 건드리고 조용히 있을 테니까, 우리집으로 가죠.”
“네에?”
바닥을 짚은 목발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 뭐 이런 걸 가지고 이렇게 유난을 떠나. 꼭 우리 아빠 같아. 유원에게는 엄한 진구는 유정이 어딜 슬쩍 긁혀 오기만 해도 유난을 떨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저는 사심 없습니다. 유정 씨가 한 말 충분히 알아들었고요. 그런데 이렇게 유정 씨 두고 발길이 안 떨어져요.”
이 남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유정은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래요. 괜찮아요.”
“이대로 저 보내면 저 10초에 한 번씩 전화할 겁니다.”
“아, 정말, 준서 씨!”
“저 차 안에 있으면서요. 무슨 일 있으면 와봐야 하니까.”
“알았어요, 가요, 가요.”
유정이 작심한 듯이 목발을 짚으며 걸었고 준서가 그런 유정을 급히 따랐다.
“어어, 업혀요.”
유정은 다시 준서 등에 둥실 업혀서 차까지 갔다. 싫지는 않은데 이게 맞는가 싶기는 했다. 나는 그에게 아무 것도 줄 것이 없는데.
집에 들어서자 익숙한 공기가 그녀를 감아 흘렀다. 언제 보아도 정갈한 집. 준서는 유정을 업은 채로 거실에 들어서서 그녀를 쇼파 위에 내려 주었다.
“기다려요.”
빠른 걸음으로 욕실에 간 준서가 대야에 물을 떠서 가져왔다. 쇼파 앞 탁자 위에 대야를 올린 준서는 유정의 어깨에 수건을 걸어 주었다.
이 남자가 누굴 신생아로 알아.
“너무 미안하잖아요, 자꾸 이러면.”
“미안할 필요 없어요. 나도 좋아서 이러는 거니까.”
준서는 유정을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그러자 유정의 얼굴은 더 일그러졌다.
“헤어지자고 했지 좋아하는 마음 거두라고는 안했잖아요. 이렇게라도 해줄 수 있어서 저는 좋습니다. 물론 유정 씨가 다친 게 좋다는 뜻은 아니고.”
유정은 갑자기 코 끝이 찡해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 바보 같은 남자는 이렇게라도 내 옆에 있고 싶어 하는 구나.
붉어진 얼굴을 휴대하고 다니는 클랜징 티슈로 닦고 준서가 내어준 폼클렌징으로 꼼꼼하게 씻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톡톡 두들기고 난 유정은 민망한 시선을 준서에게 돌렸다.
“왜 그렇게 봐요?”
“예뻐서요.”
“저리 가요.”
화장 지운 얼굴이 부끄러워 수건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유정이 그렇게 말하며 준서를 노려보자 준서가 하하 웃고는 다 씻은 물을 가지고 일어섰다.
“또 어디 가는 거예요?”
“발도 씻어야 할 거 아니에요? 다시 떠올게요.”
유정이 발도 씻고 양치까지 앉은 자리에서 해결하고 나자, 준서는 그제서야 씻는다며 욕실에 들어갔다.
준서는 거실에 이불을 깔아 주었다. 다행히 주말이라 미혜 씨가 없었다. 주중을 제외하고는 주말에는 집에 가서 쉬라고 한 까닭이었다.
유정은 준서가 준 곰돌이 티셔츠를 입고 앉아 있었다. 예전에 선물 받은 건데 사이즈가 작아서 입지 못하고 있던 옷이란다. 학생들이 준 선물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유정은 공연히 질투까지 났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비명 질러요. 얼른 달려올 테니까.”
자리를 다 깔고 일어선 준서가 말했다. 유정이 픽 웃었다.
“무슨 영화 찍나요. 자다가 웬 비명.”
“으악.”
“이상해요. 무슨 일 생기면 부를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목 말라요? 여기 물 있으니까 드시고 다 마셨으면 저 불러요.”
탁자 위에 물컵을 놓아준 준서는 또 뭐가 필요한 게 없는가 싶어서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런 준서를 유정은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그와 함께하는 첫날밤인데. 그냥 이렇게 흘러보내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우리.”
준서의 눈이 유정의 얼굴에서 멈췄다.
“영화...... 볼까요?”
“네?”
황당한 제안에 준서의 얼굴이 굳었다.
“아, 아무래도 잠이 안올 것 같아서 말이죠. 제가 잠자리를 좀 가리거든요. 음, 준서 씨 피곤하시면 들어가시고요.”
“영화요, 영화......”
준서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유정은 웃음을 참으며 진지한 준서의 뒷모습을 보았다. 내가 정말 영화가 보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아. 이대로 잠들기 아쉬워서 그런 건데.
잠시 후 다시 나타난 준서의 손에는 DVD 타이틀이 들려 있었다. 그 제목을 확인한 유정의 입이 벌어졌다.
“엑, 만화잖아요.”
“명작 애니메이션이죠. 안 보셨습니까?”
“네.”
“잘됐네요. 이걸 안 보다니. 죽기 전에 꼭 봐야 하는 영화에요.”
“저 죽기 전에 꼭 해야 하는...... 그런 리스트 되게 싫어하는데. 뭘 기준으로 그런 걸 정해요?”
입을 삐쭉하는 유정을 준서가 픽 웃으면서 보았다.
“그야, 좋아하는 사람하고 같이 보고 싶은, 그런 영화?”
유정은 입을 다물었다. 자꾸 반칙이야, 저 남자. 손 안 댄다고 하고 마음은 자꾸 갖다 대고 있잖아.
“이건 정말 명작입니다. 이걸 안 보시다니. 저는 극장에서 두 번 보고 울었어요. 첫 번 째 볼 때에는 앞줄에 앉은 아이가 너무 시끄러워서 집중이 잘 안 되었거든요. 그래도 눈물은 나더라고요.”
“슬퍼요?”
“아니, 감동해서요.”
토끼 나오는 만화가 그렇게 감동적인가. 유정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DVD 타이틀을 보고만 있었다.
“볼까요?”
준서가 싱긋 웃으며 DVD를 넣었다. 애니메이션 화면에 유정이 픽 웃었다.
“만화는 엄청 오랜만이에요.”
“만화 아니라니까 그래요.”
“저게 만화지 뭐에요?”
“아니라니까.”
미간을 모으며 심각하게 말하는 모습에 유정은 더 웃음이 났다. 꼭 대학 시절 엠티라도 온 것처럼, 마음이 한없이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었다.
“먹을 건 없죠?”
DVD를 본지 5분도 되지 않아, 유정은 다시 입을 열고 물었다.
“배고파요?”
“조금요. 5시에 저녁 먹고 계속 일했으니까요.”
“기다려 봐요.”
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아서, 유정은 한 발로 쿵쿵대며 준서에게로 갔다.
고개를 돌린 준서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 뭐하는 짓이에요? 자리 가서 앉아 있어요.”
“준서 씨야 말로, 뭐하는 거예요?”
준서는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잔뜩 벌려놓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뭐 냉장고를 부탁하기라도 하려고요?”
“뭐 좋아합니까?”
“라면이요.”
유정의 대답에 준서는 고개를 저었다.
“영양가 있는 걸 먹어야죠. 야근하고 나서 라면은......”
“꿀맛이죠.”
유정이 명랑하게 말했고 그 순간 준서가 큭 웃었다.
“그건 맞는 말이지만.”
“라면 끓여 주시면 안돼요?”
“아깐 엄청 미안해하더니 지금은 절 집사처럼 부려먹네요.”
“그야...... 미안해해도 별로 달라지는 것도 없고...... 그래서 나중에 되갚아 주려고요.”
“되갚는다니, 누가 보면 우리가 원수 진 줄 알겠습니다.”
준서가 유정에게 다가왔다.
“이렇게 한 발로 뛰었다가 아랫집에서 내려와요. 힘 빼요.”
유정이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그녀의 몸이 번쩍 들렸다. 어머, 소리를 내며 준서의 목을 감으니, 준서는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쇼파에 얌전히 유정을 내려준 준서는, 그녀의 어깨를 짚으며 조금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움직이지 말아요. 자꾸 이러면 여기까지 모시고 온 보람이 없잖아요.”
“미안해요.”
준서는 유정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잠시 머뭇대다가 몸을 돌려 다시 식당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에 매캐한 라면 냄새가 솔솔 불어 왔다.
라면 냄비를 탁자 위에 놓은 준서가 뚜껑을 열자, 훈김이 나며 얼굴로 더운 향기가 훅 끼쳤다.
“맛있겠어요.”
“맛있게 드세요.”
잠시 멈췄던 DVD를 다시 재생시키고, 라면 한 젓가락을 앞접시에 담았다. 호로록 라면을 먹는 유정의 옆모습을 준서가 슬쩍 바라 보았을 때, 유정이 눈을 돌려 준서를 보았다.
뜨거운 것이 훈김 때문인지, 아니면 공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준서는 마른 기침을 하고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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