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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65화 (65/102)

65. 지금까지 데이트?2017.08.05.

그 날 처럼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내려설 수 있겠어요?”

운전석 앞에 멈추어 선 준서가 묻자, 유정은 네, 라고 작게 말했다.

준서는 유정을 조심 조심 바닥에 내려주고는 차문을 열어 주었다.

“제가 탈 수 있어요.”

부축해 주려는 것을 웃으며 거절하고 유정은 비틀거리며 차에 올라 탔다.

준서는 돌아가서 운전석에 탑승했다.

“너무 늦게 다니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혼자 그렇게 넘어져 있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당신 때문이라고.

유정은 말없이 입술만 깨물었다.

“이건, 그냥 교장으로서 하는 잔소립니다. 일보다도 교사의 안전과 건강이 더 중요하니까. 집에 가죠.”

차는 조용히 학교를 빠져나갔다.

그 날 이후, 둘 만의 공간은 처음이었다.

준서는 차창을 조금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내부에 들어 찼다.

“참, 수고 많았습니다. 다음주까지 해도 되는 건데, 이번주에 다 끝냈더군요.”

준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건 교장으로서 하는 말이니까 괜찮지 않으냐’고 하는 듯이.

“네, 감사합니다.”

유정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준서는 라디오를 틀었다.

눅눅한 음악이 공간을 메웠다. 유정은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밀려드는 바람으로 그녀의 머리칼이 날렸다. 그런 그녀를 흘끔 본 준서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고 운전을 계속했다.

“발은 괜찮아요?”

차가 유정의 집 앞에서 섰다. 유정은 억지로 웃었으나, 이미 발은 아까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큰했다.

“어디 좀 봐요.”

“아, 아니에요.”

“아니라고 하지 말고.”

실내등을 켜고 준서는 아래를 보았다. 유정의 다리는 육안으로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부어 있었다.

“병원에 가야겠는데요.”

“아니에요, 집에 가서 한숨 자고 나면 나을 거에요.”

다리를 감추며 유정이 빙긋 웃었다. 그러나 준서는 미간의 주름을 펴지 않은 채였다.

잠시 망설이듯이 혀로 입술만 축이던 준서가, 한층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많이 불편해요?”

유정의 얼굴에도 미소가 걷혔다.

“그러면 조금만 더 불편하세요. 갑시다.”

준서가 차를 돌렸다. 유정은 준서를 힐끔 보고는 고개를 내렸다.

자신이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을 거절한 상태에서 그에게 계속 신세를 지는 것이 미안한 마음이었다.

“틀렸어요.”

유정은 그렇게 말하고 차창을 조금 내렸다.

“뭐가요.”

“불편하다는 말은 형용사에요. 형용사에는 하세요로 끝나는 청유형 어미가 붙지 않아요.”

“네?”

준서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유정을 힐끔거렸다.

“그러니까, 문법에 맞지 않다고요, 방금 교장 선생님이 한 말.”

준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방을 주시했다. 설마 진심으로 받아들인 걸까. 긴장하며 슬쩍 준서의 눈치를 보는데, 그의 입에서 큭, 하고 웃음이 튀어 나왔다.

“여전하군요.”

“네?”

“엉뚱한 거. 그게 매력이지만.”

유정은 다시 입을 내밀었다.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한 말은 맞았지만, 엉뚱하다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뭐가 엉뚱해요? 문법에 맞는 말을 쓰라고 알려준 건데.”

“이오칠팔.”

준서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닫았다. 이건 또 뭐지, 암호문인가.

“앞에 있는 차 번호에요.”

유정의 궁금함을 꿰뚫어 본 듯이 준서가 말했다.

“그게, 뭐에요, 갑자기.”

“규칙 찾아볼 수 있겠어요?”

아, 내가 국어 이야기 하니까 지금 수학으로 상대하겠다는 거야?

유정은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나, 수학도 잘했거든요.”

“수학 잘했는지 안 물었는데요. 이오칠팔에서 규칙을 찾아보라고요.”

“무슨 규칙요?”

“수학 잘했다면서요. 수열 안 배웠어요?”

유정은 입술을 씹으며 묵묵히 앞 차의 번호에 시선을 던졌다.

“점점 숫자가 커지네요.”

“얼만큼 커지죠?”

“삼,이,일. 아하.”

“또 있어요.”

교차로에서 앞차는 다른 곳으로 가는 바람에 앞차의 번호가 바뀌었다. 그러나 준서는 말을 그치지 않았다.

“팔을 제외하고 세 수의 공통점.”

“이, 오, 칠이요? 이 더하기 오는 칠인가?”

“아니 관계 말고요. 공통점.”

유정의 얼굴이 붉어졌다.

“수학 못했군요.”

“이는 짝수고 오하고 칠은 홀수요.”

“공통점이라고요.”

“몰라요.”

문법 이야기를 괜히 꺼냈다. 준서는 잔뜩 일그러진 유정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참는 듯이 얼굴을 씰룩거렸다.

“프라임.”

“네?”

“소수요. 한국어로 소수라고 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까, 보통은 프라임이라고 하죠. 약수가 1하고 자기 자신 밖에 없는 수.”

유정의 입이 아, 하고 벌어졌다. 배운 건데 왜 생각이 안 났지.

“그런데 그거 다 억지로 만든 거 아니에요?”

갑자기 심술이 나서, 유정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보탰다.

“억지로 만들다니?”

“소수라는 개념 말이에요. 약수가 1하고 자기 자신 밖에 없는 수라면서요. 그러면 약수가 세 개인 수도 있고 네 개인 수도 따로 부를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소수만 특별 대우 하는 것 같아서 말이죠. 별로 닮게 생기지도 않았는데.”

“그러니까 중요하죠.”

“뭐가요?”

“별로 안 닮게 생겼다는 거. 규칙이 없다는 말 아닙니까. 아직도 소수의 규칙성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어요. 그것을 밝히기 위해 수많은 수학자가 덤벼 들었지만요. 덕분에, 현대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요?”

“모든 인증 시스템에서 말입니다. 규칙이 없으니 밝혀내기도 어렵다는 뜻이죠. 그래서 암호로 유용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유정은 입을 다물었다.

“왜요, 재미 없어요?”

유정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끝까지 이겨 먹고 싶다는 거지. 그래, 너 잘났다.

“또 얄미운 모양이군요.”

“마음 뻔히 알면서 그러는 게 더 얄밉거든요.”

“어떡합니까. 이게 난데.”

어느새 차는 병원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분위기는 아까보다도 풀려 있어서, 유정도 아까처럼 긴장하지는 않았다.

“기다리고 있어요.”

준서가 급히 말하고 먼저 차에서 내렸으나 그 사이 유정도 보조석 문을 열고 내려섰다.

“기다리라니까.”

“한 다리는 멀쩡해요. 황새처럼 한 다리로 서면 돼요.”

당당하게 말하는 유정을 보고 픽 웃은 준서가 등을 돌려 댔다.

“업혀요, 황새 씨.”

망설이다가 고집을 부리면 또 갈등만 생길 것 같아 유정은 그의 등 위로 업혔다.

“다시 한 번 말하는 거지만 나는 누가 다쳤어도 이렇게 했을 거예요.”

“정인기 부장님도요?”

아까와는 달리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묻는 말에 준서의 발이 멈췄다.

“예를 들어도, 참.”

“정인기 부장님은 예외인가 봐요.”

“앰뷸런스 불러야죠.”

자기 손으로는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유정은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으며 그의 목을 더 깊이 끌어 안았다.

비록 다쳐서 이런 신세지만, 그래도 그의 등에 업혀서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앰뷸런스 안 오면요?”

“대한민국 좋은 나라예요. 금세 옵니다.”

“정인기 부장님은 빨리 병원에 가야 하고, 앰뷸런스 안 오면요?”

“재밌어요?”

준서는 어이 없는 웃음을 흘리며 병원 계단을 올랐다.

그냥 이대로도 좋을 것 같았다.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잘게 흩어지는 웃음 소리를 들으며.

“다행히 뼈는 이상이 없고요. 인대가 늘어난 것 같으니 반깁스 해 드릴게요. 특별한 치료는 없어요. 최대한 움직이지 않는 게 좋고요. 상태 봐야 하니까 다음 주에 또 오세요.”

반깁스를 하고 목발까지 구입을 했다. 붕대를 감고 깁스용 신발을 신은 유정의 발은 두 배로 불어나 있었다.

집으로 오면서, 유정은 문득 오늘 부모님이 여행을 간 날이라는 생각을 했다. 부부 동반 여행이었고 아마 유원도 안 들어올 확률이 컸다.

준서와 특별한 관계라면 잠깐 들어와서 라면이라도 먹고 갈 거냐고 묻는 건데.

“뭘 그렇게 고민해요?”

운전을 하면서도 계속 얼굴 표정을 살핀 것인지, 준서가 무심한 어투로 물었다. 유정은 애써 얼굴을 펴며 웃어 보였다.

“고민은요, 아무 생각 없었는데.”

“걱정하지 마요. 혼자 들여보내지 않을 테니까.”

유정의 미간이 모아졌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모, 목발도 받았잖아요.”

“목발 사용해 봤어요?”

“아뇨.”

“계단은 어떻게 가시려고. 집까지 모셔다 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

안돼.

유정은 입술을 씹으며 준서의 시선을 피했다. 집에 아무도 없는 줄을 그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집 앞에서 깔끔하게 내려드릴게요.”

그 말에 유정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왜요? 유정 씨 아버님하고 저하고 다시 만나게 될까봐 그래요?”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저는 다시 뵈어도 상관 없는데, 유정 씨 난처할까봐.”

차가 멈추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는 준서는 차에서 목발을 가지고 와서 보조석 문을 열었다. 유정은 내려서면서 준서를 올려다 보았다.

“저, 교장 선생님, 아무래도 저 불편해요. 그냥 제가 알아서 갈게요.”

“저 계단을요?”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는 계단으로 향한 준서의 눈이 찌푸려졌다.

“그럼 저 계단까지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것도 안되겠어요?”

유정은 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이것만 들고 있어요.”

준서가 내어주는대로 목발을 손에 든 유정은 준서의 등에 업혔다. 무슨 중병에 걸렸다고 이러나. 유정은 준서가 생각해주는 것이 싫지 않으면서도 민망했다.

그러나 준서는 계단을 다 올라서도 유정을 내려주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나 저기나 마찬가지인데, 엘리베이터까지만 갑시다.”

“아, 약속하고 다르잖아요.”

“엘리베이터만 태워 드릴게요.”

준서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유정을 내려 주었다. 내려선 유정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준서는 그런 유정을 아무 말 없이 내려다 보고 있기만 했다. 고개를 든 유정이 그 눈 안에 고인 쓸쓸함을 보고는 얼른 시선을 내렸다.

“제가 고맙죠. 여기까지 모시게 해 주셔서.”

준서는 묵묵한 음성으로 말하고 나서 애써 미소했다.

“잘 쉬고 얼른 나아서 와요. 출근하면 그 때는 안 봐줄 거니까.”

“네.”

“농담이에요. 출근해도 무리하지 마요. 너무 힘들면 병가 쓰시고.”

“어떻게 그래요? 수업은 어떻게 하고.”

“정 들어갈 사람 없으면 저라도 들어갈 테니까.”

유정이 픽 웃었다.

“국어거든요. 뭘 하시려고.”

“끝말잇기라도 하죠. 저 고등학교 때 끝말잇기 왕이었어요. 전교에서 제일 잘해서.”

정색하고 하는 말에 유정의 입에서 기어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이 남자 때문에 못 살아. 준서도 마주 웃는데, 엘리베이터가 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막 안으로 들어서려던 유정이 멈칫했다. 안에서 나오려던 남자도 멈칫했다.

“와, 지금까지 데이트?”

유원은 야구 모자를 삐딱하게 쓴 채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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