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안 되겠네. 업혀요.2017.08.04.
“넌 슬퍼해 줘.”
수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만은.”
“누나.”
“안 그러면 나 너무 외롭잖아.”
“진짜, 이 여자, 날 가만히 두질 않아.”
유원이 빠른 동작으로 수정이 앉은 쇼파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 수정이 말리기도 전에 썬글라스를 그녀의 얼굴에서 제거했다.
“유원아.”
도로 썬글라스를 되찾으려는 손목을 가볍게 잡고, 유원이 약간 화가 난 듯한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다 알아요, 왜 쓰고 있는지. 그러니까 그만 벗어요. 안 물어볼 테니까.”
탁자 위에 썬글라스가 올려졌다. 수정은 떨리는 손을 내렸다.
“그리고 누나 없어지면 나 대성통곡하고 밥도 안 먹을 거예요. 말라 죽을 때까지요. 그러니까 그런 말도 함부로 하지 마요.”
“너 웃긴다.”
수정은 애써 다시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니가 날 언제 봤다고 대성통곡을 하고 밥도 안 먹어? 누가 보면 10년은 사귄 줄 알겠다.”
“기간이 중요해요?”
유원이 웃지도 않고 수정을 정면으로 보았다. 수정의 입꼬리도 슬며시 내려갔다.
“그래도 웃기잖아.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그런 거 규정하는 게 더 웃기죠. 그냥 마음이 가면 그럴 수 있는 거지. 꼭 상대가 나 안 좋아해도 내가 좋아하면 되는 거고요.”
당당한 유원의 말에 수정은 눈을 피했다. 그 때도 그랬는데. 어쩐지 꼼짝도 할 수 없었어. 그가 이렇게 정색을 하고 말하면 말이야.
“누나 보면 뭔가 되게 많이...... 억압된 것처럼 보여요. 지켜야 하는 것도 많고 해야 하는 것도 많고. 우리 누나도 좀 그런 편인데 누나보다 수정 누나가 한 수 위에요.”
“유정이도?”
“네. 전 이해가 잘 안 가지만요. 뭐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많은지. 심지어 대학교를 개근을 했어요. 아니 할 것도 되게 없지, 어떻게 대학을 개근을 해?”
“나도 그런데.”
수정이 그게 뭐 특별한 거냐는 듯이 말하자 유원이 입을 딱 벌렸다.
“이것 봐, 이것 봐. 내가 우리 누나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다니까. 대학은 자고로, 학고 한 번은 먹어줘야 하는 거고요. 특히 1학년 때에는 시험 기간에 여행도 가고 그러는 거예요.”
“너는 그랬어?”
“당연하죠.”
자랑이다. 수정은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왜 웃어요? 놀리는 거죠?”
“아니야. 그냥, 너 너무 웃겨. 요즘 웃을 일이 없었는데......”
이래서 보고 싶었나. 마음껏 웃고 싶어서.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해지고 싶어서.
“왜 그런 거예요?”
수정의 웃음을 뚫고, 유원의 서늘한 목소리가 닿았다.
“응?”
“얼굴이요. 안 물어보려고 했는데, 화가 나서 못 참겠네. 그 약혼자인가 뭔가 그 새끼가 그런 거예요?”
수정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야, 약혼자는 그런 사람 아니야.”
“편 드는 거예요?”
“아니, 그리고 파혼했어.”
이번에는 유원이 눈을 크게 떴다.
“뭐, 뭐라고요? 파혼?”
이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가 아닌가.
“응, 그런 일이 좀 있었어. 이건 실은......”
수정은 더운 숨을 삼켰다. 말해도 될까.
부모님에게 맞은 사실을 말하는 것은 수정에게 수치심을 주었다. 다른 이에게 맞은 것과는 다르게, 부모님이라서 그런지 부모님이 ‘때리는 부모’가 된 게 아니라 수정이 ‘잘못해서 맞은 아이’가 된 것 같았다.
“어머니가......”
유원의 손이 수정의 얼굴에 닿았다.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얼굴이 유원의 손에 아프게 읽혔다.
“어머니가요.”
유원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젖어들었다.
“친어머니가 아냐, 나 실은, 밖에서 낳아 온 자식이거든. 아, 이건 비밀인데, 비밀인데 자꾸 말하네.”
수정이 픽 웃었다. 그러나 유원은 미간을 모은 채 가만히 있었다.
“이거 말하면 우리 아버지 큰일나는데.”
여전히 웃음기가 어린 눈으로 수정이 말했다. 유원은 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웃지 마요.”
“응?”
“웃지 말라고, 그런 말 하면서.”
유원의 손이 수정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이렇게 떨고 있으면서, 왜 자꾸 웃어요.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여기 나 밖에 더 있어요?”
수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러니 그녀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렇게 살았어요? 맞아도 맞았다고 말도 못하고, 울고 싶어도 울지도 못하고.”
“유원아, 나는......”
“미안해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몰랐네.”
“니가 사과할 게 아니야.”
“그럼 누구라도 사과해야 할 거 아니예요. 아무도 없으니까 내가 할게요. 그러니까 누나는, 누나 잘못이라고 끌어안지 마요. 내가 잘못했으니까.”
유원이 수정의 몸을 자신의 품으로 당겼다.
“그냥 기대서 울라고 이러는 거예요. 다른 마음 안 품을 테니까 좀 울어요.”
이런 품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냥 기대서 울라고. 먼저 나서서 당겨 안아 주기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이런 넓은 호텔방에,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치워지는 존재가 아니라.
그냥 이렇게 기대서 울어도 되는 존재.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존재가 되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그 전화 번호를 잊지를 못하고.
유원은 오래 아무 말 없이 수정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눈 코 뜰 새 없는 한 주가 지났다. 금요일 밤, 원안지를 최종적으로 검토한 후 인쇄소에 시험지를 넘긴 유정은 의자 위에 늘어져 버렸다.
그 사이 종훈은 미루고 미뤘던 자서전을 드디어 제출했다. 몇 번이고 유정에게 반려를 당한 자서전이었다.
“뭐 이런 말까지는 안하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까 아빠가 좀 불쌍하긴 했어요. 모르는 게 있어서 아빠한테 물어보다가 아빠 얘길 좀 들었거든요. 아빠도 저 때문에 속상한 게 많았던 거 같아요.”
툭툭 내뱉듯이 한 말이었으나 유정은 종훈의 마음이 확실히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의 그 반항아를 생각했을 때에는 굉장히 큰 발전이었다.
신기한 것은 성헌과 종훈이 자서전을 쓰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 양식을 달라고 찾아온 학생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유정이 만든 자서전 양식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빼곡한 질문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것에 답을 하다 보면 어느덧 어린 시절의 자신과 만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성헌과 종훈이 쓰는 것을 봤는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쓰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유정은 인쇄한 질문 종이를 내주면서 이걸 수업에 적용시키면 어떨까 생각했다.
어떤 지식이나 정보를 알려주는 것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그런 수업을 해보는 건 어떨까.
시험이 끝나면 한 번 구상해 보아야 겠다고 유정은 생각했다.
유정과 한 번 진지한 이야기를 나눈 후여서 그랬는지 반 분위기도 훨씬 나아졌다. 이제는 툭하면 수업 시간에 지난 번처럼 이야기를 하자고 해서 유정이 자제를 시킬 정도가 되었다.
시험 끝나면 반끼리 한 번 짧은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유정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날이 사랑스러워지는 반 학생들과의 시간을 점차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 없이 한 주를 보내고 나서, 교사들은 다 퇴근한 교무실이었다.
그제서야 비어 버린 마음이 보였다. 정신 없이 일에만 몰두했었다. 준서는 유정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더 이상은, 그녀에게 사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번 주말에는 수정에게 가 볼 생각이었다.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었다. 만나서 진지한 이야기를 해야 겠다.
유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무실을 나와 문을 걸어 잠갔다.
캄캄한 복도가 무서웠다. 공포 영화에라도 나올 것 같이, 복도에는 푸른 비상구등만 켜져 있었다.
몸을 오스스 떨면서 걷는데, 머지 않은 곳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유정은 걸음을 멈췄다.
이가 딱딱 맞부딪혔다.
급히 계단 밑으로 뛰어 내려갔다. 우당탕 소리가 복도를 크게 울렸다.
그럴 수록, 발걸음 소리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 시간에 누가 학교에 있는 거야.’
빨리 나가야 겠다고 생각하며, 유정은 앞으로 발을 뻗었다.
그런데 계단이 하나 더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몸이 앞으로 쏠리며 균형을 잃었다.
“엄마야!”
복도에 가득히 유정의 비명이 퍼져 나갔고, 들리는 발걸음 소리는 다급해졌다.
“누구세요!”
남자 목소리가 복도에 가득 울렸다.
유정은 눈을 깜박였다. 놀라고 아픈 마음이 눈에 방울로 맺혔다.
준서였다. 이 시간까지 남을 사람이라면, 학교 수위 아저씨와 준서 둘 중 하나일 텐데. 뭘 무서워 한 거야.
유정은 주저 앉아 시큰거리는 발목을 쓰다듬었다.
다시 일어서 보았으나 오른쪽 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넘어지면서 삔 것 같았다.
“거기 있어요?”
준서가 오기 전에 도망가고 싶었으나, 절뚝이는 걸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유정 씨?”
다급한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무슨 일이예요, 괜찮아요?”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이 푸르게 보였다. 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넘어졌어요?”
준서가 미간을 모으며 유정의 몸을 살폈다.
“네, 그런데 괜찮아요.”
“어쩌다가. 누구 있었어요?”
당신이 있었지.
유정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놓고는 피식 웃었다.
“원래 잘 넘어져요.”
“잠깐만 봐요.”
준서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유정의 발목을 살폈다. 발목은 아까보다 조금 더 부어 있었다.
“아.”
준서가 건드리자, 유정이 고통스러운 음성을 냈다.
“안 되겠네. 업혀요.”
“네?”
“이러고 어떻게 계단을 내려가려고. 그냥 업혀요.”
그러나 유정은 입술을 꼭 닫은 채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심 없으니까 업히라고요. 다른 학생이나 교사들이 다쳤어도 똑같았을 거예요.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가야죠. 빨리요.”
똑같았을 거라는 말에, 유정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와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왜 서운한 거야.
“빨리 갑시다.”
준서는 주저 앉아 고집스럽게 등을 내밀고 있었다. 유정은 결국 준서의 등에 업혔다.
따끈하고 시원한 체취를 마시며 유정은 몸을 살짝 떨었다. 오래 그리워했던 냄새라 그럴까.
준서는 별 말 없이 주차장까지 걸었다.
그 날 처럼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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