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넌 슬퍼해 줘.2017.08.03.
“왜 연락이 안되는 거야.”
유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침대에 길게 누웠다. 그 날 이후였다. 자신이 아버지한테 혼났다고 투정 부렸을 때부터.
엄청나게 걱정하는 척을 하더니,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휴대폰은 계속 꺼져 있다가 이제는 없는 번호라는 말만 나왔다.
유정이 무슨 말이라도 한 게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휴대폰까지 없애지는 않을 텐데.
공연 연습은 오후에나 있어서, 유원은 간만에 뒹굴거리는 중이었다.
학교 가는 척 거짓말을 했을 때에는 의심 받을까봐 아무 일이 없어도 PC방에라도 가서 시간을 때웠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되니 매우 편했다.
“응?”
언제부터였을까. 휴대폰에 밝은 빛이 반짝였다.
확인해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 스팸 아니면 보이스피싱,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으나 가만히 있기도 심심해서 유원은 전화를 받았다.
검찰청이라고 하면 나 검사라고 맞대응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대에게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유원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전화기를 확인해 보았다. 끊기지는 않았는데.
다시 휴대폰을 귀에 댄 유원은, 여린 숨소리를 감지하고는 숨을 죽였다.
“여보세요?”
[유......원이?]
유원은 소리를 지를 뻔했다. 마침 생각난 참이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누나, 수정이 누나에요?”
[응. 이 번호가 맞네. 혹시나 했더니.]
“이거 누나 번호에요? 아니 원래 번호는 왜 없애고......”
[너, 괜찮아? 전에 아버지한테 혼났다고 했잖아.]
아직 걱정하고 있었던가.
“그 때 오라고 했더니 오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았던 투정이 나갔다.
[아아, 미안, 그 때는 좀......]
사과하는 것을 보니 더 이상 못 참겠다.
“어디에요?”
보고 싶어서.
“어디냐구요. 얼굴 좀 봐요. 나 걱정 안돼요? 진짜 계속 엎드려 있었다니까요. 나 고등학교 졸업한 후로 이렇게 맞은 거 처음이예요.”
[지금은 괜찮아? 왜 그랬던 거야?]
유원이 일부러 자극하려고 꺼낸 말을 수정은 덥썩 받아들였다.
“궁금하면 오라고 했잖아요.”
유원은 빙글빙글 웃었다. 이제 자신이 다급할 일은 없었다. 맘껏 놀려줘야지.
[나, 못 가. 여기 있어야 해서......]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유원은 관자놀이를 긁으며 미간을 모았다.
“왜요? 설마 어디 갇힌 거예요? 무슨 일이에요, 진짜?”
[아니, 그게...... 근데 괜찮은 거 맞아? 왜 그러냐고, 그냥 얘기해 주면 안돼?]
“나, 걸렸거든요. 아버지가 음악은 절대 안 된다고 해서, 복학했다고 뻥치고 등록금 받아서 음악했어요.”
[너, 그럼 부모님 속이고 그랬던 거야?]
수정의 목소리가 커졌다. 유원은 킬킬 웃었다.
“네. 우리 아버지가 좀 엄격하세요. 누나한테는 말고 나한테만. 진짜 차별 아니에요? 아니 뭐 누나가 나처럼 사고 치고 다니진 않지만요. 누나는 아버지한테 맞은 적도 없어요. 나는 스무 살 넘어서도 이러고.”
[근데 그건 니가 맞을 만한 거 아니야? 어떻게...... 그게 한 두 푼도 아니고......]
“누나도 그렇게 말하는 거에요? 진짜 너무한다. 그래도 누나는 내 편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 진짜 많이 맞았단 말이에요. 걸어다니지도 못했다니까?”
[그래? 그래서 지금도 심해?]
억울한 듯이 내쏘는 말에 수정의 말투가 금세 바뀌었다. 유원은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뇨. 지금은 괜찮아요. 그리고 아버지도 그렇게 때리고 나서 미안했는지 당분간은 하던 거 계속 하라고 허락해 주셨어요. 근데 9월에는 복학해야 해요.”
[당연하지, 졸업도 안하려고 했어?]
“진짜, 누나, 우리 누난 줄 알았네. 왜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거죠?”
휴대폰 저 편으로 작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유원의 얼굴도 부드럽게 펴졌다.
“얼굴 좀 봐요. 아니, 왜 못 나와요. 정 그러면 내가 그 쪽으로 갈게요.”
[안돼, 지금은 좀.]
“왜요? 하, 나, 답답하네. 나 누나 아버지 누군지 아는데. 그 쪽에 연락해 볼까요?”
장난으로 하는 말인데, 수정은 진심으로 놀란 듯이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자 유원은 더 짓궂어졌다.
“왜요, 국민이 국회의원 만난다는데. 언제든지 만나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지 마.]
“그러니까 어딘지 말해요.”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들리는 것은, 호텔 이름이었다. 유원의 눈썹이 찡긋했다.
“호텔이라뇨. 왜 거기 있어요?”
[사정이 있어. 여하간 나 보려면 여기로 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아버지한테는 특히.]
“뭐 휴가라도 간 거에요? 갈 거면 멀리 가지 재미 없게 서울이 뭐야. 기다려요, 한 시간 안으로 갈게요.”
유원은 전화를 끊고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수정이 처한 상황이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일단 만나서 물어보면 되겠지. 유원은 옷장을 열었다. 마음에 드는 옷이 없었다. 미간을 모으며 이 옷 저 옷을 계속 침대 위로 던지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너 수박 쥬스 좀 마셔...... 어디 가?”
혜신은 침대 위에 잔뜩 쌓여 있는 옷을 보고 얼굴을 일그러 뜨렸다.
“참, 잘됐다. 나 어때요? 잘 어울려요?”
꽃무늬 남방을 입고 해사하게 웃는 아들을, 혜신은 고개를 갸웃하며 보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뭐하는 거긴. 외출 준비 하는 거죠.”
“여자 만나?”
“하하, 우리 엄마 누굴 닮아 눈치가 이렇게 빠르시지.”
“누구야, 이번엔?”
유정이 남자를 만난다고 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에 유원의 입이 삐죽 나왔다.
“이번엔, 이라뇨? 아들이 맘 잡고 연애 좀 하겠다는데.”
“그 연애가 다 맹탕이라서 말이지. 지난 번에는 백화점 갔는데 어떤 여자가 느닷없이 어머님, 안녕하세요, 라고 해서 진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있는 애들 정리나 하고 만나.”
“아, 엄마, 날 어찌 보고...... 나 다 정리했어요!”
“정리는 무슨! 여자 눈에 눈물나게 하는 놈 치고 제대로 된 놈 못 봤어!”
엉겁결에 등짝까지 얻어 맞고 어리둥절하는 유원의 손에 수박 쥬스를 들려준 혜신은 혀를 차며 방을 나가 버렸다.
아니 왜 똑같이 연애를 시작했는데 반응이 저렇게 달라.
유원은 매운 등을 쓰다듬으며 옷장을 뒤졌다.
수정은 끊어진 전화를 멍한 눈으로 보았다.
준서는 기존의 휴대폰을 없애도록 했다. 그리고 준서만 통화할 수 있는 새 휴대폰을 전해 주었다.
당분간은 아무와도 접촉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수정 씨가 마음으로부터 독립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거리가 있어야 하고. 내가 수정 씨 부모님이 수정 씨한테 접근할 수 없도록 조치해 놨으니까, 일단은 좀 쉬어. 그리고 가고 싶은 곳 생각해 봐. 유학 갔던 곳이든, 전혀 새로운 나라든.”
준서는 얼굴 가득한 수정의 상처에 대해 묻고 간단한 대답을 듣자 그렇게 말했다. 이제까지 자신의 삶에 깊이 개입한 적이 없던 남자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 수정은 부담스러웠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가 유정과 준서에게 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유정에게 사정했던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도 알았다.
어떻게든 그들에게는 내가 치워져야 할 존재인가 보다. 생각하니 서럽기 보다는 원래 그런 삶인데 잠시 다른 삶을 꿈꾸었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들이 원하면, 치워져야 겠다고 생각했다. 외국으로 떠나라고 하면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 그가 생각났을까. 아닌 밤중에 떡볶이를 얻어먹고 나서, 그녀의 눈을 보며 이야기했던 남자.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가라앉는데 그 말만은 둥둥 떠서 그녀를 비추어주는 것 같았다.
스스로 불행해지지 마요. 행복은 쟁취하는 거예요.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멍한 기분으로 늘어져 있던 수정의 손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의 번호는 외우고 있었다. 어떤 예감이었을까. 혹시 집에서 도망쳐 나와 언제든지 전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이 번호를 누르면, 나는 더 이상 불행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엉뚱한 생각을 하며 수정은 번호를 눌렀고, 언제 들어도 생생한 목소리를 들었고, 이 곳으로 오겠다는 다짐까지 받아 냈다.
믿어지지 않았다. 온 몸에 멍이 들 정도로 얻어맞고 갇혀 있을 때가 엊그제인데,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호텔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난다.
수정은 잠시 몸을 떨며 서 있다가, 아차, 하고는 얼른 외출복으로 갈아 입었다.
꼼꼼히 화장을 해서 멍자국이 안 보이도록 하고 썬글라스를 꼈다. 결국은 들킬 수밖에 없을 테지만, 그래도 가릴 수 있는 만큼은 가리고 싶었다.
준비를 마치고 나서 방 안을 서성거리다가 혼자 웃었다. 어차피 나갈 것도 아닌데 옷은 왜 입었지 싶어서였다. 외투만 벗어서 걸어 놓고 다시 서성거렸다.
준서를 기다릴 때는 이렇게 설렜던 적이 없었는데.
준서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훌륭해서 부담스러웠던 남자였다. 처음 만난 3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스펙도, 외모도, 집안도, 어느 것도 빠지지 않고 심지어 성격마저 젠틀했다.
하지만 그 나쁘지 않은 남자가 이제와 생각해보니 수정은 버거웠다. 어떤 목표 아래 움직이는 것과 같은 모습이, 잔뜩 짓눌린 자신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아서.
그러나 유원은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런 목표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짓누른 삶의 무게도, 이것 저것 재고 따지는 것도 없었다. 등록금을 빼돌렸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준서는 죽었다 깨나도 그런 짓은 하지 못할 것이었다.
딩동.
수정은 바짝 긴장했다.
청소를 하러 온 사람일 수도, 그 외의 다른 볼일로 온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라도 실망하지 말자고 수정은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밖에서 싱긋 웃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뭐예요, 방에서 웬 썬글라스? 점점 미스테리가 증폭되는데.”
유원은 몸을 흔들며 방 안에 들어서다가 입을 따악 벌렸다.
“스위트룸이었어요?”
넓은 거실에 놓인 쇼파, 통유리 너머 한강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응.”
“와, 역시, 돈 많네.”
수정은 옅게 웃었다. 유원은 쇼파 위에 앉아 몸을 흔들었다.
“와, 엄청 푹신해. 쇼파도 고급인가봐요!”
“그렇게 좋아?”
“좋다기 보다는 신기해서요. 이런 룸은 처음이라서. 그런데 왜 여기 온 거예요? 그냥 혼자 휴가 온 거예요?”
“그런 셈이지.”
수정은 커피 포트에 물을 올렸다.
“뭐 마실래? 캡슐 커피도 있고 차도 있고.”
“커피요. 카페라떼 있어요?”
“응, 마침 있네.”
수정은 캡슐 커피를 작동시키고 녹차 티벡을 꺼냈다.
“누나는 커피 안 마셔요?”
“난 불면증 있어서 잘 안 마셔.”
“아, 그래요? 불면증 있구나. 하긴, 그 날 우리집에서도 오랫동안 못 주무셨죠.”
“니가 시끄럽게 굴어서.”
수정은 말하고 나서 피식 웃었다.
“제, 제가요? 전 시끄럽게 군 적이 없는데.”
“시끄러웠어.”
“정말이예요?”
“농담.”
수정이 막 따른 캡슐 커피를 잔에 따라서 유원의 앞에 있는 탁자 위에 놓았다.
“하, 농담도 해요? 그 썬글라스 좀 벗어봐요.”
녹차를 가지고 앞에 앉기를 기다려 유원이 손을 내밀었다. 썬글라스를 가져가려는 듯이.
수정이 얼굴을 치우고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래?”
“아휴, 눈을 못 보겠잖아요. 누나는 눈이 예쁜데.”
“보지 마.”
“그런데 왜 썬글라스예요? 갑작스러운 휴가도 그렇고. 무슨 일 있죠?”
유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수정은 가만히 티벡으로 잔 안만 휘저었다.
“유원아.”
“네.”
“내가 확, 없어져 버리면 어떨 거 같아?”
유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누가 없어져 버리라고 그래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누나 없어져 버리면 우리 누나도 미칠 걸요. 저도 미치고.”
유원의 대답에 수정이 픽 웃으며 고개를 내렸다.
그럴까, 내가 없어지면 유정이 너는 미칠까.
오히려 내가 없어져서 너는 좋은 거 아닐까.
“알았어요. 말하기 싫으면 더 안 물어볼게요.”
유원은 그렇게 말하고 커피를 들어 마셨다.
적막이 흘렀다.
수정의 눈이 멀리 창 밖으로 비치는 강물을 보고 있었다.
“내가 없어지면......”
유원은 썬글라스 너머의 눈이 어쩐지 젖어 있을 것 같아 수정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넌 슬퍼해 줘.”
수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