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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62화 (62/102)

62.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좋은 사람이야.2017.08.02.

교사들은 다 퇴근한 교무실이었다. 유정은 천천히 뻐근한 몸을 의자에서 일으키고 대강 책상을 정리했다. 뻑뻑한 눈을 비비고 나서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아니, 분명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가방이 가벼워졌다.

“지금이 몇 시예요?”

눈을 든 유정이 엄한 표정의 상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렸다.

“일이 지금 끝났어요.”

“이러다 몸 상해요. 일이 많으면 내일 하지...... 얼른 퇴근합시다.”

유정의 가방을 들고 준서는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도 업무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다가, 다 끝나고 혹시나 해서 교무실에 들른 참이었다.

유정은 괜찮다고 하려다가, 준서가 가방을 들고 나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밤공기가 선선했다.

준서의 구둣발 소리가 텅 빈 주차장을 울렸다.

유정은 문득, 내내 어지러웠던 마음이 고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타세요.”

버튼으로 차문을 연 준서가 유정이 먼저 타는 것을 보고 운전석에 올랐다.

선선한 공기가 차 안으로 들어왔다. 유정은 잔뜩 피곤했던 몸을 시트에 댔다. 금세 눈이 감길 것처럼 졸음이 쏟아졌다.

“많이 피곤하죠? 얼른 갑시다.”

준서는 부드러운 태도로 말하고는 자신이 들고 있었던 가방을 뒷좌석에 넘겼다.

“그냥 저 주세요.”

유정이 손을 내밀자, 준서가 싱긋 웃으면서 유정의 머리를 손으로 살짝 덮었다.

“피곤하잖아요. 편하게 한숨 자요. 일어나면 집 앞일 거예요.”

가방을 들고 있는 불편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인기와 대치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며, 유정은 말없이 입술만 씹었다.

이 부드럽고 따뜻한 남자가, 나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있어.

하루 종일 다른 일에 몰두해도 아무 결론도 나지 않았다. 생각이 멀어졌다고 해결점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왜 안 자고 있어요?”

운전을 하면서도 유정이 보이는지, 도로로 들어선 준서가 앞을 본 채로 물었다.

“화 났어요?”

유정은 뜨끔한 기분으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뇨.”

“아까 정부장님 때문에 그래요? 내가 너무 나섰나?”

은근하고 부드럽게 물으며, 준서는 한 손으로 유정의 손을 어루만졌다.

“아뇨. 저도 많이 화났었어요. 준서 씨가 안 나섰으면 더 큰일 날 뻔했죠.”

“그러게요. 저도 놀랐습니다. 그런데 멋있었습니다. 저도 조심해야 겠어요, 당신이 교장이냐는 소리 안 들으려면.”

준서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그러나 유정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면 대체 뭐지?”

유정은 아픈 눈을 깜박거렸다. 내내 밀어두었던 결론이, 가슴 안에 들어차서 더 이상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해결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알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수정이,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준서가 뜨끔한 듯이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있던 그가 굳은 음성으로 물었다.

“누가, 말했습니까?”

“수연 언니가 어제 생일이라서 가족들끼리 식사하다가 봤대요.”

준서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정은 모르게 하고 싶었다. 괜한 근심 거리를 안기고 싶지는 않았다.

“미리 말 안해서 미안해요. 수정 씨 상황이 많이 어려운 것 같아서.”

“왜요, 또 맞았어요?”

“네. 자주 그런 일이 있었던가 보군요.”

유정은 고개를 숙였다.

수정이 또 새어머니로부터 학대를 당했다. 그것은 준서와의 파혼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녀의 약혼자였던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설레고 손짓 하나에 떨면서.

더는 미룰 수 없겠구나.

유정을 힐끔 보던 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방을 주시했다.

차는 머지 않아 유정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유정도 준서도, 조용히 입을 닫고 있었다.

준서가 마른 한숨을 토해내며 먼저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괜히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수정 씨 상황 정리되고 나서 유정 씨 당당하게 만나고 싶었고. 그 마음만 알아주세요.”

미리 말을 하지 않은 것 때문에 그런가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유정은 반응 없이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유정 씨.”

“준서 씨, 우리......”

유정이 고개를 들었다. 준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또 왜 그래요, 응?”

눈물이 가득한 눈을 내리고, 유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은 내 책임이고, 내가 마무리를 지어야 할 일이다.

유정은 발끝까지 힘을 주고 몸을 꼿꼿이 폈다. 정면으로 준서를 보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었다.

“맞아요, 준서 씨 말이...... 수정이 상황 정리되고 나서 만나는 게 맞잖아요. 이러는 거 준서 씨한테도 나한테도...... 아닌 거 같아요. 수정이에게도 그렇고.”

“무슨 얘기에요?”

“우리가 사귀는 거하고 다른 게 뭐가 있어요? 즐길 거 다 즐기면서, 수정이 고통 당하는 거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요. 준서 씨가 모든 상황을 다 감당하는 것도요.”

결론을 내리지 못했던 것은, 실은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가 무심결에 했던 프러포즈가 아직도 마음 안에 살아 있었다.

그보다도, 더 많이 그를 원했다. 이제는 그의 생각을 하지 않고 살 수 없을 만큼.

“거짓말은 안할게요. 나, 준서 씨 좋아해요. 아니...... 좋아하는 거 이상으로, 나 준서 씨 없으면 못살 것 같아요. 그렇지만...... 우리 정말 수정이 일이 잘 해결될 때까지, 기다려요. 나도 지금은 준서 씨보다는 수정이에게 더 마음을 쏟아야 할 것 같아요.”

“유정 씨, 그건......”

준서는 차마 말을 다 내뱉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억지로 조른 건 자신이었다. 유정이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밀어내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억지로 자신의 옆에 붙들어 앉히고 자신이 다 해결하겠다고 했다.

정말로 그럴 생각이었다. 어떤 일이 닥쳐도 감당할 수 있었다.

단 한 가지만 빼고는.

“내가 말 했잖아요, 난 다른 건 다 괜찮다고.”

당신이 떠나는 것 그 단 한 가지만.

“그런데 그걸 나는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그래요. 이래서는 안되는 거예요. 수정이는 또 폭행을 당했고, 준서 씨는 수정 씨를 부모 모르게 숨겼고......”

“말했어요.”

준서가 유정의 까만 눈을 마주했다.

“반협박이긴 하지만...... 수정 씨 어머니께 말씀 드렸습니다. 폭행의 흔적들 찍어서 고소할 거라고요. 갑작스러운 파혼을 사과하러 만났다가 알게 됐다고. 수정 씨의 출생의 비밀과 학대 정황이 밝혀지면 수정 씨 아버지도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안 그래도 상대 정당에서 민 의원의 헛점들을 계속 찾아내고 있고요. 쉽게 발각되거나 제가 위험에 빠지지는 않을 겁니다.”

유정은 입을 다물었다. 애써 준서의 눈길을 피했다. 바라보면 또 붙잡고 싶어질 것 같았다.

“왜 그러는지 알아요. 하지만...... 수정 씨는 저에게 별 마음이 없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말 그대로의 계약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유정 씨만큼, 아니 그보다 더 저도 수정 씨한테 죄책감이 있습니다. 유정 씨 아니라도 그대로 두진 않았을 거예요.”

유정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유정 씨.”

“미안해요......”

유정은 거친 숨을 토해냈다. 고개를 들어 어렵게 상대의 눈을 마주한 유정의 눈이 상대의 눈을 보는 순간 감정의 동요를 보이며 떨었다.

준서의 눈이 붉어져 있었다.

그 단단하고 강한 사람이, 내부로부터 무너지는 것이 너무도 분명히 보였다.

“알아요, 준서 씨 얼마나 노력했고, 또 얼마나 내 사랑에 책임을 졌는지. 이건 내 문제예요. 난 조금도 책임지지 못했어요. 아무 것도 하지 못했고, 그저 앉아서 다른 이들이 괴로워하는 것만 지켜봐야 했어요.”

애써 크게 뜬 눈에서 눈물이 후득 떨어졌다. 유정은 차 안에 비치된 휴지로 눈물을 급히 닦아냈다. 말해야 했다, 아픔을 주더라도 끝까지 정확하게 그녀의 마음을 전달해야 했다.

실패는 한 번으로 족했다. 마음을 전하지도 못하고 상처만 준 까닭에, 일이 더 꼬이게 만들었고, 결론적으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었다.

“준서 씨 만큼이나 나도 내 사랑에 당당하고 싶어요. 사랑하는 친구 배신하고 싶지 않아요. 그 친구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야 나중에 친구도, 준서 씨도, 더 떳떳한 마음으로 볼 수 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 내가 더 오래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준서는 일렁이는 눈으로 유정을 마주하다가, 말없이 고개를 꺾었다.

유정의 진심이 그제서야 보였다.

유정이 처음 이별을 고했을 때, 준서는 안일하게 자신이 노력해서 수정의 문제를 해결하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수정이 아니라 유정이었다.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한 사랑은 그녀에게 자꾸만 죄책감을 안겨 줄 것이었다.

유정은 그런 것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모질거나 이기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이의 잘못까지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는, 깨끗하고 진실한 여자였다.

“이건 내 문제예요, 준서 씨. 준서 씨 잘못 아니고...... 유일한 잘못이 있다면 나 같은 여자를 좋아한 거겠죠. 아니, 그것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잘 몰랐을 테니까...... 내가 이렇게 미련한 사람인 줄 몰랐을 거예요.”

유정은 눈물을 계속 닦아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무너지는 상대의 마음을 다독이듯이.

준서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제하며 눈을 감았다.

차 안에는 깊은 적막만 감돌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눈을 뜨고 유정의 손에서 눈물 묻은 휴지를 뺏어 차 안에 비치된 휴지통 안에 넣었다.

그리고 잔뜩 젖은 유정의 얼굴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유정 씨, 미련한 사람 아니야.”

가만히 두 손으로 얼굴을 잡고, 자신에게로 향하게 그녀의 얼굴을 들어올린 준서가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뱉었다.

“내가 욕심 부린 거야. 유정 씨 마음 안 보고, 그냥 나만 잘하면 될 줄 알았던 거야.”

그러니까,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네 잘못이라고 하지 마. 그렇게 마지막까지 내 마음 찢어놓지 마.

준서는 유정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살결이 손에 닿았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좋은 사람이야. 미련하지도 않고, 이기적이지도 않아.”

준서는 유정의 얼굴을 당겨 그대로 자신의 품에 묻었다.

죽어도 보내고 싶지 않지만,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당신에게 계속 죄책감을 준다면, 그것 때문에 끊임 없이 힘들어하면서 스스로에게 상처를 준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당신이 너무 착해서 그래. 모두를 감싸려고 해서. 나처럼 때묻지 않아서.”

유정의 팔이 준서의 허리를 감았다.

떨리는 등이 그녀의 손에 만져졌다.

“울지...... 마요.”

유정은 목덜미에 떨어지는 물기를 느꼈다. 안아준 것은 그인데, 우는 것도 그였다.

“미안해요.”

그리고 결국 상처를 받는 것도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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