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반려합니다.2017.08.01.
밝은 미소를 지으며 출근하니, 수연은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좋은 아침이예요, 언니.”
비어져 나가는 웃음을 참으며 인사를 했으나, 돌아보는 수연의 얼굴에는 어쩐지 근심이 가득했다.
“참, 선물이예요. 마음에 들지 모르겠어요.”
“이런 거 안줘도 되는데.”
수연은 생일 선물을 받으면서도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너무 약소한 것을 샀나. 그런데 풀어보지도 않고 얼굴부터 굳히는 걸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고.
“무슨 일 있어요? 어제 가족들하고 뭐 안 좋았어요?”
유정은 자리에 앉아 수연에게 다가 앉았다. 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고.”
“그럼 왜요?”
“잠깐 나와봐.”
수연이 유정을 잡아 끌었다. 아무도 없는 상담실로 끌려간 유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 수연의 맞은편에 앉았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구나.”
“나, 어제 교장 선생님 봤어.”
수연의 눈이 흔들렸다. 유정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직 키스할 때의 그의 숨결이 입 안에 남아 있었다. 그의 온기와 목소리, 조각 조각의 웃음들이.
그런데 수연의 표정을 보면, 결코 좋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어디......서요?”
“호텔에서. 어떤 여자랑 같이 지나가던데......”
“여자랑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여자만 엘리베이터에 태워 보내는 거 같았어. 그건 룸이 있다는 얘긴데......”
준서가 어제 약속이 있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혹시 깊은 사이야? 시작하는 단계면 좀 아닌 거 같아서...... 아니면 물어보든가. 그런데 그냥 식당도 아니고 호텔은......”
“그 여자, 생김새가 어땠어요?”
“그 여자? 실내에서 썬글라스를 써서 처음에는 연예인인 줄 알았어. 스카프도 하고. 얼굴은 못 봤네.”
유정은 입술을 씹었다. 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 거야. 수정이를 설마 납치라도 한 건가. 그래서 수정이와는 연락이 되지 않았던 걸까.
“키는요? 나하고 비슷해요?”
“응, 이제 보니 그런 것 같네. 얼굴은 좀 갸름한 것 같고. 머리카락은 이 정도?”
수연이 설명하는 인상착의는 정확히 수정이 맞았다. 유정은 더 물을 것도 없었다.
“알았어요, 말해줘서 고마워요.”
“알아? 아는 사람이야?”
“사정이 좀 있어요. 그런데 언니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고.”
“혹시...... 뭐 동생이나 누나 그런 건가?”
“그럴 수도 있고요.”
대충 수연에게는 둘러댄 후, 유정은 심기가 복잡해져서 학교 밖으로 나왔다.
그를 사랑한다. 부인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무럭 무럭 자란 감정을 이제는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그가 같이 살자고 했을 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와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고, 함께 맛있는 것을 해 먹고, 주말이면 함께 장을 보는 그런 생활이 눈 앞에 불쑥 다가온 것 같아서.
그러나 이래도 되는 걸까.
사랑하는 친구는 아직도 절망의 구렁텅이에 있고, 사랑하는 남자는 그런 친구를 구하겠다고 자신이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둘 중 누구도, 가장 편하게 있는 유정 자신의 탓은 하지 않는다.
수정과 만난 후, 준서와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준서가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을 본 후에 수정의 처지는 잊어버리고 준서와 도로 가까워지고 말았다.
비록 지나가는 말로 한 말이었으나 프러포즈까지 받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일이 이렇게 나아가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뭐하세요?”
고개를 든 곳에 찌푸린 표정의 민종훈이 있었다. 유정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이 시간에, 오랜만이다?”
“저 이제 지각 안하거든요.”
종훈이 얼굴을 구기며 유정을 스쳐 지나갔다. 저렇게 툴툴거려도, 이제는 그의 마음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야! 너 아직 정신 못 차렸어? 태도가 그게 뭐야?”
유정은 일부러 화가 난 듯이 목소리를 높이며 종훈에게 달려갔다. 종훈이 흘끔 유정을 보더니 반이 있는 곳으로 도망갔고, 유정이 그런 종훈을 쫓아 달렸다.
웃고 떠들며 복도를 지나는 학생들 사이로 달리며, 유정은 잔뜩 헝클어졌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일단 툭툭 털고 일부터 하자. 우리 아이들이 나를 기다리니까.
“개학식이 엊그제인데 벌써 중간 고사 원안지 내야 하네. 바쁘면 같이 해.”
중간고사 원안지 담당은 연구부 서유정의 몫이었다. 내용 수정은 아니더라도 시험지 매수나 문항 수는 체크해야 했기 때문에 이번 주 유정은 바빴다.
작년 담당이었던 수연은 유정에게 원안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번 주는 일찍 퇴근하기는 글렀어. 그래도 다행이야, 나는 작년에 방과 후 업무까지 같이 해야 해서 하루도 쉴 날이 없었거든. 유정 쌤은 그래도 방과 후 업무는 외부 업체에 맡겼잖아.”
“그러게요.”
“그렇게 욕 먹으면서, 알고 보면 우리 편에서 되게 많이 해주셔.”
수연은 무심결에 말하다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유정은 말없이 미소했다.
차라리 바쁜 것이 다행이었다. 복잡한 생각들을 잊을 수 있어서.
인기는 이번에도 대놓고 문제집에서 문제를 베끼고 있었다. 준서와의 큰 충돌 이후,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뒤에서 씹어대는 것을 제외하고는 먼저 준서를 피하던 그였다.
그러나 작년 습관을 다 버리지는 못해서, 그는 아예 가위를 가져다가 문제집을 오려서 시험지에 붙이고 있었다.
“다 됐다.”
가장 먼저 일을 끝낸 인기가 덕지 덕지 문제집의 문제가 붙은 시험지를 유정에게 내밀었다.
“그럼 난 퇴근.”
“잠시만요.”
유정은 시험지를 보란듯이 인기의 책상 위에 올렸다.
“반려합니다.”
인기 뿐만 아니라, 다른 교사들도 놀란 눈으로 유정을 보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저 힘 없는 기간제 교사였다. 시키는 것은 대개 웃으면서 했고 거기에 무슨 토를 달지는 않았다.
오늘 같은 모습은 다른 교사들에게도 충격이었다.
“바, 반려, 아, 나, 진짜 빡돌게 하네. 야!”
인기가 유정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유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요?”
“왜요? 너 교장 깔이냐?”
유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면 뒷돈 받는 사이야, 어?”
“지금 하신 말씀 성희롱인 건 아시죠?”
파들 파들 몸이 떨리는 것을 애써 억제하며, 유정이 인기를 똑바로 노려 보았다.
준서 때문에 이미 심기가 불편한 참이었다. 잔뜩 억누른 감정은 잔뜩 부푼 풍선처럼 누군가 건드리기만을 기다렸다가 터져 버렸다.
“성희롱, 그래, 니가 이제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어? 어디 선배 교사 앞에서, 반려? 반려한다고? 이년이......”
“이년이라고요? 말 다 하셨어요? 번번이 자기가 할 일 부원들 시키고, 하다못해 몹쓸 짓까지 시키면서 이제 욕까지 해요? 정말 가지 가지 하시네요. 부끄럽지도 않아요?”
유정의 목소리가 공간을 찢고 울렸다. 수연이 놀라서 그런 유정을 잡아 끌었다.
“그만해, 유정 쌤.”
“왜요, 내가 뭘 잘못했는데요? 뭘 그만해야 하는데? 자기가 잘못해 놓고 사람 괴롭히는 거 지치지도 않아요? 그러고도 당신이 선생이예요?”
“뭐? 이런 미친년이......”
교사들이 우중 우중 몰려들었다. 한쪽에서는 유정을 다독이고 다른 쪽에서는 인기를 말렸다.
교무실 문이 열렸다. 이야기를 대충 들은 준서는 얼음 같은 얼굴을 하고 인기에게 다가왔다. 인기의 눈이 준서를 향했다. 그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여기 오시네. 그래, 교육을 얼마나 잘 시켰는지 그 순하던 유정 쌤이 나한테 하는 것 좀 봐.”
“저한테 불만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하시죠. 비겁하게 이러지 마시고.”
잔뜩 억누른 음성으로 준서가 인기를 노려보며 말했다.
“비겁? 누가 비겁한 건데? 아무 것도 모르는 신입 교사 이용해서 나 물 먹이는 게 진짜 비겁한 거 아니야?”
“시험 문제는 내고 싶지 않으면 그냥 내지 마시고요.”
준서는 인기의 책상 위에 있는 시험지를 가져다가 그대로 찢어 버렸다. 인기의 눈이 커졌다.
“뭐하는 짓이야!”
손이 끈적하도록 풀로 붙여서 열심히 만든 시험지였다. 준서는 찢어버린 시험지를 돌돌 말아 손에 쥐었다.
“일을 하든 하지 않든, 이제 상관하지 않을 테니 남 피해나 주지 마시라고요.”
“뭐, 뭐야?”
“왜요? 최대한 편의를 봐 드린 거 아닙니까?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게 비상식적인 건데, 정인기 선생님은 특별히 비상식적으로 행동하시는 것도 그냥 봐드리겠다는 이야깁니다. 대신에 뭐 다른 혜택을 기대하진 마시고요. 시험 문제도 내기 싫으면 그냥 말씀만 하세요. 저도 전공이 수학입니다. 정 낼 사람 없으면 제가 낼게요.”
준서는 인기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몸을 돌려 교무실을 걸어 나갔다. 문이 닫히자, 인기는 큰 소리로 욕을 씹어 뱉었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그 욕설에 호응하는 교사들은 많지 않았다. 같은 부장들만 억지로 웃었을 뿐이었다.
“아, 나 기분 나빠서. 술이나 하자, 학생 부장, 뭐해?”
“지금 보다시피 바빠서.”
교무실 안에는 이상한 공기가 흘렀다. 인기의 눈치를 보긴 했으나 전처럼 인기에게 아부를 하거나 그의 기분을 맞춰주려는 이는 없었다.
“아, 몰라, 수연 쌤, 나 퇴근한다.”
인기는 그렇게 말하고 교무실을 나가 버렸다.
문이 닫히자마자, 거짓말처럼 인기에 대한 욕이 여기 저기서 튀어 나왔다. 교장이 눌렀을 때에 솔직히 기분 좋았다, 맨날 저렇게 뒤에서만 큰 소리 치는 걸 보니 저도 교장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저 버릇은 죽어도 못 고칠 거다, 등등의 소리들이 앞 다투어 공간을 메웠다.
“괜찮아?”
유정은 교무실의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손을 잡는 수연을 돌아 보았다.
“네, 뭐......”
“왜 그렇게 심하게 말했어. 그냥 적당히 하지.”
“나도 모르게요. 내일부터 더 힘들어지겠죠?”
“걱정하지 마. 내가 있으니까. 그리고 다른 선생님들도 전처럼 침묵하지는 않을 거야.”
수연도 확연하게 바뀐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한 때는 인기 편에 서서 교장을 욕하던 이들도, 지금은 그저 입을 다물거나, 오히려 인기를 욕하고 있었다.
“오늘 그만 퇴근해. 내일 해도 되는 거잖아.”
수연은 유정을 걱정해서 말했으나 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할 수 있는 건 오늘 하려고요. 일 미루는 거 싫어해서요.”
수연은 가느다란 한숨을 쉬고는 유정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러나 유정은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