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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60화 (60/102)

60. 얼른 인사 드리고2017.07.31.

‘그리로 갈게요.’

문자 메시지를 들여다 보고서야, 준서는 잊었던 오늘 저녁 약속이 떠올랐다. 아니, 약속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준서가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니까.

준서의 눈이 시계를 향했다. 벌써 오후 4시 45분. 퇴근 시간인 5시에 임박해 있었다. 유정은 이미 그녀의 어머니께 그가 간다는 것을 말씀드렸을 텐데. 내가 무슨 정신에 사는 걸까.

준서는 수정에게 대강 답을 보내고 나서 교무실로 통하는 전화기를 들었다. 유정은 다행히 자리에 있는 모양이었다.

“교장실로 좀 오시겠어요.”

잠시 후에 교장실에 나타난 유정의 표정은 아까와 달리 그늘이 져 있었다. 마치 준서가 지금 하려는 말을 눈치 챈 것 것처럼.

“정말 미안합니다. 내가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었던 것을 깜박 잊었어요.”

아직은 무슨 약속인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수정의 일이긴 했으나, 유정이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유정은 무슨 생각인지 물끄러미 준서의 얼굴만 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님께는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괜찮아요.”

“저, 혹시 화 났어요? 아니, 화가 날 수 밖에 없겠죠. 정말 내가 요즘 너무 정신이 없군요. 어머님께는 정말 죄송하다고 말 좀......”

“괜찮아요.”

유정의 미간이 찌뿌려졌다. 준서는 입을 닫았다. 서늘한 눈이었다. 처음보는 유정의 표정이었다.

“저는 괜찮으니까, 교장 선생님이 편하게 하세요. 엄마한테 다시 말씀드리면 돼요. 바쁜 사람이라 일이 많다고 하면 상관 없어요.”

“아니, 오늘만 그렇지 다른 날은 괜찮습니다.”

가만히 자신을 살피는 눈을 마주하던 유정은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아팠다.

자신을 사랑하면서 얻어 맞고 다니는 것이, 늘 미안해야 하는 것이 속상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까 신경쓰지 마시고, 다음에 시간 되면 다시 알려주세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유정은 교장실을 나갔다.

준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화를 내는 것이 나았다. 어떻게 그걸 잊어버릴 수 있냐고 그를 책망하는 것이 나았다. 저런 싸늘한 표정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께 말씀까지 드렸는데 약속을 어겼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반응에 준서도 오히려 화가 났다. 왜 솔직하지 않은 걸까, 실망했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왜 따지지 않는 걸까.

원래는 사람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유학 시절 자신을 돌봐주었던 비서를 수소문해서 찾았으나 그는 내일이나 올 수 있다고 답을 보내왔다.

어쩔 수 없이 오늘 수정을 만날 사람은 준서 자신이 되어야 했다. 그는 복잡한 심기를 애써 다스리며 퇴근 준비를 했다.

‘유정 씨, 일어나면 연락 좀 주세요.’

유정은 문자를 보고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아침이었다.

어제는 모처럼 일찍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저녁부터 바로 잠들었다.

유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화 풀렸어요?”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인사도 없이 하는 말에 유정의 얼굴에는 실소가 어렸다.

밤새 듣고 싶던 목소리였다. 무슨 약속인지도 궁금했는데.

“화라뇨, 아침부터.”

“어제 화 났잖아요.”

유정은 머리를 긁적였다. 화 난 거 어떻게 알았지. 화 난 이유도 모를텐데. 혹시 성헌이 또 쪼르르 가서 알린 건 아니겠지.

“누가 저 화 났다고 그래요?”

“얼굴에 다 써 있는데. 아직 화 났어요?”

“네.”

유정은 불퉁하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 어쩌나.”

상대는 정말로 심각했다.

“어머님은요?”

“네? 엄마요?”

“어제 못 가서요.”

유정은 그제서야 준서가 왜 자신이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지를 깨닫고는 피식 웃었다.

“막 불 같이 화 내시던데요.”

무슨 심술인지, 예상치도 못했던 거짓말이 튀어 나왔다.

“어떡하죠. 저 유정 씨 부모님께 다 밉보인 건가요.”

“그러게, 왜 그러셨어요.”

튀어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유정은 입을 옷을 눈으로 골랐다.

“오늘이라도 갈까요? 꽃바구니 들고.”

유정은 결국 크게 웃고는 휴대폰을 고쳐 들었다.

“신경 쓰지 마요. 엄마는 그냥 바쁘다고 하니까 다음에 오라고 하고 마셨어요. 원래 그런 거 크게 신경쓰는 분 아니예요.”

“정말요?”

“네, 괜찮다고 했잖아요, 어제.”

“괜찮은 얼굴이 아니었는데.”

“괜찮다구요.”

“정말 괜찮은 거죠?”

세상에 겁 없이 보이는 사람이 왜 이렇게 나 화난 거 하나에 벌벌 떠는 걸까. 유정은 다시 웃음을 물어 삼키며 입을 만한 투피스를 꺼내 침대 위에 던졌다.

“저 준비해야 하니까 그만 끊을게요.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진짜 괜찮으니까.”

“준비하고 천천히 나와요.”

“천천히 나오라뇨?”

“지금 여기 유정 씨 집 앞이에요.”

유정은 눈을 크게 뜨고 창문을 보았다. 정말로 아파트 앞에 준서의 차가 보였다.

“지, 지금 뭐하는 거예요? 지금이 몇 신데......”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말이죠. 천천히 나와요.”

“천천히 나오게 생겼어...... 아침은요?”

“아침은 원래 거의 안 먹어요.”

유정은 휴대폰을 끄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그렇게 심기 불편한 티를 냈나. 준서는 그 이유조차 오해하고 있는데.

천천히 나오라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침도 먹지 못하고 나가려는 그녀의 손에, 혜신의 샐러드빵 봉지가 들렸다.

“이거, 가서 너랑 준서랑 먹어.”

언제 봤다고 이제는 호칭도 준서였다. 그런 말 없어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어제 못 왔다고 엄청 죄송하대요.”

“아휴, 일 하다가 보면 그런 일 부지기수지. 걱정 말라고 해. 편하게 다음에는 주말에 보자고 하자. 아, 이번 주말은 나 아빠랑 동창 모임에서 여행 가니까 말고, 다음 주말에.”

혜신은 빙긋 웃었다. 그런 혜신을 꼭 끌어안았다가 놓고 유정은 급하게 신발을 신었다.

“잘 잤어요?”

차에 올라타는 유정을 보고 준서가 빙긋 웃었다. 유정은 준서의 눈 앞에 샐러드 빵 봉지를 흔들었다.

“엄마 선물이요.”

“뭐가 예쁘다고 이런 걸.”

“그러게요. 다음에는 주말에 약속 잡자고 하세요.”

유정은 운전을 하는 준서의 손에 빵을 쥐어 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준서는 빵이 아닌 유정의 손을 잡아 버렸다.

“그거 빵 아닌데요.”

유정의 말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준서는 유정의 손을 가져다가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 손에서 빵을 가져다가 입에 넣었다.

“놀랐어요. 남의 손 먹는 줄 알고.”

“먹으려고 했는데 움직이더라고요.”

유정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웃었네요.”

준서가 웃으며 전방을 주시했다.

유정이 가만히 손을 들어, 준서의 뺨을 어루만졌다.

어디를 맞은 걸까.

손에 닿는 뺨이 부드럽고 따스했다.

“운전하는데 위험합니다. 아무리 내가 좋아도 그렇지.”

준서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 그러나 유정은 내친 김에 다른쪽 뺨도 어루만졌다.

“아니면 얄미워서 때리기라도 하려는 건가.”

“맞고 다니지 마요.”

유정은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누가 저 맞고 다녔대요?”

“맨날 맞고 다니잖아요. 안 그렇게 생겨서 왜 그래요? 속상하게 좀 하지 마요.”

준서의 눈이 유정을 흘끔 살폈다. 그의 미간이 모아졌다.

“설마, 화난 게 그것 때문입니까?”

“그렇게 화를 낸 것도 아닌데......”

“하, 성헌이 자식......”

준서의 입술이 깨물렸다.

“괜찮으니까 유정 씨야 말로 신경쓰지 마요. 그것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 거였구나.”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저 때문에 수정이 도와주려다 그렇게 된 거잖아요. 준서 씨는 준서 씨 때문에 내가 어디서 맞고 다니면 괜찮겠어요?”

목소리에 울먹임이 섞인 것을 감지한 준서는, 가까운 곳에 차를 세웠다.

“괜찮아요?”

준서의 목소리가 진중했다. 유정은 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을 가볍게 닦았다.

“누가 보면 실려갈 정도로 얻어 맞은 줄 알겠습니다. 그냥 형이 화나서 뺨 한 대 친 거예요. 별로 아프지도 않았고.”

“아픈 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뺨 한 대라니...... 얼마나 기분 나쁘고 속상했을까.”

유정의 손이 다시 준서의 볼을 어루만졌다. 준서가 그런 유정의 손을 잡고 반대편 뺨에 돌려 대었다.

“그 쪽 아니라 이 쪽이예요.”

유정이 얄밉다는 듯이 눈을 샐쭉하자, 준서가 유정의 코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렇게, 내가 걱정됐던 거였어요?”

“그 얘기 듣고 기분 좋았길 바라요?”

“그럼, 똑똑히 들어요.”

웃음기를 지운 준서가 유정의 어깨를 잡아 자신 쪽으로 당겼다.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별로 무섭지 않은 사람이예요. 아무리 대통령이 와서 뭐라고 해도. 심지어 할아버지에게도 미안한 감정은 크지만 무섭거나 두렵진 않아요. 그 분이 나를 믿어주시고 지지해 주시는 것이 고맙기는 하지만요. 내가 무서워하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예요.”

유정은 말없이 침을 꼴깍 삼켰다.

“형한테 맞았을 때도, 기분은 조금 나빴지만 그러려니 했어요. 그런 사람인 줄 알고 있었고 실은 더 얻어맞을 지도 모른다고 각오 했었어요. 할아버지가 계셔서 형도 참은 거죠. 난 웬만한 일에 크게 감정이 흔들리지 않아요.”

준서의 손이 유정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어요. 내가 무서워하는 그 한 사람. 그러니까...... 내가 무슨 일이 당하든 어떤 일을 겪든, 유정 씨는 나를 지지해주고 지켜줘요. 정말 내가 편안한 마음을 갖기를 바란다면.”

유정의 미간이 좁아졌다. 준서의 말은, 마치 앞으로의 어떤 일을 예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을 당하다니요......”

“가정하는 거예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어떤 것도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수정이 그대로 둬요. 내가 할게요. 나 때문에 준서 씨 힘든 거 못 보겠어요. 맞고 다니는 것도 못 보겠고요. 내가 할 테니까 준서 씨는 그냥 있어요.”

유정은 수정이 어제부터 연락이 되지 않아서 남 모르게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준서가 시켜서라고는 꿈에도 알지 못하고, 유정은 집에서 또 무슨 일을 당하나 보다 생각하면서 그녀와 연락이 닿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말을 전혀 못 알아들은 거 같은데, 나는 아무 것도 상관 없......”

“내가 상관 있다고요. 내가, 준서 씨 그러는 거 못 보겠다고요. 아파도 꾹꾹 참고만 있는 거, 말 안하고 혼자 다 감당하려고 하는 거 못 보겠다고요.”

유정의 눈에서 기어이 주르륵 흘러 내리는 눈물을 본 준서는 입을 다물었다. 말없이 한 손으로 유정의 뺨을 닦아 주고는 마음 속으로 욕을 씹어 뱉었다.

하성헌 이 자식, 다시는 집안 이야기 발설 못하게 단단히 족쳐야 겠어.

“속상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담담한 사과에도 유정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채 준서를 보다가 갑자기 팔을 벌려 그를 끌어 안았다.

준서의 넓은 등을 다독이던 유정이 그의 귀에 나직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미안한 건 나예요. 이제 미안하다는 말 금지. 그 말 쓰지 마요. 쓸 때마다 이렇게 해 줄 거예요.”

포옹을 푼 유정이 입술이 준서의 이마와 코에 눌렸다. 준서의 얼굴이 우그러졌다.

“지난 번부터 하지 말라고 하고서는 그 행동을 조장하는 보상을 주는 건 알아요?”

“그럼 어떡해요. 이렇게 예쁜데.”

눈을 크게 뜨며 가만히 상대를 노려보는 유정을 마주 보다가, 준서는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덮었다.

단순히 약속 못 지켜서 화가 난 줄 알았더니, 자신을 걱정해서 그런 거였다니.

팽팽하게 긴장하며 살아왔던 준서의 생애 한 부분이 조용히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제까지 버텨왔던 고집이나 힘 같은 것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마술 같은 것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혀로 조심 조심 어루만지던 입술을 놓고 뺨을 조용히 쓰다듬다가 준서는 웃었다.

“다섯 살 때 이후로 예쁘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데.”

“그러니까, 자꾸 나 걱정시키지 마요. 그러면 더 예쁘다고 할 거니까.”

준서의 미간이 우그러졌다. 무언가 그의 심기를 건드린 듯이 물끄러미 유정을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얼른 인사 드리고,”

준서의 입가가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같이 삽시다.”

손을 들어 가볍게 유정의 머리를 부빈 준서가 씩 웃고는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유정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몰라 옆눈으로 준서를 보았다.

“뭐라고요?”

“늦겠네요. 얼른 출발할게요.”

꽤 이른 시간에 출발했는데 지금은 딱 출근 시간이었다. 준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유정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차창 밖으로 던졌다. 그도, 나처럼 자꾸만 밤에 보고 싶고 그런 걸까.

그녀의 입이 호선을 그리는 것을 흘긋 본 준서는 잔잔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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