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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58화 (58/102)

58. 예뻐서 안아주게2017.07.29.

알람 소리에 눈을 뜬 유정은 밤새 휴대폰이 자신의 옆에 있었음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밤새 켜둔 상태라서 밧데리는 방전되어 있었다. 혹시 밤새 메시지라도 왔나 싶어 충전기를 연결하고 다시 켜서 찾아봤으나 메시지는 없었다. 도로 휴대폰을 꺼 버리고 가방 속에 넣었다.

어제 밤에 들어가서 피곤했겠지. 아침에 보고 싶지만 볼 기회는 앞으로도 많으니까. 유정은 아직 피곤이 구석 구석 남아 있는 몸을 주무르며 욕실로 들어갔다.

“아빠는 안 일어났어요?”

“어제 그렇게 들어왔는데 뭘. 너 가면 깨울까 하고.”

혜신은 그러면서도 북엇국을 끓인 것을 내주었다. 진구를 위해서 끓인 것이 확실한데도 혜신은 아닌 척 부루퉁한 표정만 지었다.

“저렇게 술 한 번 마시면 인사불성이니. 너는 술 마시는 사람 만나지 마라.”

“아니, 술 안 마시는 사람이 어딨어요?”

“저렇게 정신 놓고 마시는 사람 만나지 말라고. 그 사람은, 술 좋아해?”

혜신의 반짝이는 눈을 유정은 애써 피했다. 술을 좋아했던가. 칵테일을 마시러 갔을 때에도 그는 오렌지 쥬스만 마셨었다.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모르는 거다. 꼭 확인하고 결혼해. 너희 아빠는 다 좋은데 그게 하나 흠이야.”

그래도 좋으면서. 유정은 그런 혜신을 한 번 웃으며 보고는 북엇국에 숟가락을 넣었다. 고춧가루를 넣어 칼칼한 맛이 더해진 북엇국은 역시 일품이었다.

“언제 데려올 건데?”

한창 북엇국에 숟가락질을 하고 있던 유정이 사레가 들러서 기침을 시작했다. 티슈로 입을 닦아내니 혜신은 그 때까지 대답을 기다리며 유정을 보고 있었다.

“데려오......다니?”

“데려오라고 했잖아. 참, 오늘도 아빠 늦으신다니까 오늘 일단 데려와라.”

오늘이라니. 추진력은 대체 누구를 닮은 거야, 다들.

“아니 어떻게 오늘 오라고 해요.”

“그럼 내일?”

“엄마!”

“흐흐, 언제든지 좋으니까 얘기해. 아빠한테는 일단 잘 둘러대서 늦게 오라고 하면 되니까.”

“그래, 기왕에 하는 거 빨리 해야 나도 데려오지.”

언제 일어났는지 유원이 느릿하게 식탁에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유정의 눈이 그런 유원을 노려 보았다.

“너는, 뭐 말이나 했어?”

“말은 하면 되고.”

“대번에 차일 거면서.”

“나 서유원이거든. 승률 100%의 남자.”

“안해봤으니까 승률 100%지.”

“하, 왜 이러셔. 나 고등학교 때 인기 투표하면 맨날 1등했던 그 서유원이야. 발렌타인 데이에 사물함이 모자라서 친구 사물함까지 초콜렛으로 꽉꽉 채웠던 서유원이라고.”

유정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일어섰다.

“무시하지, 응? 당장 오늘 전화를 해서......”

그러나 뒤에서 나는 목소리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내가 말했다, 기다리라고!”

날카롭게 꽃히는 눈을 보고도 유원은 싱긋 웃기만 했다.

어쩐지 불안했다.

“기다려, 마지막으로 말하는 거다.”

유원은 대답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입술을 으득 깨물며 쫓아가려는 유정의 어깨를 혜신이 붙들었다.

“왜 그래? 누구 얘기하는 거야? 유원이도 누구 있구나?”

“있긴 뭘, 혼자 괜히 저러는 거지.”

“누군데 그래?”

“몰라요, 나 얼른 출근해야 해서.”

유정은 가볍게 혜신을 뿌리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집 밖으로 나온 유정은 혹시나 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준서의 차는 없었다. 터덜 터덜 버스정류장으로 걸었다. 약속한 적도 없는데 괜히 서운했다.

준서는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혹시 몰라 유정에게 전화를 했으나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아침부터 전화기를 꺼놓을 이유가 없는데, 아직 안 일어났나.

불안해서 유정의 집 앞으로 갔으나 유정은 나오지 않았다. 이러다가 지각할 것 같아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차를 몰았다.

어제 할아버지 댁에 갔다 와서 일정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집에 돌아와서 준서는 불안한 마음에 메시지를 보냈다.

파혼 통보를 하자 마자 이 정도로 자신의 집을 공격해 대는 인성이라면, 수정에게는 또 어떻게 대할 지가 불을 보듯 뻔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수정에게서는 답이 왔다.

고민하다 전화를 했다.

“전 괜찮아요. 어쩔 수 없죠. 준서 씨가 그런 의도 아니었다는 거 알아요. 아버진 준서 씨가 아버지를 나무라고 함부로 대했다고 하던데, 아버지가 워낙 피해 의식이 크신 분이란 거 저도 알아요.”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이 말하는 수정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준서는 그녀의 마음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수정 씨가 그 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어. 그 뿐이야. 수정 씨가 모든 것 감당하게 해서...... 미안해.”

준서의 사과에 수정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준서는 가슴 한 쪽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3년 동안 약혼자라고 하면서도 이런 사정 하나 모르고 있었던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비록 사랑해서 한 약혼은 아니라고 해도.

“그랬었군요. 정말 나쁜 의도가 아니었군요...... 아니, 차라리 그렇게 되어서 다행이예요. 제가 말도 안되는 욕심을 부려서.”

잠시 후에 감정을 억제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욕심이라니.”

“벗어나고 싶었거든요. 결혼을 하면, 길이 생기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유정이한테 사정했어요. 들으셨겠지만 유정이가 저한테 먼저 준서 씨하고 관계 고백해서. 내가 사정했다구요. 누구한테 그렇게 내가 바라는 거 막 이야기한 적 처음이었어요.”

준서는 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역시, 아니었나봐요. 욕심 부려서 단단히 벌 받았네요. 그렇게 사랑한다는데, 유정이가 그렇게 행복해 보인 적이 처음이었는데, 그걸 내가 뺏으려 해서 그랬나봐요. 유정이 잘해주세요. 좋은 친구예요. 나한테 큰 힘이 되어 주었던 친구고...... 저보다 준서 씨하고 잘 어울려요. 저는 만나야 재미 없고 우울하기만 하니까......”

“수정 씨.”

준서는 격한 숨을 토하며 채 다듬어지지 않은 목소리를 밀어 냈다.

왜 유정이 그토록 아픈 말로 준서를 밀어냈는지, 준서는 그제서야 이해했다. 이건 차라리 독한 위협보다 더 무서웠다. 나를 배신했다고 화를 내고 뺨을 치는 것보다 더 아팠다.

“미안하다는 말로 어떻게 다 설명을 하겠어. 내가 죽일 놈이야.”

“준서 씨, 그게 아니라......”

“내가 집안이나 처가의 도움으로 서게 되는 것은 싫었어. 수정 씨 때문이 아니야. 유정 씨 때문도 아니고. 유정 씨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보다도 내가 먼저 당당해지고 싶었어. 결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싶진 않았다고. 그것 뿐이었어. 그래서 시작된 일이었고...... 여하간 내 탓이야. 그러니까 수정 씨 탓하지 마. 정말 그런 거 아니야.”

유정에게 수정을 구해 주겠다고 약속을 한 것도 있지만, 준서는 그런 약속이 아니라도 수정을 그냥 내버려 두면 자기는 정말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민 의원은 당연한 수순처럼 그 다음 타겟을 수정으로 삼을 것이고, 그 곳에서 나오지 못한다면 수정은 정말로 학대 받는 삶을 천형처럼 지고 살아가게 될지도 몰랐다.

“수정 씨.”

드디어 결심을 한 준서의 시선이 허공 한 곳을 향했다.

“수정 씨가 일단 그 곳을 나와야 해. 그래야 살아. 내가 지금은 못 견디게 밉고 싫겠지만. 그래도 거기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무슨 말이예요?”

“수정 씨 부모라는 사람들, 전혀 수정 씨 입장 생각하고 있지 않아. 민 의원님도...... 그러니까 거기에서 나와야 한다고. 수정 씨도 나오고 싶어했다면서. 결혼을 안하더라도 나올 수 있어. 용기만 조금 내면 돼.”

“나보고 죽으라고요?”

웃음기 묻은 목소리가 준서의 가슴을 더 저몄다.

“죽을 용기라도 내 보라고.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야?”

수정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가 도와줄게. 어차피 나하고 결혼하려던 목적도 그거였다면서.”

“준서 씨가 무슨 수로......”

“해보는 거야. 그 곳에서 나오는 것부터. 살 곳이야 당분간은 호텔 같은 곳에서 지내도 되고. 그러다가 아무도 못 찾는 외국으로 떠나. 그렇게 살다가 와.”

준서는 한 손으로 이마를 긁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들통이 날 경우가 문제였다. 심하면 고소를 당할 수 있었다. 수정이 지금과 같이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는 상태라면, 납치 혐의로 준서만 피소될 것이었다.

최선은 아니었다. 차라리 모른 척을 하는 것이 준서에게는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보 같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준서는 그것 외에는 수정을 이 상황으로부터 분리시킬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수정 씨가 결정해. 내일, 시간하고 장소 메시지 보낼 테니까 그리로 나와. 나오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야. 나오기만 하면 그 후부터는 내가 책임질 테니까.”

수정도 용기를 내야 했다. 준서가 그 집에 가서 수정을 무작정 데리고 나올 수는 없었다. 준서는 수정의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신의 선택 때문에 더 힘들게 된 사람들을 생각하자 마음이 좋지 않았다.

결국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 사람인데, 너무 내 욕심만 내세운 걸까. 그를 끝까지 지켜주려고 애를 쓰는 할아버지와, 준우, 그리고 수정까지, 그의 머릿 속을 어지럽게 헤집는 것 같았다.

학교에 도착하니 또 일은 잔뜩 밀린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업무 성격을 파악하고 부서 별로 배분하고 오늘 학교에서 있을 일을 훑고 해야 할 일을 시간대별로 정리했다.

집중하느라 노크가 울리는 것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바쁘시네요.”

고개를 든 준서의 눈이 자연스럽게 웃었다.

“어제 보셨지만, 그래도 표지까지 만든 최종본이예요.”

“고생하셨습니다.”

준서는 계획서를 받았다. 바빴지만 계획서를 볼 시간까지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문장이 더 좋아졌네요. 다듬었어요?”

“교장 선생님만 하려고요.”

준서의 고개가 들렸다. 유정은 눈을 깜박였다.

“아, 홈페이지에, 인사말......”

“아하.”

준서의 눈이 조금 웃었다.

“바꾸자마자 봤네.”

“그러게요.”

“별 거 아니예요. 유정 씨, 아니 서유정 선생님에 비하면.”

“뭘요. 우리 엄마가 잘 썼다고, 아니......”

유정이 입술을 으득 씹고는 고개를 돌렸다. 준서의 손에서 계획서가 스륵 소리를 내며 책상으로 떨어졌다.

“어머님이 보셨어요?”

“아니, 서유원이 걔가, 아휴, 다 말해서...... 여하간 엄마가 언제 오냐고 물어보라고 하시네요.”

“오다뇨?”

“밥 한 번 먹자고요. 아빠는 내쫓겠다고 하시니까 걱정 마시고.”

준서는 푹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학교에서는 진지하고 싶은데, 이 여자 앞에서는 정말이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리 와요.”

준서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오히려 자기가 유정에게 다가왔다. 유정이 몸을 슬쩍 피했다.

“갑자기 왜요?”

“예뻐서 안아주게.”

“또 시작이야. 방금 전에 교장 모드 어디갔어요?”

“당신이 해제했잖아.”

유정의 몸을 와락 끌어안은 준서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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