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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57화 (57/102)

57. 계속 만나고 싶어.2017.07.28.

유정은 씻고 나서 천천히 거실을 가로 질러 걸어가다가, 거실에 있는 컴퓨터 앞에 모여 있는 남녀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뭐하는 거야?”

“아, 아니야.”

유원이 얼른 일어나서 컴퓨터를 가리려고 하는 것과, 유정이 컴퓨터 화면을 보는 것이 거의 동시였다. 그리고 유정은 신영 고등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교장 인사말 페이지를 보고 말았다.

“그거 띄워놓고 뭐하는 거예요?”

“이거 직접 쓴 거니? 지난번에는 니가 썼었잖아.”

혜신은 가리려는 생각도 않고 인사글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직접 쓰셨겠죠. 저는 도와드린 적 없으니까.”

유정은 고개를 살짝 굽히고 인사글 옆에 나와 있는, 준서의 반듯한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잘생기긴, 했네.”

유정의 얼굴에 붉게 어린 감정을 유원이 보고는 눈을 흘겼다.

“그냥 잘생겼다고 해야지. 잘생기긴 하다니, 남친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그 손으로 맞아도 유정 씨 손이니까 좋다고 하는 남자한테.”

“너 진짜, 니가 덜 맞았구나.”

손을 번쩍 드는 것을 유원이 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아, 가정 폭력범, 가정 폭력범!”

“시끄러워, 둘 다.”

혜신은 빽 소리를 지르고는 인사말을 읽는데 집중했다. 벌써 몇 번이나 읽었던 인사말이었지만 혜신은 지루한 줄도 몰랐다.

‘학생들에게는 정보가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문화적으로도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지원이 필요한 학생들이 존재하나 지금의 어른 세대보다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하지만 많은 학생들이 여전히 부족함을 호소합니다. 그것을 단순히 철이 없거나 어려움을 경험하지 못해서라고 치부하기는 어렵습니다. 성숙해지는 단계라 누구나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적인 아픔도 아닙니다.

학생들의 삶의 가치를 성적으로 판단하고, 등수를 매기며 그들의 모든 것을 한 뼘짜리 성적표 안에 채워 넣는 어른들의 이기심과 무관심이, 그런 학생들의 아픔을 만들고 방관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삶도 함부로 점수화하거나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성적표는 그들 삶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보여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내는 것 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그런 어른이었음을 반성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반성 속에서 ‘신영 고등학교’의 교육 가치를 다시 세우고자 합니다. 학생 개개인의 존재 가치를 있는 그대로 인정 하는 학교, 그 가치 안에서의 작은 시도조차 교육일 수 있는 학교를 만들겠습니다. 학생들이 학교의 이름을 빛내기를 바라기 보다는, 학생들의 마음 안에 빛날 수 있는 학교를 만들겠습니다.’

유정은 어느새 혜신의 옆에 고개를 내밀고 인사말을 같이 읽고 있었다. 이건 언제 또 이렇게 썼을까. 나보고 문장 잘 썼다고 칭찬하더니 만만치 않네. 유정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준서가 몇 번이고 쓰고 고치고 다듬었을 문장을 세세하게 훑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짜를 본 유정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놀랍게도, 그 날짜는 그가 취임한 날짜가 아닌, 최근에 학부모와 유정의 다툼이 있고 나서, 아픈 준서를 데리고 병원에 갔던 바로 그 날이었다.

몸도 아팠을 텐데 이런 글은 또 언제 쓴 걸까. 수액을 맞고 집에 가서 쉬지도 않고 이 글을 쓴 걸까.

“니가 써준 거 아니니? 아니면 진짜 로버트 테일러다, 응? 어쩜 글도 이렇게 잘 쓰고 딱딱 맞는 말만 하니. 내가 교장 인사말 이렇게 집중해서 읽어본 게 처음이야.”

“로버트 테일러는 아니라니까.”

유원이 잔뜩 불만이 서린 목소리로 아직도 따끔따끔한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전 영화 중에서 ‘애수’를 100번도 넘게 본 혜신은 남자 배우 중에서도 로버트 테일러를 제일 좋아했고 그것은 진구도 이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혜신이 로버트 테일러를 닮았다는 것은 더 묻지 않아도 최고의 칭찬이었다.

“로버트 테일러는 아니지만......”

유정은 준서의 반듯한 얼굴을 눈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그보다 낫긴 하지.”

“얘는, 로버트 테일러보다 나은 사람이 어딨어.”

투닥이는 중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왔다.

“어머, 너네 아빠 왔다.”

혜신은 로버트 테일러 운운할 때는 언제냐는 듯이 서둘러 현관으로 나갔다. 그런 혜신을 웃으며 보던 유정이 얼른 컴퓨터를 껐다.

“너는, 주먹질 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아군으로 돌아섰어?”

가정 폭력범이니 뭐니 하면서 설레발을 치면서도 도와주는 유원이 밉지 않아, 그에게 살짝 눈을 흘기자 유원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내가 도움을 줘야 누나도 나한테 도움을 줄 거 같으니까.”

“무슨 도움?”

“수정이 누나는 잘 지내?”

유정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 자식, 그런 거였어?

“요즘은 연락도 잘 안 되는 것 같고.”

“안돼.”

“응?”

“수정이 안된다고.”

유원은, 너 따위에게 수정이를 내줄 수는 없어, 라고 그 메시지를 읽고는 금세 얼굴을 험악하게 바꿨다.

“뭐야, 왜 안 되는데? 하, 누나도 나를 그냥 그렇고 그런 자퇴생 백수라고 생각하는 거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잖아.”

그 때에 혜신이 도와달라고 하는 바람에, 유원은 취한 진구를 침실까지 거의 업고 가다시피해서 내려 놓았다. 침실 문을 닫고 나온 유원은 유정의 방에 들어갔다. 유정은 막 잘 준비를 하고 침대에 누운 참이었다.

“정말 내가 부끄러워서 막는 거야?”

그러나 유원에게는 유정이 자건 말건은 중요하지 않았다.

유정은 물끄러미 유원을 보았다.

티격 태격 할 때는 있지만 사랑스러운 동생이었다. 그런 동생을, 그런 집안과 맺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나, 졸려. 내일 출근해야 해.”

“누나.”

유원의 얼굴이 심각했다. 유정은 몸을 반쯤 일으켰다.

“너랑 수정이 안 어울려. 니가 못하다는 게 아니라. 너 수정이 감당 못해.”

정확하게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유원의 얼굴은 더 구겨졌다.

“감당 못하다니? 내가 왜? 직업이 없어서?”

“그런 뜻이 아니야. 피곤하니까 나중에 얘기하자.”

“맞잖아, 내가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니니까. 복학하면 돼? 그래서 졸업하고 직업 가지면......”

유정은 물끄러미 유원을 보았다. 평소에 장난기 많던 얼굴이 아니었다. 꽤 진지했다.

“진심이야?”

그토록 가고 싶지 않다고 복학도 하지 않은 학교를 다시 가고, 두들겨 맞으면서도 하고 싶다던 음악을 포기한다고 한다. 대체 이 녀석에게 수정이 뭐길래. 유정의 미간이 구겨졌다.

“왜, 거짓말 같아?”

“잠깐 봤잖아.”

“잠깐 보면 안되는 거야?”

“걔가 누군 줄 알고, 너......”

유정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싫다면 할 수 없고. 그런데 누나가 막지는 마라.”

“너 또 그냥 장난으로 그러는 거면......”

“장난 아니야. 그리고 똑바로 알아. 이제까지 만난 여자들, 내가 먼저 만나자고 한 적 없어. 그냥 거절하기 귀찮아서 몇 번 만나줬던 거야. 내가 비주얼이 되니까......”

마지막 말에 결국 유정이 베개를 던져 버렸다.

“나가. 끝까지 들은 내가 잘못이다.”

“사실은 사실이잖아? 그런데 다르다고. 뭔가...... 계속 만나고 싶어.”

서늘한 눈빛에 유정의 표정도 굳었다.

“너...... 진짜 뭐든 견딜 자신 있어?”

유정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고 느꼈다. 유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견디다니...... 뭘? 직업 없는......”

“그 직업 소리는 집어치우고, 걔가 어떤 상황이라도 너 받아들일 수 있냐고.”

“어떤 상황인데?”

잠시 벌어졌던 유정의 입술이 도로 다물려졌다.

“아니다. 가라. 일단 지금은 아냐.”

“지금은 왜?”

“만나도 좀 나중에 만나. 정리되고 난 후에. 말 좀 들어라, 서유원.”

뭔지 모를 소리를 계속 해대는 것이 의심스러웠으나 유정의 눈이 전과 달리 서늘해져 있는데 유원은 시키는 대로 입을 닫았다.

저런 눈빛이면 더 상대할 수 없었다. 최소 사망까지 갈 수 있었다.

“알았어. 여하튼, 좀 도와줘라.”

유원이 방을 나간 후, 유정은 도로 찾아온 베개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어쩌자고 서유원까지 이 복잡한 관계에 들어서게 된 거야.

준서와 유원은 전혀 스타일이 달랐다. 음악을 하기 전에 유원은 뭐든 진지하게 하는 것이 없었다. 연애까지도.

수정이랑 유원이라. 생각해보지 않은 조합이었는데 의외로 잘 어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진지한 준서와 수정은 서로에게 피곤한 관계일 수도 있다.

아 모르겠다. 내 연애도 해결 안 됐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남의 연애까지 참견이람. 유정은 발을 동동거리다가 문득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지금 뭘 하려나, 아무래도 자겠지, 이 밤에 갑자기 보고 싶은 내가 미친 거겠지.

휴대폰으로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을 했다. 좋아하는 사람 사진 한 장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갑자기 서러워졌다. 고민하다가 홈페이지에 있는 사진을 저장하고 나서 그 사진을 확대해서 자신의 앞에 놓았다.

자신을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카메라를 향한 투명한 눈동자가 그녀를 보는 듯해서 가만히 미소로 마주하던 유정은 작게 중얼거렸다.

“안녕.”

어떡하지. 자야 하는데 너무 보고 싶어요. 머리 쓰다듬던 손길하고 내 입 안에 들어왔던 혀의 감촉하고 엉덩이를 톡톡 두들겼던 그 움찔한 느낌까지 다 생각나.

그냥 미친 척하고 거기서 안 나올 걸 그랬나.

유정은 차가운 액정 화면에 가만히 입술을 데었다 떼고는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싶어서 혼자 쿡쿡 웃다가 이불을 뒤집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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