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제 마음에 둔 사람은2017.07.27.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형 생각이겠죠.”
“뭐?”
준우의 눈이 일그러졌다.
“성헌이가 어떤 마음으로 지내고 있는지도 형은 관심 없지 않아요? 그러니 수정 씨건, 저건, 아니면 형 자신이건...... 당사자의 생각이나 느낌 따위는 형에게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죠. 그렇게 자라왔고 배워왔으니까......”
“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준서 너도 그만해라.”
윤택은 억지로 가라앉히려는 준우를 자꾸만 도발하는 준서를 엄한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준서는 기왕에 시작한 말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를 보면서...... 생각했어요. 왜 아버지는 어머니나 우리들은 안중에 없을까. 왜 남들에게 보이는 것만 저렇게 민감하실까. 그렇게 살기 싫었고 어머니가 불쌍했어요. 하지만 형은, 그런 아버지의 삶을 따랐죠. 작년에 성헌이를 데리고 살면서, 그 녀석이 저하고 느끼는 것이 똑같다는 것에 많이 놀랐습니다.”
“너, 지금 나를 가르치려는 거냐? 니가 교사고 교장이니까 난 학생인 줄 알아?”
민 의원과 똑같은 반응에 준서는 조금 웃었다.
“아뇨,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 그냥 제가 느낀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쩌면 제가 형과 진실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 같으니까.”
“뭐?”
준우는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준서의 앞에 섰다. 이제 윤택은 포기한 상태로 조금 물러나 있었다. 두 사람의 감정은 자신이 끼어들어 어쩔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리고 준서가 오래 참았던 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수정 씨도, 저도, 성헌이도, 형님도, 어머니도, 그리고 어쩌면 아버지도...... 그 스스로를 인정 받지 못했어요. 아버지에게 저나 형님이나 그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도구였고, 어느 정도는 저도 형님도 그 기준에 충실하게 맞춰 드렸죠.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야 하는 건 아닙니다.”
“이제 대놓고 가르치는 구나. 그래서, 내가 너한테 한 게 불만이었다는 거야?”
“불만이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제 약혼녀는 그 가정으로부터 정서적인 착취를 당하고 있었어요. 저는 민 의원님께 그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부탁드리려고 했던 것 뿐입니다. 제발 사람 마음을 좀 이해하려고 해 보세요.”
“이해? 니가 감히 나한테 이해라는 말을 하는 거냐? 니가,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기나 해?”
준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화만 올라오던 것이, 준서와 대화를 하다 보니 그 외의 감정까지 건드려진 까닭이었다.
그것은 가슴 밑바닥에 있는 줄도 몰랐던 말캉하게 만져지는 감정이었다. 내내 누르고 욱여 넣어서 들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 준우는 어쩐지 부끄러움을 느꼈다. 동생 앞에서 별 소리를 다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됐다, 니가 마지막이라고 한 것처럼, 나도 너 안 본다. 동생으로서 너는 끝이야.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할아버지.”
준우는 얼른 감정을 숨기고 냉정하게 윤택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준서는 안타까운 눈으로 무정하게 닫히는 문을 보고는 윤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자신을 도우려고 했던 윤택에게는 계속 폐를 끼치는 것이 사실이라, 준서는 조금 전과 완전히 달라진 태도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약혼녀를 도우려고 한 거였다고?”
그러나 윤택은 그 사과는 받으려고 하지 않고, 조금 전에 준서가 한 그 말을 반복해서 물었다. 고개를 든 준서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대꾸했다.
“네.”
“일단 앉아라.”
거실의 쇼파에 마주 앉자, 아주머니가 늦은 시간인데도 차를 내왔다. 그러나 아무도 차를 먼저 들지 않았다.
“파혼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네.”
“아니, 파혼한다고 했잖아. 내 도움은 이제 필요 없다고 한 건 언제고, 태도를 바꿔서 약혼녀를 도우려고 한 거야?”
준서는 수정을 돕게 되기까지의 긴 여정을 떠올렸다. 그 여정을 다 설명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유정이 그 사이에 있었다. 윤택에게 유정의 이야기까지 하는 것은 너무 이른 일이었다.
“파혼할 생각이 있어도, 약혼녀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나, 성헌이나 수정 씨...... 크게 다르지 않은 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쪽에서 파혼을 통보하긴 했지만...... 그럴 거 그냥 결혼하는 게 어떠냐?”
윤택의 뜻밖의 제안에 준서의 고개가 들렸다.
“이미 그 쪽 집안에서 마음이 없지 않습니까.”
“화가 나서 그러는 게지. 내가 다시 이야기하면 달라질 수도 있다. 물론 나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그 곳까지 가서 사과를 해야겠지.”
“제가 그럴 것 같습니까?”
준서는 어이가 없어 조금 웃었고, 윤택의 주먹이 그런 준서의 이마를 내리쳤다.
아, 소리를 내며 이마를 어루만지는 준서를, 윤택은 미간을 좁히며 보다가 혀를 끌끌 찼다.
“나이 서른 넘어서도 어른 놀리는 버릇은 여전하고, 쯧.”
“그게 아니라 너무 어이없는 말씀을 하시니까......”
준서는 이마가 아파 문지르면서도 아까보다는 한껏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뭐가 어이가 없다는 거야? 내가 보기엔 그게 최선이라서 말하는 거야. 네가 그토록 그 민수정이랬나, 그 애를 아낀다면 차라리 남편이 되어서 보살피는 게 나으리라는 거야. 네 처지하고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면 너도 그 애도 좋지 않겠냐.”
“그래서, 그 집에 가서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하면...... 그 집안에서 이제까지 수정 씨 대하던 것을 고치겠습니까, 아니면 저까지 그런 분위기 속에 끌고 들어가겠습니까.”
“내가 보기에는 니가 거기에서 당당하게 민수정을 끌고 나올 것 같다.”
“아뇨, 저도 사람인데요. 그렇게 무릎 꿇고 빌어서 하게 된 결혼인데, 저도 지고 들어가겠죠. 제가 드린 말씀도 다 부인해야 할 거고요. 다신 오늘 같은 말씀도 못 드릴 겁니다.”
“내가 그렇게 두지 않아.”
윤택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준서는 입을 다물고 윤택을 보았다.
“내가 널 그렇게 두지 않을 거라고. 네가 원하는 삶, 내가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냐.”
준서는 순간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누르며 눈을 내리 깔았다.
윤택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을 더 생각해주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한 번씩 깨닫게 될 때마다 가슴이 덥혀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너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내가 단단히 이를 거다. 그리고 더불어 손주 며느리도 말이다. 가족이 되면 지킬 수 있어.”
“하지만, 결국은 수정 씨 스스로가 일어나야 해요.”
다시 눈을 들어올린 준서가 아까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태도로 말했다.
“누가 도와준다고 해도 결국은...... 그렇습니다. 수정 씨 스스로가 극복하지 못하면 저나 할아버지의 도움이 있어도 소용이 없어요. 가장 좋은 건 가까운 양육자가 깨닫고 태도를 바꾸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틀려버린 마당이니......”
“그러니 결혼을 해서......”
“그리고 저는 그런 이유로 결혼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없고요.”
윤택의 입이 다물렸다. 준서의 눈에 일렁이는 감정은, 윤택이 적어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준서의 얼굴이 조금 웃었다. 그 순간에 윤택은, 준서의 얼굴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의 얼굴에서는 환하게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너, 연애라도 하냐?”
윤택의 말에 준서는 갑자기 눈을 피했다.
“너, 이 자식, 준우 말이 맞았던 거야? 그래서 일부러 파혼이라고......”
“아닙니다. 다만 결혼 이후까지 어느 집안에 종속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예요.”
“그래서, 연애는 하는 거야, 아니야?”
준서는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도 내일 출근을 해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드릴 말씀은 다 드린 것 같고요.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대답은 안하는 거야!”
윤택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마주 일어서자,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짓던 준서가 웃음기가 묻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중에 연애하게 되면 꼭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음에 둔 사람은 있다?”
윤택이 준서가 말한 공백을 무섭게 파고들자, 그런 윤택을 묵묵히 보던 준서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있죠.”
“허, 정말 있는 게냐? 나는 준우가 무슨 허튼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제 마음에 둔 사람은,”
준서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자 윤택의 미간이 좁아지며 그의 손바닥이 준서의 등에 철썩 소리를 내며 달라 붙었다.
준서는 아아, 하고 신음을 흘리며 천천히 현관 쪽으로 걸어 나왔다.
“당장 나가!”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지르는 윤택을 웃음기 어린 눈으로 보던 준서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집을 나갔다.
홀로 남은 윤택은 징그럽다는 듯이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뭐, 마음에 있는 게 나라고? 미친놈. 어디서 그런 되먹지도 않은 거짓말을......”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유정은 집에 오자마자 혜신이 얼굴 가득 웃음기를 머금은 채 하는 말에 살짝 미간을 좁혔다.
“네? 일찍 오다뇨. 지금이 몇 신데......”
“좀 더 놀고 오지 그랬어.”
유정은 눈으로 유원을 찾았다.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전한 걸까. 하긴, 겉으로 보기에는 딱 남자 친구 만나러 간 것처럼 보이긴 했다.
“아니예요, 나 그냥 나갔는데 우연히 만난 거고......”
“걔는 우리집에 언제 온다니?”
혜신은 아까 상황은 아예 기억도 못하는 듯 유정의 말을 냉정하게 잘랐다.
진구와 혜신은 유정이 연애할 때마다 서로 다른 태도를 보였다. 진구는 무조건 반대하는 반면 혜신은 얼른 결혼하라고 성화였다. 유정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두 사람의 태도는 더욱 극과 극을 달렸다.
“오긴 언제 와......”
“데려와. 맛있는 거 해줄게.”
“아빠도 별로 안 좋아한단 말이예요.”
유정은 고민 끝에 혜신에게 어려운 말을 뱉었다. 진구는 오늘 회식이 있어서 아직 귀가 전이었다.
“아휴, 너네 아빠는 원래 그러는 거. 그리고 요즘 나한테는 꼼짝 못해. 내가 아빠 쫓아내고 자리 만들 테니까, 너는 데려오기나 해.”
“정말요?”
유정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정말이지.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어서 그래. 너네 아빠는, 사람이 만나보고 얘기도 들어보고 해야 어떤 사람인 줄 알지 무조건 반대만 하고......”
“그럼 물어볼 게요.”
“내가 봤는데, 손발 오그라드는 줄 알았어요. 얼굴은 멀끔하게 생겨서 드라마에서도 안 하는 대사를 툭툭 뱉는데......”
이야기를 듣고서 막 방을 나오던 유원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유정에게 등짝을 맞고는 목청을 높였다.
“아, 진짜, 말로 해! 이거 가정 폭력이야, 가정 폭력, 알아?”
“너 준서 씨 얘기 함부로 하지 마라.”
“준서, 아, 이름이 준서랬지, 하준서. 그럼 형 이름은 준동인가? 동생은 준남이?”
“드라마에서도 안하는 아재 개그하는 건 너거든! 들어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
유원의 목을 잡고 니킥을 날리려다가, 유정은 그냥 어깨만 가볍게 밀치고는 욕실로 걸어갔다.
“드라마에서도 안하는 무슨 대사를 뱉는데?”
혜신은 유정이 욕실 문을 닫는 것을 기다려 유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유원은 아까 준서가 했던 말을 전했고, 혜신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무슨, 로버트 테일러야. 어머 어떡해.”
“로버트 테일러는 아니고요.”
유정은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얼른 냉정한 어투로 혜신의 생각을 정정해 주었다. 그러나 혜신은 유정의 말은 듣지도 않고 얼굴까지 붉혔다.
“왜 내 심장이 콩닥거리지, 잘생겼다면서. 참, 교장이랬지? 어떻게 보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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