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정말 잘했습니다.2017.07.25.
“왜 전화 안 받아요?”
유정은 푹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왜 준서 목소리가 들릴까. 여기는 우리집 앞인데.
두리번 거리던 유정의 눈에, 준서의 차가 눈에 띄였다.
“무슨 일 있어요?”
차창이 열린 너머로 걱정이 서린 눈빛이 보였다. 유정은 눈을 깜박였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님 아직 나한테 토라진 건가?”
한쪽 팔꿈치를 차창 모서리에 걸치며 준서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 미소에 굳어졌던 유정의 얼굴도 풀렸다.
“저 보러 오신 거예요?”
“그럼 제가 여길 누굴 보러 옵니까.”
준서는 헛웃음을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 부드럽게 그녀를 당겨 안자, 그녀는 놀란 듯이 주위를 둘러 보았다.
“여기 사람 있으면 어쩌려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머지 않은 곳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유원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하, 서유원......”
유정은 얼른 준서를 떼밀었다. 그러나 유원은 지난 번과 다른 느긋한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준서에게도 느닷없이 주먹을 내뻗던 모양이 아닌 예의 바른 모습으로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실례 많았습니다. 제가 그 때 오해를 하고.”
먼저 준서에게 손을 내미는 유원을 유정이 질린 듯이 보았고 준서는 사람 좋게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아닙니다.”
“서유원입니다.”
“하준서입니다.”
“뭘 잘했다고 여기 나와?”
유정이 유원을 노려보며 말하자 유원이 빙글 빙글 웃었다.
“데이트 하러 나오면 그렇다고 말을 하든가. 괜히 엄마 걱정하시잖아.”
“넌 가서 게임이나 해.”
“좋은 구경 두고 왜? 어디 가세요?”
유원은 준서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고 유정이 유원의 등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그를 밀어냈다.
“집에 들어가, 좀!”
“아, 진짜. 나도 교장 선생님하고 말 좀 하자.”
“너하고 할 말 없거든. 안 들어 갈래!”
발차기까지 하려다가 준서의 눈치를 슬쩍 보고 발을 내리자, 준서는 얼굴이 붉어진 채 눈을 돌렸다.
웃음을 참고 있다.
유정은 머리 끝까지 홧홧 달아오르는 느낌으로 유원을 노려 보았다.
“들어가라고, 좀!”
“교장 선생님, 제가 이렇게 누나한테 맞고 삽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불쌍해 보이지 않아요?”
유원은 등을 쓰다듬으면서도 끝끝내 발걸음을 돌리지 않고 준서에게 물었다. 그러자 준서의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아뇨, 오히려 부럽습니다.”
“뭐라고요? 부럽다니, 맞아보셔야 해요, 얼마나 아픈데!”
“맞아 봤습니다.”
준서는 유정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서 자신에게 이끌며 말했다.
“아프긴 해도 좋던데요. 유정 씨 손이니까.”
“아, 그, 그러, 네에, 그렇군요, 하하하하하, 내 손발이 어디 갔지, 어디 갔어, 내 손발!”
유원은 혼자 모노 드라마를 찍듯이 손과 발을 외치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정은 주먹으로 준서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그에게 눈을 흘겼다.
“아, 나, 진짜 몰라. 동생 앞에서 그게 뭐예요?”
“너무 티냈습니까, 제가.”
준서가 웃으며 유정의 이마를 가볍게 입술로 눌렀다가 뗐다. 그러니 그의 뜨거움이 옮겨온 것 같아 유정은 더 이상 화를 낼 수도 그를 나무랄 수도 없었다.
“들어갑시다.”
준서가 이끄는 대로, 유정은 그의 차에 올라 탔다. 천천히 시동을 거는 그를 보다가 이제서야 생각났다는 듯이 유정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온 거예요?”
“몰라서 묻습니까?”
준서는 토라진 듯이 유정을 흘긋 보고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모르죠. 오늘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보고 싶어서 왔죠.”
유정은 조금 전에 유원이 손발이 없어질 것 같다고 한 기분이 뭔지 다시 한 번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유정 씨는 저 안 보고 싶습니까?”
준서의 눈이 일부러인 듯이 무심하게 앞을 향했다. 그러자 유정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오른쪽 차창을 보았다.
“보고 싶어요.”
“그러면서 뭘.”
준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유정은 가슴 속으로부터 드글 드글 차오르는 희열에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그를 노려 보았다.
“얄미워, 진짜.”
차는 천천히 도로를 달렸다.
“어디 가고 싶은데 있습니까?”
준서의 물음에 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어디를 가기는 커녕, 계획서부터 써야 할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자 머릿 속에 불이 켜진 것처럼 한 곳이 떠올랐다.
“혹시......”
“네, 어디든지 말씀하세요. 영화 볼까요?”
“그게 아니고...... 준서 씨 집......”
“저희 집이요?”
준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의 기분이 운전에 반영된 듯이 갑자기 차체가 흔들리면서 속도가 올라갔다.
“아니, 왜 이래요?”
“유턴해야 해서요.”
“천천히 가요.”
차는 오래지 않아 준서의 집에 도착했다.
“저희 집에 오고 싶으셨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계획서 때문에요. 정 부장이 계속 헛소리해서 그냥 집에서 하려고 가져왔거든요. 근데 서유원이 계속 게임만 해서 못하고 있었어요.”
“그럼 진작에 연락하지.”
준서가 안전벨트를 풀고 나서 막 벨트를 풀어낸 유정을 당겨 안았다.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가만히 품에 안겨 있던 유정은 그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취해서 왔을 때도 마음이 복잡해서였고, 오늘도 그냥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었어요?”
“수정이 아버지 만났어요.”
“네에?”
준서가 속삭이듯이 하는 말에, 놀란 유정은 그를 밀쳐냈다.
“조심하라고 했잖아요.”
미간을 잔뜩 구긴 채 하는 말에 준서는 빙긋 웃기만 했다.
“또 혼내는 거예요?”
“혼내기는 무슨. 속상해서 그래요. 뭐라고 안 그랬어요?”
“그랬죠. 파혼하자던데요.”
준서는 간략한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유정의 눈빛도 심각해졌다.
“아버지도...... 별로 수정이 입장은 생각을 안해주시네요. 아버진 안 그러실 줄 알았는데.”
“안타깝지만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천천히 해요, 응? 학교 일도 많은데 그러다 몸 상해요. 수정이는 내가 다시 만나 볼 테니까......”
그렇지 않아도 준서와 다시 풀고 난 후, 유정은 수정과 만나서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준서의 행동력은 아무리 해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수정의 아버지를 만나다니, 유정은 차마 생각해보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괜찮습니다. 유정 씨만 곁에 있다면.”
준서의 손이 유정의 볼을 어루만졌다. 곧 그의 입술이 유정의 입술 위를 덮었다.
부드럽고 따스한 숨결이 유정의 불안했던 마음을 어루만졌다. 표현하지 않은 마음까지 그의 안에서 읽혀지고 위로 받는 듯했다.
그녀의 혀를 빨아들이며 입술 속을 헤집는 것보다, 그녀의 뒷머리와 뒷목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그녀는 더욱 달아올랐다. 그만큼 소중하게 다루어주는 손길이었고, 그녀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마음이었다.
입술을 뗀 준서가 유정을 한 번 꼭 끌어안고는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살살 매만졌다. 그러니 이제는 그의 착한 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헤어지자는 말 안할 거죠?”
눅눅한 음성이 그녀의 귓바퀴를 뚫었다.
“안해, 안해요. 나도 엄청 힘들었다고요.”
“서로 속이기 없기예요, 이제부터.”
“알았다구요.”
비죽이 내미는 입술에 다시 한 번 입술을 쪽 박은 준서가 웃으며 그녀의 몸을 놓았다.
“이 책도 괜찮아요.”
준서와 함께 작업하기로 한 것이 다행이었다. 교육학 책이라고는 대학 다닐 때 읽은 것이 전부인 유정에 비해, 준서는 다양하게 많은 책을 섭렵했다.
“청소년기의 또래지향성의 함정에 대해 이야기한 책인데, 청소년기를 대하는 어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색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교육 심리학에서는 보통 청소년기에 또래지향성이 생겨나서 어른들보다 친구들이 더 가까워진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것의 함정을 밝힌 책이죠.”
“‘아이의 손을 놓지 마라’? 그러니까 어른이 필요하다는 이야긴가요?”
“절대적으로요. 청소년기는 어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죠. 하지만 무조건 억압하고 기존 질서를 가르치라는 것이 아니예요. 그보다는 또래가 줄 수 없는 것, 예를 들면 무조건적인 사랑과 안정감 같은 것을 주라는 것이죠. 그래서 어른과의 관계를 새롭게 세워가고 결국은 독립할 수 있도록.”
“이 책 넣어야 겠네요.”
유정은 최근에 종훈과의 관계에서 힘들었던 것을 떠올리며 ‘아이의 손을 놓지 마라’는 책을 항목에 넣었다. 준서의 조언으로 작업은 빨리 이루어졌다. 교육학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책과 소설책도 넣었다.
“재밌겠다, 그쵸.”
반짝 반짝 눈을 빛내며 작업하는 유정을 물끄러미 보다가, 준서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유정의 미간이 좁아졌다.
“일할 때는 좀.”
“미안, 미안.”
준서가 얼굴을 닦아 주려는 듯이 손으로 그녀의 볼을 살살 문지르다가 그녀의 허리를 안아서 자신의 몸에 밀착시켰다.
유정이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이 후후 웃다가 자신에게 기댄 준서의 볼에 입을 맞췄다.
“일할 때는 하지 말자면서.”
“먼저 건드렸잖아요.”
“아, 못 참겠다.”
유정을 의자에 기대어 앉힌 채, 준서는 몸을 일으켜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묻었다. 준서의 더운 살을 받아들이며 유정은 눈을 감았다. 곧 그 뜨거움은 목을 거쳐 그녀의 가슴에까지 이르렀다.
유정은 눈을 뜨고, 자신의 쇄골을 혀로 핥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의 뒷목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다가 그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자, 그의 움직임은 좀 더 격렬해졌다.
“준서 씨.”
낮게 속삭이는 음성에 준서는 고개를 들었다.
“미안. 나가 있을게요.”
순간 자신도 이성을 잃었던 듯 준서는 그렇게 말하고 유정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서재를 나갔다. 유정은 후끈 달아오르는 몸을 애써 자제시키며 계획서를 계속해서 작성했다.
혹시 걱정할까봐 집에 늦게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해 놓은 상태였다. 유원이 무슨 말을 전했는지 혜신은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오라고 대꾸했다.
작성을 거의 마쳤을 무렵 준서가 다시 들어왔다. 그 사이 씻었는지 옷은 실내복 차림에 얼굴이 말끔했다.
“다 했어요?”
“네, 좀 봐줄래요?”
준서는 유정이 작성한 계획서를 꼼꼼히 읽으며 입가에 지어지는 미소를 어쩌지 못했다.
“문장이...... 정말 좋네요. 혹시 따로 글 쓰는 거 있어요?”
“글요? 따로 쓰는 건 없는데.”
“어디 기고라도 해봐요. 잘될 것 같은데.”
준서는 몇 부분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이야기했고, 유정은 그것을 다시 보면서 고쳐 나갔다.
“다 됐다!”
일단 초고는 완성되었다. 내일 상우와 수연까지 모여서 이야기 나누고 더 고칠 것은 고치면 될 것 같았다.
팔을 번쩍 치켜들며 유정이 환호성을 지르자, 준서가 그런 유정을 일으켜서 그대로 끌어 안았다.
“고생했습니다, 우리 유정 씨.”
“칭찬인가요?”
“그럼요. 정말 잘했습니다.”
등을 쓰다듬던 준서의 손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유정은 숨을 죽이며 가만히 준서의 몸을 안고 있었다.
준서의 손이 유정의 엉덩이에 닿았다. 두어 번, 툭툭 치는 손길에 유정의 몸이 달아 올랐다.
“어머, 변태.”
유정이 준서를 밀어내자, 준서가 흣 웃고는 몸을 숙여 그녀의 코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서로를 보는 시선이 뜨겁게 얽혔다. 준서의 입술이 유정의 입술을 거침 없이 덮었고, 곧 요란한 숨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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