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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53화 (53/102)

53. 왜 전화 안 받아요?2017.07.24.

“그걸, 어떻게......”

민 의원은 눈 앞에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는 미청년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수정이 민 의원의 부인의 딸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 가족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진실은 어떻게든 알려지게 마련입니다.”

“수정이, 그 애가 말했나.”

준서는 잠시 민 의원을 주시했다. 늘 철두철미하고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성격. 아마 수정에게 학대를 한 사람은 이 사람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 사람이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그것이 수정 씨의 잘못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숨기라고 강요받아온 삶이 수정 씨에게는 고통이었을 테니까요.”

“고통?”

“존재 자체를 스스로 거부해야 하는 고통 말입니다.”

민 의원은 진중하게 말하는 청년을 바라 보았다.

처음 혼인 말이 오갈 때, 민 의원은 다른 곳에서 들어온 선 자리와 비교하면서 준서를 일단 젖혀놨었다. 그 곳은 대기업의 차기 총수였고, 수정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나 두 사람에 대해 면밀히 조사를 하고 난 민 의원은 준서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차기 총수라는 그 청년은 돈이 많을 뿐, 스스로의 철학도 없고 삶의 의지나 욕망도 부족해 보였다. 그저 집에서 물려받은 대로 안일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준서는, 어디를 가서도 자신이 있는 곳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변화시키는 인물이었다. 대학이든, 학교든, 유학을 가서든, 그는 늘 짙은 존재감을 드러내며 자신의 의지를 보였다.

민 의원은 수정이 모든 것에 완벽하지만 어쩐지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고 힘이 없어 보이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시키는 것에는 고분고분했으나 도무지 자신의 의지가 없는 것도 그랬다.

수정이 준서를 만나면 어떻게 될까. 민 의원은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도 되었다. 준서가 수정도 변화시켜 주지 않을까. 수정이 준서와 같은 의지를 조금이라도 갖게 된다면, 이전보다 훨씬 반짝반짝 빛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수정이는 부족함 없이 자랐어. 해 달라는 건 모두 해주었고......”

“해 달라는 것이 있었습니까?”

겨우 몇 달을 만났을 뿐인데도, 준서는 민 의원보다 수정을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민 의원은 조금씩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해 달라는 게 많지는 않았지만, 있긴 했었네.”

“뭐가 있었습니까?”

“그야, 유학도 그 애가 원한 것이었고, 결혼 전까지 쉬고 싶다는 것도......”

준서는 마음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새어머니의 소망이었을 것이다. 그런 큰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다.

“믿지 못하는 얼굴이군.”

“존재를 부정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서, 모든 행동의 이유는 인정 받기 위함입니다. 유학도, 그리고 결혼 전의 휴식도 스스로가 원해서 선택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렇게 해야 타인에게서 인정을 받기 때문에 선택한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요.”

준서는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말하고 민 의원을 바라 보았다.

민 의원은 그제서야 조금씩 불쾌함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준서에게서는, 상대가 누구든 그를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 그것은 준서가 무례하거나 폭력적이어서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부드러운 자기 확신이 있었다. 스스로 선택하고 살아온 자의 여유가 있었다.

대부분이 남의 손에 의해 선택해야 하는 이쪽 세계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더 끌렸던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성격이 오히려 민 의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자네는 내가 수정이를 잘못 키웠다, 뭐 그런 말을 하려는 것 같은데.”

“그런 말씀을 드리려는 건 아닙니다. 수정 씨가 어떤 느낌으로 살아왔는지, 아버지로서 아셨으면 해서 말씀드린 것 뿐입니다.”

민 의원의 얼굴이 우그러졌다.

“뭐야, 교육계에 있다더니 뭐 내 선생님이라도 된다는 건가.”

완전히 불쾌한 낯빛을 드러낸 민 의원을 보고 준서는 가느다란 한숨을 쉬었다. 그라면 이야기가 어느 정도는 통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잘못이었다.

민 의원 역시, 수정의 상황을 정확히 알기 보다는 자신의 수치를 가리려는 생각에만 몰두해 있었다.

“약혼은 없었던 일로 해. 그것 때문에 연락한 것 아닌가. 수정이가 좋은 혼처가 없어서 자네 같은 사람과 약혼을 했는 줄 아나. 다른 혼처도 줄을 서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민 의원은 그렇게 딱딱하게 못을 박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준서는 아무 대답 없이 그런 민 의원을 올려다 보았다.

이러니 자신이 한참 아랫 사람이 된 것 같아 민 의원은 자존심이 상했다.

“뭐하는 건가.”

“아직 식사 자리 안 끝난 것 같은데, 급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뭐, 뭐야?”

민 의원은 몸을 부들 부들 떨면서 준서를 노려 보았다.

“그것도 아니라면, 민 의원님께는 친딸인 수정 씨 이야기를 하는데 왜 그렇게 급히 가십니까?”

“자네,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핏발이 서서 붉어진 눈을 보며, 준서는 안타까움을 삼켰다.

이대로 형식적인 사과를 하고 적당히 마무리할 수도 있었지만, 이제까지 이런 부모 밑에서 괴로움을 참아왔던 수정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녀의 친구인 유정을 생각하면 마지막 말은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모든 것을 민 의원님을 향한 공격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게라도, 수정 씨에 대한 죄책감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겁니까?”

“저, 이런, 어디서 이런 놈이......”

주먹까지 부르르 떨어대는 민 의원에 비해, 준서의 태도는 흐트러짐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결국 민 의원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고함을 내지르고 말았다.

“자네, 왜 이렇게 건방지게 구나? 어른 대하는 것도 못 배우고 자랐나?”

삿대질을 하는 민 의원을, 준서는 동요 없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허어, 참, 이제는 우리 쪽에서 먼저 파혼할 생각이네. 자네 같은 사위 내가 원하지 않아.”

민 의원은 자리를 떨치고 나가 버렸다. 준서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면서 시선을 창 쪽으로 돌렸다.

“서유원, 너 요즘은 공연 없어?”

몇 시간째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만 하고 있는 유원의 어깨를 유정이 흔들었다. 집에 컴퓨터는 한 대 뿐이었다.

“없어. 끝났어.”

“끝? 지난 번에 그렇게 두들겨 맞은 건 그럼 아무 소용이 없네.”

유원이 유정을 노려 보았다.

“뭐 좋은 추억이라고 자꾸 끄집어 내?”

“그러니까 그런 안 좋은 추억 만들면서 획득한 건데 연습 좀 하지, 나가거나.”

“아, 좀, 나 한 달 만이거든. 게임 좀 하자.”

“나 동아리 계획서 써야 한단 말이야.”

교사 독서 동아리 계획서를 쓰려면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를 알아야 했다. 책 서평부터 검색해서 추리려고 했는데, 유원이 비켜주지 않는 바람에 두 시간을 꼬박 기다려야 했다.

“저리 가.”

“아, 진짜, 서유원, 나 좀 하자!”

유정은 결국 소리치면서 유원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가격했고, 유원이 곡소리를 내며 맞은 등을 쓰다듬다가 몸을 일으키고 유정을 노려 보았다.

“아니 일은 학교에서 해! 왜 집에서까지 그래!”

“학교에서 하다가 집에 온 거야. 부장 새끼가, 아휴.”

인기는 수연까지 유정의 편이 되어 버리자, 이제는 대놓고 유정에게 못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유정에게는 귀찮은 정도였으나 계속 들으니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왜, 교장실에서 일하지 이리로 왔어?”

“거기 책상 하나 들여줘?”

“이수연도 교장한테 붙었다면서? 수완도 좋아, 사람 후리는 건 교장한테 배웠나?”

결국 퇴근시간이 되자 마자 유정은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학교를 나와 버렸다. 계획서고 뭐고 이러다가는 명이 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집에 오니 이번에는 유원이 버티기 작전 중이었던 것이다.

“서유우어어어언!”

“또 왜 그래? 얘네는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투닥거려, 응?”

듣다 못한 혜신이 방에 들어왔다.

사이 좋게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 아이들처럼 투닥거리는 그들이었다.

“아휴, 누나가, 나 백만년 만에 게임 좀 한다는데 그걸 못 기다리고!”

“야, 두 시간을 기다렸거든. 나도 빨리 하고 자야지!”

“PC방 가서 해!”

“내가 내 집 컴퓨터 두고 왜 PC방을 가?”

“둘 다 똑같애, 똑같애. 아직도 애 같이 싸우기나 하고.”

혜신의 주먹이 유원과 유정의 이마에 툭툭 떨어졌다. 유정은 억울함에 맞은 이마를 어루만지며 혜신에게 항변했다.

“아, 진짜, 유원이한테 좀 나가라고 해요! 두 시간이나 했단 말이야.”

“아니 그러니까 왜 하필 오늘이냐고.”

혜신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유원이 말도 맞아. 얘 되게 오랜만에 컴퓨터 하는 거야. 넌 그 동안 충분히 썼잖아.”

유정은 순간 몸의 피가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도 내내 힘들었는데, 집에서도 자신을 힘들게 한다는 생각이 들자 세상에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알았어요.”

유정은 몸을 돌렸다. 혜신의 눈이 커졌다. 혜신이 말릴 사이도 없이, 유정이 현관으로 나갔다.

“나갔다 올게요.”

“어딜?”

“그냥 바람 좀 쐬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유정은 걱정할 수 밖에 없는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한동안 집에서는 정적이 흘렀다.

“너네 누나 화났다. 어떡하니.”

혜신은 미간을 모으며 중얼거렸다. 혜신은 유원이 자기 잘못이긴 하지만 진구에게 심하게 매를 맞은 후에 그에게 마음이 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편을 들었는데 금세 마음이 상해서 나가 버리는 것을 보니 그녀도 마음이 불편하긴 매한가지였다.

“아니 뭐 저런 것 가지고 그래. 밴댕이.”

“그러지 말고 나가 봐!”

혜신은 다른 사람이 된 듯이 유원의 등짝을 가격했다. 유원은 벌떡 일어서며 고함을 질렀다.

“아 진짜 우리 집 사람들은 맨날 나만 때려!”

“나가 봐, 얼른!”

“알았어요, 좀!”

유원은 투덜거리면서 슬금 슬금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왜 전화 안 받아요?”

유정은 푹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왜 준서 목소리가 들릴까. 여기는 우리집 앞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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