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내가 유정 씨 다시 안고 싶으면2017.07.23.
“불렀어도, 제가 원하지 않으면 안 왔겠죠.”
준서는 공문 한 장 한 장을 넘겼다. 유정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죄송하다고 하면 별로 안 좋아할 거고, 그렇다고 다른 말을 하는 것도 뻔뻔스럽고.
“저 일이 늦게 끝나서 아직 식사 전입니다.”
여전히 시선은 공문을 향한 채로, 그가 말했다.
“저는 나온 김에 먹고 들어갈까 하는데.”
“그럼, 드세요.”
유정이 메뉴판을 준서의 손에 넘겼다. 메뉴판을 받아든 그가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사주시는 겁니까?”
유정의 미간이 모아졌다. 준서의 시선이 그녀의 떨리는 손 끝으로 내려 앉았다.
“돈 안 가지고 나왔는데.”
“사 드릴게요.”
유정은 그렇게 말하고 손을 테이블 밑에 넣었다. 준서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준서는 봉골레 파스타를 주문했다.
“서유정 선생님은, 아무 것도 안 드십니까?”
“전 배불러요.”
“저만 먹으니 민망하군요.”
“그럼, 저도 먹을까요?”
유정의 말에 준서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 그럴 수가 없잖아요. 저 때문에......”
유정은 원망하듯이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말해도 될까 싶었다.
잠시 생각을 고른 유정은, 내친 김이다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수정이가 제 앞에서 무릎까지 꿇었어요. 자기 결혼 안하면 거기서 못 벗어난다고. 진짜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 상황에서...... 아니야 난 준서 씨가 좋으니까 니가 참아, 그럴 수가 없잖아요. 오전에 하신 말씀 듣고서야 제가 뭘 잘못했는지 알았어요. 그 전에는 저도, 뭐가 옳고 그른지 구분할 수도 없었고...... 진짜 마음 상하신 건 백 번 이해하고 저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데...... 죄송해요.”
결론은 또 그렇게 내려 버리고 유정은 입을 닫았다. 또 한 소리 듣겠군. 긴장한 유정에게 준서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묵묵히 시선을 내리고 있던 준서가 투명한 시선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이해합니다.”
언제나처럼 명료한 태도였다. 유정은 흠칫 몸을 떨었다.
“이해한다고요? 그런데 아까는 왜 그런 말씀을......”
“이해해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니까.”
복잡한 감정을 끊어내듯이 봉골레 파스타가 나왔다.
수연이 준서에게 점심 약속을 이야기 했을 때, 그리고 유정도 나온다고 말했을 때 준서는 솔직히 갈등했다. 마음은 아직 풀리지 않은 채였고,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보기도 불편했다.
그래도 여럿이 있으니 차라리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수연이 자리를 피해주기 위해 상우와 일어났을 때에는 진심으로 그들과 함께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 숨어 있는 더 깊은 마음을 준서는 알고 있었다. 수연이 그냥 있으라고 했을 때 못 이기는 척 남았던 것도, 화장실에서 나온 그녀를 좀 더 오래 붙들고자 민망함을 무릅쓰고 늦은 점심을 먹는 것도, 그 마음 때문이었음을.
피하면 더 불편해지고 해결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밥을 사 달라는 엉뚱한 제안을 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을 여과 없이 표현했다.
그러고 나니 더 분명하게 보였다. 그의 안에 숨은 진짜 마음이.
준서는 점원이 파스타를 놓고 돌아가자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속이 좁아서 그렇습니다.”
유정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준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묵묵히 파스타를 먹었다.
유정은 눈을 내리깐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심장이 아프게 벌컥거렸다. 그가 먹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정갈했다.
문득 혼자 밥 먹기 싫다고 근무 첫날에 그녀를 끌고 밥집에 갔던 것이 떠올랐다.
그렇게 혼자서 묵묵히 살아왔던 모양이다,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 주지 않고, 생의 짐은 늘 어깨가 무겁도록 짊어지고.
“천천히 먹어요.”
유정은 고개를 내밀고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준서가 고개를 들었다.
“전 괜찮으니까, 천천히 드시라고요. 수업은 2시에요.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어요.”
“업무는요?”
“오늘 할 건 대강 끝냈어요. 이거, 계획서만 쓰면 되겠네요.”
유정이 공문을 들어 보였다. 준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파스타를 먹었다.
식사를 끝낸 준서가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유정이 그의 빈 컵에 물을 따라 주었다.
“덕분에 맛있게 먹었습니다.”
준서의 눈에 미소가 어렸다. 진심인지, 아니면 그저 친절을 가장한 것인지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다행이네요.”
유정은 마주 미소했다. 그러나 곧 미소는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와 아무렇지도 않게 웃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또한.
그녀는 마음 안에 덜컥거리는 진실을 끄집어 냈다. 혼자 모든 것을 끌어안도록 둘 수는 없었다.
“속 좁은 거 아니예요.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해요. 준서 씨는 잘못한 거 없고, 그냥 나라는 사람을 잘못 만난 것 뿐이예요. 하필이면 상황도 이렇게 꼬여 버려서. 그러니까 차라리 날 욕해요. 나쁜 년이라고.”
“정말요?”
마주하는 눈빛이 지나치게 곧아서, 유정은 할 말을 잃었다.
“네, 정말요.”
“나쁜 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서가 말했다. 유정은 웃었다. 놀라서가 아니라, 준서의 말투가 감정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딱딱해서였다.
“욕 먹었는데도 웃겨요?”
“욕 하는 거 맞아요?”
웃기 시작하는 유정을, 준서는 웃지도 않고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러자 유정도 도로 웃음을 멈추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여전히 그와 그녀 사이에는 벽이 있었고, 아무 것도 해결된 것은 없었다.
“쉽게 용서 받을 수 없는 거 알아요. 이해하구요. 원망도 안해요. 그러니까 진심으로 대해요.”
정색하고 하는 말에 준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진심으로요?”
“진심으로 욕하라고요.”
준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욕 하랬더니 주먹질까지 하려는가. 불안한 시선으로 준서를 건너보는 유정에게, 준서가 걸어왔다.
옆자리에 앉은 준서가 손을 뻗었다. 다리 위에 얹어진 유정의 손가락을 엄지와 검지로 매만지다가, 손바닥을 맞대고 움켜 잡았다.
“진심으로요.”
손이 손에 잡히는 순간 손으로부터 심장까지 뜨거움이 끼치는 것 같았다.
유정은 거칠어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준서를 보았다. 다가온 준서의 입술이 그녀의 붉어진 뺨을 매만졌다.
“진심을 몰라서 그런 말하는 겁니까?”
귓가에 나직하게 닿는 목소리에 유정의 심장이 거세게 박동했다.
“원망했잖아요?”
“좋아하니까.”
준서의 손이 유정의 볼을 매만졌다.
“투정 부린 건데, 내 마음 알아달라고.”
유정의 눈이 커졌다. 일렁이는 눈에 원망과 깨달음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그런 유정의 등을 가볍게 밀어, 준서는 그녀의 고개가 자신의 어깨로 떨구어지게 했다.
“제가 유정 씨 많이 좋아합니다.”
유정은 그의 가슴에 더운 숨을 뱉었다. 자꾸만 호흡이 가빴다. 머리는 팽팽 돌았다.
“그래서 자꾸 아이가 되는 군요, 유정 씨 앞에서는.”
“미안해요.”
“나도 미안합니다.”
준서의 팔이 유정의 등을 어루만졌다.
사과하고 싶었다. 서운한 마음을 그냥 서운하다고 표현하지 못하고 놀아난 느낌이라고 하면서 그녀에게 의도적으로 상처를 준 것, 그러면서 그녀가 먼저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란 것.
마음이 불편한 만큼 그러고 싶었다.
몸을 일으킨 유정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그 입술에 준서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깊이 혀를 넣은 것은 아니었지만, 입술과 입술의 만남으로도 유정은 다시금 온 몸이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무릎을 꿇던 수정이 떠올랐다. 그녀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막막한 마음도.
수정의 앞에서 나는 또다시 죄인이 되어야 하는 걸까.
“내가 유정 씨 다시 안고 싶으면,”
입술을 뗀 준서가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수정 씨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면 되는 겁니까?”
유정은 숨을 흑 들이 마셨다.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인 듯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것까지 짐을 지울 수는 없었다.
“아뇨, 그건 수정이가 알아서 할 일......”
“알아서 못해서, 이런 상황까지 온 거니까.”
준서는 짧은 숨을 내쉰 후에 눈을 한 번 깜박이고,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난, 도저히 유정 씨 포기 못하겠고.”
유정은 달아오른 얼굴을 숙였다.
“유정 씨는 수정 씨 문제만 해결 되면, 아무 문제 없는 거죠?”
“괜히 다쳐요. 거기가 어떤 집안인 줄 알고.”
“괜히 다칠 일 안합니다. 뭐 내가 싸우고만 사는 줄 아나.”
준서는 천천히 일어섰다. 유정은 고개를 들었다.
“나가죠. 수업 할 때 다 됐습니다.”
밥을 사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그는 계산서를 든 채로 걸어갔다. 유정이 재빨리 계산서를 빼앗았고, 그러느라 그의 손과 그녀의 손이 스쳤다.
준서는 도로 계산서를 빼앗지 않고 피식 웃기만 했다. 계산을 하고 돌아서는 유정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녀의 손을 갑자기 꽉 쥐었다.
“고맙습니다.”
꼬물대던 유정의 손이, 준서의 손을 마주 쥐었다.
손바닥과 손바닥이 만나면서 그 안에 뜨거움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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