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뭐가 그렇게 죄송해2017.07.15.
“화상 치료 받으래.”
자리에 오자마자, 수연은 유정의 등을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네?”
유정은 자기도 모르게 발을 오무렸다. 당시에는 화끈거렸으나 지금은 별 느낌이 없어서 그냥 방치해 두고 있었다.
“치료 받으라고, 꼭.”
“괜찮은데.”
“난 시키는 대로 전했어.”
수연이 무언가 아는 눈빛으로 유정을 보고 씨익 웃었다. 유정은 민망해서 눈을 피했다.
“참, 오늘 교무회의 있는 날이네. 오전에 바쁘겠다.”
“아, 오늘이예요?”
“응, 매주 화요일이잖아.”
수연이 당연한 듯이 이야기했다. 유정은 이마를 짚었다.
특별히 교장실에 가지 않는 이상, 준서를 만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교무 회의에는 전교사 및 교장 교감도 들어오기 때문에 만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인기가 출근했다. 유정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수연에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유정은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 할 것들을 정리하고 회의 들어갈 준비를 했다.
“가자.”
수연이 유정의 팔을 가볍게 치며 일어서자 인기의 눈빛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그래도 수연은 유정을 바라보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헛기침을 큼큼 하며 인기는 먼저 일어나서 나가 버렸다.
“그냥 모른척하지 그랬어요.”
유정은 수연을 바라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뭐하러 그래. 나도 좀 반항적으로 살아보게. 그러면 뭐, 교장 선생님이라도 내 편 해주겠지.”
유정이 고개를 들자 수연이 씨익 웃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처럼.
“가자.”
유정이 회의록을 들고 일어서자 수연이 그런 유정을 잡아 끌었다.
어쩔 수 없이 피식 웃으며 수연을 따라 걸어 교무실을 나가는데, 험악한 표정의 상우가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유상우 쌤, 괜찮아요?”
수연이 돌아보며 물었다. 상우는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일 있어요?”
수연의 시선을 받고도 상우는 멍한 표정을 지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정은 문득, 준서로부터 상우가 힘들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을 떠올렸다. 수연이 상우의 정신을 깨우듯이 그의 어깨를 흔들며 소리쳤다.
“유상우 쌤!”
“저, 점심 시간에 시간 되세요?”
상우가 유정과 수연 어느 곳에도 정확히 시선을 두지 못한 채 물었다.
“네.”
“같이 밥 먹자고요. 제가 살게요.”
상우가 먼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라, 유정과 수연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수연이 미소하며 말했다.
“네, 얼마든지요. 밥은 제가 살게요. 이제까지 쏜 적 없잖아요.”
“아닙니다. 제가 쏘겠습니다.”
상우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자기 자리로 들어갔다. 그런 상우를 보다가, 유정과 수연은 회의 시간이 임박함을 알고는 다시 몸을 돌려 교무실을 걸어 나갔다.
회의는 평소처럼 진행되었다. 교감의 진행으로 각 부서의 부장들이 이야기를 했고 그것을 교사들은 받아 적었다. 준서는 그 모양을 물끄러미 보고 있기만 했다.
“저, 마지막으로 교장 선생님 말씀이 있으시겠습니다.”
교감은 그렇게 말하고 단상에서 물러났다. 준서는 천천히 단상 앞으로 나왔다.
무심결에 준서를 바라본 유정은 그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고는 얼른 눈을 내리 깔았다.
준서도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혹시 제가 이야기하기 전에, 오늘 말씀하신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서 하실 말씀 있으신 분은 자유롭게 이야기해 주십시오.”
준서는 좌중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 물론 아무도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준서는 잠시 냉랭한 분위기를 그대로 느끼며 서 있었다. 그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다시 입을 다문 그는, 작심한 듯이 눈을 바로 뜨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기존의 질서를 깨야 선생님들께서 좀 더 자유롭고 창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교육 활동에 전념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정한 것을 깨고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 또한 강압적인 방식을 사용했고 그것이 전혀 교육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선생님들 스스로 답을 찾아가실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제가 우격다짐으로 제 사상을 우겨 넣었습니다.”
교사들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갑작스런 고해 성사가 반갑다기 보다는, 저러다가 또 무슨 폭탄을 터뜨릴지 몰라 불안해하는 분위기였다.
“지금의 경직된 분위기를 만든 것은 제 탓입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은 변명 밖에 되지 않을 겁니다. 깊이 사과드립니다.”
단상 옆에 선 준서는 머리 뿐만 아니라 허리까지 숙였다. 그러니 교사들의 불안감은 더 심해지고 말았다. 또 뭘 시키려고 저러는가. 이제는 학생별 인생 설계까지 하라는 거 아닐까.
불안 속에서 유정은 눈을 똑바로 뜬 채 준서를 보고 있었다.
자신과의 통화로 엉망이 되어 버린 심경이지만, 오늘 해야 한다고 준비한 말은 하고 마는 그가 아팠다. 만약 아무 일도 없었다면 그는 모든 일을 마치고, 유정에게 따로 말했을 지도 모르겠다.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게 생각보다 떨렸다고. 하지만 유정 씨를 생각하며 참았다고.
지금은 뭘 생각하면서 참고 있나요.
나는 왜, 당신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런 말을 해버린 걸까요.
몸을 다시 꼿꼿하게 세운 그는 단상 앞으로 걸어왔다. 약간 얼굴이 붉어져 있었으나 표정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어떤 것도 더는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직무는 하셔야 하는 것은 기존과 동일합니다. 그 외의 것들은, 저는 선생님들을 믿습니다. 처음 교사가 되었을 때의 생각과 의지, 첫 학생을 받았을 때의 설렘 같은 것, 그것들이 선생님들께도 동일하게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준서의 눈이 갑자기 유정을 향했다. 유정은 눈만 크게 뜬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니, 그것이 없었더라도, 우리가 함께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유정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전교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이 공간을 울렸다. 유정은 어색함에 눈을 돌려 버렸다.
“사람과 사람 관계는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만나서 나빠지거나 혹은 좋아지거나. 그대로라면 그것은 관계가 아닌 것이죠. 선생님들과 저와의 만남이, 그리고 선생님들과 선생님들의 만남이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또 이 공간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할 말은 어느 정도 한 듯이 준서는 눈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긴장한 손끝을 내리고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교사들을 마주했다.
“교무실에 작은 상자를 비치해 놓을 계획입니다. 무기명으로 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바꾸었으면 하는 학교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서 상자 안에 넣어두시면 제가 읽어보고 최대한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니, 적어도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는 교장이 되겠습니다.”
다시 꾸벅 인사를 하고 준서는 단상을 내려갔다.
교무 회의가 끝났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약간 얼떨떨한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준서는 끝까지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뭘 내라고도 하지 않고 잘못했다고 꾸중을 하지도 않았다.
뒤에 더 큰 것이 있을 거라는 말, 상자에 무언가를 넣으면 그걸 가지고 책을 잡을 거라는 말, 단순하게 오늘 뭘 잘못 먹었을 거라는 말들이 오갔다.
“나한테 한 방 먹은 거지.”
그 상황에서 인기는 흐흐 웃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이미 그 말을 진심으로 듣고 있는 이는 없었다.
“그 잘못 먹은 게, 유정 쌤이 준 커피였던가?”
수연이 유정의 팔짱을 끼면서 은근히 물었다. 유정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래. 안 물어볼게. 궁금해 죽겠지만 나도 잘못한 게 있으니 참지 뭐.”
“할 말도 없어요.”
유정은 대꾸하면서 회의록을 소리나게 책상 위에 던지듯이 놓았다. 전화기가 울린 것은 그 때였다. 정인기가 받고는 표정을 와락 구겼다. 누군지 뻔했다.
“네.”
그 한 마디를 하고는 전화기를 던지듯이 놓았다.
“서유정, 교장이 찾아.”
아예 직함도 빼버린 호칭에 유정의 몸이 바르르 떨렸으나, 그녀는 별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 빨아달라고 부르나.”
인기는 피식 웃으며 말하고는 담배를 들고 나가 버렸다.
준서는 가만히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어제 수액의 영향인지 오늘은 몸이 한결 가뿐했다. 기분은 전혀 그렇지 못했지만.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눈을 감았다 뜬 준서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
곧 유정이 걸어 들어왔다. 준서는 공문을 그녀의 손에 내밀었다.
“관심 있으면 해 보라고요. 부담 가질 필욘 없고.”
유정은 떨리는 손으로 준서가 내주는 공문을 받아들었다.
교사 동아리 지원 안이었다. 한 학기에 200만원을 지원할 계획이고, 계획서가 잘된 동아리를 서울시에서만 100개를 선정한다고 했다.
“지난 번에 말한 그 독서 동아리? 그거 생각이 나서요.”
준서는 유정을 바라보지 않은 채였다.
“어차피 할 거면, 지원 받으면서 하라고. 그 얘기 하려고 불렀습니다.”
유정은 가만히 준서의 옆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숙여 버렸다.
“죄송합니다.”
준서의 미간이 구겨졌다. 다시 애써 미간을 편 준서는 유정에게 시선을 향하고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뭐가 죄송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필요 없어요. 만약에 하고 싶지 않다면 그냥 거절하면 됩니다. 두고 가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유정의 시선이 준서의 시선에 박혔다.
“아침에......”
유정은 시선을 황급히 내렸다.
“죄송해요, 오늘 직원회의인 줄도 잊고, 어떤 기분인지도 모르고 제가, 기분 상하게 해드린 거 같아서......”
다시 고개를 들어 본 곳에, 준서는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유정을 보고 있었다.
“서유정 선생님.”
지옥에서 온 사자의 목소리가 이럴까. 유정은 그 목소리만으로도 목이 졸리는 느낌을 받았다.
“저는 서유정 선생님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했고......”
준서는 시선을 돌리고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주 깊은 감정을 참아내듯이.
“그것은 제가 가지고 갈 감정은 감당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건 서유정 선생님이 아무리 사과를 한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고요. 그러니, 서유정 선생님도 그런 저를 존중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유정은 입을 다물었다. 꽉 쥔 주먹의 손바닥으로 손톱이 박히는 느낌이 생생했다.
“확실한 동의 없이 시작해버린 건 제 탓입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는 마시고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유정은 천천히 공문을 집어 들었다. 이제는 더 말을 할 여지는 없었다.
떨리는 걸음으로 문으로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았으나,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유정은 다시 몸을 돌렸다.
준서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공문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와락 종이가 구겨지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요.”
목소리가 사정 없이 떨리고 있었다. 다리도, 팔도, 떨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이 말은 해야 했다.
“교장 선생님도 자책하지 마세요. 잘못한 거 없으니까요. 제 탓이니까, 저를 질책하고 원망하세요.”
준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서.”
그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유정 씨를 원망하면, 제 마음이 나아집니까?”
투명한 시선이 교차했다.
“아니면, 그렇게 하면 다시 나한테로 돌아올 생각인가요?”
“죄송합니다.”
유정은 고개를 숙였다.
준서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유정 앞에서, 준서는 걸음을 멈췄다.
어제까지만 해도 웃으면서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머리를 기댔던 몸, 엄마처럼 꾸짖기도 하고, 걱정 섞인 눈으로 바라보아 주었던 여자 앞에.
준서의 숨결과 향기가 유정의 코 끝에 닿았다. 유정의 코가 찡해지며 눈 앞이 흐려졌다.
어느 순간 몸이 답답해졌다.
가슴뼈가 조일 정도로 단단하게 결박된 몸이었다. 정수리에 턱을 올리고, 준서는 그렇게 유정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이 그녀를 두 팔 안에 가두었다.
“뭐가 그렇게 죄송해.”
유정의 몸이 버르적거렸으나, 준서는 어느 것도 용납하지 않는 듯이 힘 있게 그녀의 몸을 끌어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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