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이건 꼭 드세요2017.07.15.
“죄송합니다만, 식사는 괜찮습니다.”
막 토스트를 굽고 있는 미혜의 귀에, 준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본 준서의 안색이 어제보다 파리해 보였다. 밤 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
“어디 아프세요?”
“아뇨, 괜찮습니다.”
준서는 대답하고 옷방으로 걸어갔다.
미혜의 미간이 좁아졌다.
어제, 생일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복귀했을 때, 집에 돌아온 준서는 기력은 없어 보였지만 기분은 매우 좋아 보였다.
게다가 미리 준비했다며 미혜의 생일 선물까지 내밀었었다.
“뭐가 좋을지 몰라서, 여성용 기초화장품 샀습니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부드러운 미소까지 지으며 선물을 내미는 통에, 미혜는 공연히 설레기까지 했었다. 워낙 잘생긴 얼굴인데다, 표정까지 부드럽게 하니 평소의 냉정할 때에는 없었던 봄기운까지 느껴졌던 것이었다.
“남의 집에서 까다로운 사람 비위 맞추기 쉽지 않죠. 고생하셨습니다.”
안하던 공치사까지 하는 바람에 미혜는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찬바람이 쌩쌩 분다. 이전보다 더 심해진 모양으로.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니까.
미혜는 굽던 토스트를 입 안에 구겨 넣었다. 어차피 한 번 구운 것을 다시 굽지는 못하니 구운 것은 지금 처리하는 것이 나았다.
그래도 준서가 보는데서 먹는 것은 좀 그럴 것 같아서 급하게 우유를 들어 마시다가 사레가 들렸다.
켁켁 기침을 하는데, 인기척이 났다.
들켰네.
미혜는 민망한 얼굴을 들었다. 이런 것 가지고 뭐라고 할 사람은 아니었으나, 오히려 뭐라고 하는 것이 낫다고 느낄 정도로 그가 풍기는 서늘한 분위기는 무서웠다.
“케케켁!”
그러나 준서를 보는 순간, 미혜는 더 심하게 기침을 하며 몸을 꺾었다.
“괜찮으세요?”
지나가던 준서가 발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든 미혜는 손가락으로 준서의 다리를 가리켰다.
“바지, 바지......”
“네?”
밑을 내려다 본 준서는 미간을 찌뿌렸다. 분명 갈아 입은 줄 알았는데 잘 때 입었던 파자마 차림이었다.
그의 입에서 처음 듣는 욕설이 작게 내뱉어졌다.
평소 안하던 실수에 욕이라, 미혜는 자신의 눈과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단정하고 철저한 사람이라, 평생 저런 실수는 안할 줄 알았는데.
진짜 어디가 아픈 걸까.
미혜는 멍한 기분으로 도로 옷방으로 들어가는 준서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너무 일찍 왔는지 교무실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을까.
유정은 가만히 시계를 보다가 의자에 주저 앉았다.
차마, 퍼렇게 얼굴이 멍든 수정을 두고 그녀의 약혼자와 좋다고 연애를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연애를 해도 상관 없다고 했지만 그것은 아닐 말이었다.
준서가 수정과 파혼을 하는 것은 유정이 상관할 일이 아니긴 했으나, 적어도 그 원인이 자신은 아니었으면 했다.
옳은 선택을 하면 된 거야,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정리가 되겠지.
불과 며칠이니까.
깊은 한숨을 내쉬며 노트북을 켜는데, 기척이 느껴졌다.
설마.
유정은 차마 돌아보지 못하고 침만 꿀꺽 삼켰다.
그 역시, 통화 이후에 마음이 복잡했겠지. 나처럼 밥도 먹지 못하고 바로 출근을 했을 거야.
그와의 첫 만남, 그리고 갑자기 커피를 주고 돌아갔던 날이 떠오르면서 유정의 어깨는 잔뜩 경직되었다.
“유정 쌤.”
그러나 뒤에서 들리는 것은 여자 목소리였다. 긴장이 풀려 어깨를 내리고 유정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괜찮아?”
수연이었다. 문득, 어제의 어색했던 하루가 떠올랐다.
“네, 뭐......”
“얘기 좀 할까?”
수연도 마음 고생을 했는지 눈 밑이 평소보다 검었다. 유정은 그러나 그것까지 고려할 정신이 없었다.
수연이 이끄는 대로, 교무실에서 나와서 비어 있는 상담실로 들어갔다. 수연은 창을 열고 먼지를 내보냈다. 빛에 비친 먼지 가루를 유정은 눈이 부신 듯이 보고 있었다.
“미안해.”
자리에 앉자 마자, 수연은 고해 성사라도 하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부장 선생님이, 전화하셨어. 유정 쌤이랑 아는 척도 하지 말라고.”
짐작했던 말이 튀어 나왔다. 유정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지금 이렇게 마음이 짓눌리는 것보다는.
“괜찮아? 어제 학부모한테 맞았다는 얘기 듣고 너무 놀라서, 얘기하고 싶었는데 자꾸 엇갈려서 기회도 없고......”
고개를 든 수연의 얼굴이 떨리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맞은 게 아니라 사이 좋게 주고 받은 거예요.”
“뭐?”
자초지종을 들은 수연의 입이 벌어졌다.
“유정 쌤, 보기하고는 다르네. 그래서, 해결은 됐고?”
“교장 선생님하고 얘기 나눴고...... 그 쪽에서도 그냥 넘어가길 바란다고 해서 그렇게 잘 마무리 될 거 같아요.”
“하긴 교장 선생님이 어련히 잘하셨을까봐.”
수연이 눈을 반짝 빛냈다. 아직도 마음이 있는 걸까. 유정의 눈이 쓸쓸히 웃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학기초라 저도 바빠서 정신 없어요. 학급일도 복잡하고. 저는 정말 괜찮으니까 언니 편할 때 편하게 말 걸어 주세요.”
유정은 그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아니, 뭐 치사하게 그래. 편할 때 말을 걸라니. 몰라, 나도. 정인기가 뭐라고 하건. 왜 사사건건 참견이야.”
수연은 투덜거리며 마주 일어섰다.
“커피나 한 잔 하자.”
수연이 이끄는 대로 학교 앞으로 나와 커피전문점에서 아메리카노 두 잔을 샀다. 막 들고 나가려다가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유정의 걸음이 멈췄다.
“아, 교장 선생님, 안녕하세요. 커피 사러 오셨나봐요.”
수연이 반갑게 웃으며 인사하자, 준서도 마주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아무 일도 없는 듯,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준서의 눈이 자연스럽게 뒤에 선 유정을 향했고, 당황한 유정이 손에 든 커피를 자기도 모르게 기울였다.
“어머, 유정 쌤!”
교무실에 있다가 바로 나오는 길이라 교무실에서 신는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채였다. 발로 쏟아지는 커피를 보고 수연이 놀라 소리쳤고, 준서가 수연을 밀치고 다가가 유정의 손에서 커피를 빼앗았다.
“뭐하는 겁니까?”
화난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그는 비치된 냅킨을 뽑아 주저 앉더니, 유정의 발을 닦았다.
수연도 유정도,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가서 찬물로 씻어내고 화상 연고 바르세요.”
몸을 일으킨 준서는 그렇게 말하고 커피전문점을 나가 버렸다. 유정은 약간 욱씬거리는 발을 꼬물거리며 준서가 나간 곳을 멍한 눈으로 보았다.
“노, 놀라셨나봐, 교장 선생님이.”
수연이 유정의 팔을 붙들었다. 그제서야 유정은 꿈에서 깨어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가 보네요.”
“그런데 꼭 연인한테 하듯이......”
수연이 뒷말을 잇지 못하고 삼키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나가죠.”
유정은 더 말할 기운도 없어 그렇게 말하고 막 나가려다가 손에 커피가 없는 것을 깨달았다.
준서가 가지고 가 버린 것이었다.
“아, 내 커피......”
“그러게. 그냥 들고 가셨네? 하나 더 사줄까?”
“아니, 아니예요, 그냥 가요.”
한 모금 밖에 안 마신 거였는데. 투덜거리며 문을 열고 나온 유정은 다시 한 번 놀라 넘어질 뻔했다.
“실내용 슬리퍼 신고 외출하지 마세요.”
커피를 유정의 손에 넘겨주며, 준서는 기어이 한 소리를 더했다. 유정은 고개를 숙였고, 옆에 있던 수연이 나섰다.
“죄송합니다. 제가 막 나오자고 하는 바람에.”
“저도 죄송합니다. 아침부터 안 좋은 소리 해서.”
준서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빠르게 걸어갔다.
“유정 쌤......”
준서와 유정을 번갈아 보며 수연은 말꼬리를 길게 끌었다. 고개를 든 유정이 난감함에 미간을 모았다.
“네?”
“아니, 아니다. 가자.”
“저, 언니.”
이번에는 막 가려는 수연의 손을 유정이 잡았다.
“왜?”
“저,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부탁?”
수연의 눈썹이 올라갔다.
준서는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의자에 앉았다.
아침에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나와서, 커피 한 잔 하려고 했는데.
뜨거운 커피가 그 작고 예쁜 발에 부어지는 순간 아무 정신이 없었다. 그것이 자신의 시선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전화 받았을 때는 엄청나게 쿨한 척하더니, 하준서 너도 참 모자란 인간이구나.
쓸쓸히 웃고 컴퓨터를 켜는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세요.”
준서는 문을 향해 말했다.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그 문 사이로 커피가 내밀어졌다.
설마.
의자가 넘어갈 정도로 세찬 동작으로 일어섰다. 그러고 나니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준서는 문이 다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열린 문 너머로 드러난 사람은 유정이 아니었다.
“저, 아까 저희 때문에 못 드신 것 같아서.”
수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커피를 들고 준서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어렸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사는 김에 하나 더 산 거예요.”
커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편의점표이긴 하지만 비닐에 싸인 샌드위치도 있었다.
준서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주신 거라 어쩔 수 없겠습니다만 다신 이러지 마세요. 부담스럽습니다.”
수연은 준서를 보고 뭔가를 말할 듯이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러나 곧 입술을 닫고 눈으로 웃어 보였다.
“네, 이건 꼭 드세요.”
준서는 묻지 않아도 누가 부탁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커피전문점에서는 팔지도 않는 샌드위치를 따로 사서 전한 것만 봐도.
준서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끝낸다고 하고선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따져야 하는데, 이런 선의에 또 마음이 흔들리는 걸 보면 내가 모자란 놈은 맞나 보다.
“화상 치료 꼭 받으라고 전해주십시오.”
문으로 걸어가는 수연에게, 준서는 고민하던 말을 뱉었다.
수연은 고개를 돌려 준서를 보았다.
이미 누구 심부름인지 알고 있구나.
두 사람, 진짜 뭐하는 걸까. 밀당 중인 거야, 아니면 뭐가 있긴 한 거야.
“네, 꼭 전해드릴게요.”
수연은 그렇게 대답하고 문을 닫고 나갔다.
준서는 천천히 샌드위치를 제 앞으로 가져왔다. 그녀가 싼 것은 아니겠지만, 그녀가 눈으로 고르고 손으로 집어 넘겨준 것이겠지.
비닐을 여니 고소한 빵냄새가 났다.
한 입을 베어 무니 고소함과 달콤함이 섞여서 그의 혀를 감고 돌았다.
마치 그녀와 나눈 키스처럼.
“유정 씨.”
그는 나직하게 말하고 묵묵히 샌드위치를 보았다. 눈 밑이 따끔거렸다.
욕심이었나.
이제 시작하는 때인데. 여러 가지로 바쁘고 의욕에 충만할 때인데.
내가 너무 큰 부담을 주었나. 좋아하는 마음만 앞서서 일을 그르쳐 버렸나.
그렇더라도.
너무 아팠다.
단지 며칠이었는데.
마음에 품은 건 꽤 되었지만, 마음을 확인하고 몸을 품은 것은 불과 며칠 전이었는데.
그녀와 그의 집을 오갔던 꿈 같은 시간들이, 그 따스함들이 공기처럼 퍼져 있다가 유리 조각이 되어 그의 온 몸을 찌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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