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서유정 선생님 뜻을 존중합니다2017.07.13.
수정은 그 날 결국 유원을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유정과 준서의 모습을 보는 순간 다른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었다. 집에 다다라서야, 그녀는 자신이 이제껏 저지른 것보다 훨씬 큰 잘못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날 저녁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밥을 주지 않았던 것 외에는.
수정의 어머니 하영은, 태연한 얼굴로 아버지 정호에게 말했다.
“수정이는 먹고 온다고 했어요. 얼른 들어가서 씻어라. 과일 깎아줄게.”
수정은 상 위에서도 아직 끓고 있는 구수한 된장 찌개 냄새를 맡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하영은 과일을 깎아주지 않았다.
다음 날, 정호가 출근하자마자 수정의 뺨은 불이 붙었다.
“멋대로 나가, 니가, 내 명을 거역하고 니가!”
수정은 아이처럼 떨었다. 무차별적으로 떨어지는 매질을 충분히 피할 수 있었으나 피하지 못했다.
피하면 더 크고 무거운 징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 두려웠다. 그것이 허상인 것을 알면서도,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계속 되어 왔던 체벌은, 그녀가 자라서도 그녀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하영이 포악해질 때, 수정은 아이처럼 떠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
어두운 곳에 갇혀서 종일 굶었다. 다행히 저녁 때에, 하영은 정호와 함께 하는 모임이 있어 외출을 했다.
유정의 전화를 받고 무슨 일인지 대강 예감을 했다. 수정은 가장 큰 썬글라스를 찾아 꼈으나 그것으로 다 얼굴이 가려지지는 않았다.
차라리 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
수정은 뺨에 번진 보라색 반점을 확인하고 그대로 집을 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넘어지지는 않았다. 아니 넘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어서서 한 번이라도 걸어야 하지 않나. 이 불행한 생에 단 한 번이라도 빛이 들 수 있다면.
유정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두서 없었다.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준서와 자신이 이미 깊은 사이가 되어 버렸고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이 앞뒤 없이 흘러나왔다.
처음부터 속일 마음이 없었다는 말은 변명 같이 말꼬리마다 붙었다.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수정이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자신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나를 원망해도 좋아, 아니, 절교해도 나는 할 말이 없어, 미안하다는 말 밖에는......”
그 손을 나는 놓을 수가 없다고.
내내 긴장했던 표정이 풀릴 때, 어울리지 않는 장난을 치고 등을 맞으면서도 좋다고 웃을 때.
그가 품고 있는 꿈과 그의 어깨에 얹어있는 죽은 친구의 무게, 고집스러웠던 삶과 이루어나가고자 하는 미래까지 알알이 박혀서 나에게는 깊은 상흔이 되어 버려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유정은 눈을 감았고 그래서 수정이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무엇이 닿는 소리에 눈을 뜬 유정은, 앞에 벌어진 상황을 보고 경악했다.
“너, 뭐하는 거야?”
수정은 고개를 숙인 채 유정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수정아!”
유정은 얼른 의자에서 내려왔다. 설마 정신 착란이 온 걸까. 내가 새어머니라고 착각이라도 하는 걸까.
얼른 부축해서 도로 의자에 앉히려고 하는 것을 수정이 뿌리쳤다.
“부탁 좀 할게.”
수정은 다시 똑바로 무릎을 꿇은 채로 말했다.
“나, 준서 씨랑 결혼 안하면, 죽을 지도 몰라......”
다시 그녀의 어깨를 흔들고 부축해서 일으키려는 유정의 귀에 수정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집에서 맺어준 거잖아. 그런데 파혼을 하면...... 그걸 누구 책임으로 몰겠어. 안 그래도 호시탐탐 내가 잘못한 것만 찾는 여자인데......”
유정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연애는 마음대로 해. 하지만 결혼은...... 안돼. 준서 씨 아니면 내가 그 집에서 탈출할 방법이 없어. 결혼하고 나서 어차피 유학 갈 거야. 떠나서 아무에게도 연락 안 되게 숨어 살 거야. 그 때까지만 기다려 줘. 부탁할게.”
유정의 몸이 수정의 몸을 덮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걸까. 안 그래도 상처 투성이인 친구에게.
“미안해, 네가 부탁할 거 아니야. 이렇게 무릎 꿇을 것도 아니야.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
유정이 수정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그러나 수정은 굳은 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집에 갔는지, 내일의 할 것을 준비하고 잠이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눈에 햇살이 화살처럼 꽃히는 것을 느끼며 눈을 뜨니 빌어먹을 내일이었다.
눈 위에 손을 덮고 가만히 있는데 휴대폰이 울었다. 알람이 아니었다. 휴대폰에 뜬 이름을 보고 유정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제 나는 이 사람에게 뭐라고 해야 하나.
“여보세요.”
“유정 씨.”
목소리가 밝았다. 몸이 한결 나아진 건가.
“어제 주사 맞고 수액 맞은 게 효과가 있나 봅니다. 오늘 가뿐하게 일어났어요. 고맙다는 이야기 하려고 전화했습니다. 너무 이른 시간인가요?”
속사포처럼 상대의 말이 쏟아졌다. 유정은 그가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억지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요.”
“유정 씨 덕분입니다. 저 억지로라도 병원에 끌고 가 주셔서요. 아직 집이죠?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아니, 아니요.”
유정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일어나 앉았다.
“아, 안됩니까?”
실망한 목소리가 들렸다. 유정은 한 손으로 머리를 긁었다.
“자주 잊으시는 거 같은데, 우리 막 이래도 되는 사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좀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또 그 말씀이시네. 그건 제가 정리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안 그래도 오늘 수정 씨 만나서 얘기하려고......”
“안돼요!”
유정은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쳤다. 휴대폰을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러지 마세요. 저, 아닌 거 같아요. 준서 씨, 아니 교장 선생님, 이런 사이 아닌 것 같고, 솔직히 같은 직장에서 이러는 거 너무 불편하고요. 지금은 그냥 학교 일에 집중하고 싶어요.”
숨이 가빠왔다. 으득 깨물리는 아랫 입술에서 피맛이 났다.
상대방에게서는 잠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저, 교장 선생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한층 낮아진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라기보다는, 제 마음이 그래요. 학교 일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아요.”
준서가 눈 앞에 있었으면 금방 들켰을 지도 모르겠다. 창백한 얼굴로 입술까지 벌벌 떨면서 하는 말이라니.
차라리 전화라서 다행인 걸까.
“알겠습니다.”
수초간의 침묵 후에, 대답이 들렸다.
유정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왼쪽 가슴을 가볍게 눌렸다.
눌린 곳이 아파 왔다. 욱씬거리는 느낌이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유정 씨를, 아니 서유정 선생님을 방해했군요.”
“아니예요, 그게 아니라......”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서유정 선생님의 뜻을 존중합니다.”
눈가가 젖어 왔다. 유정은 손등으로 눈을 꾹꾹 눌렀다. 입으로 터져 나오는 한숨을 억지로 삼키고 눈을 허공으로 향했다.
“학교는 나오실 거죠?”
아까보다는 조금 가벼워진 목소리였다. 유정은 침을 꿀꺽 삼키고 답했다.
“네, 물론이죠.”
“저는 같이 출근해도 괜찮습니다.”
“아니예요.”
“그래요, 그럼. 학교에서 봅시다.”
두 번 묻지 않고 전화가 끊겼다.
유정은 갑자기 주위가 고요해진 것을 느끼며 휴대폰을 보았다.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조금 전의 세상과 지금이 완전히 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는 이제 다시는, 유정에게만 보이는 웃음을 짓지 않을 것이다. 어리광을 부리듯이 안아달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의 머리를 부비며, ‘나의 다람쥐’라고 불러주지도 않을 것이다. 입술을 뾰족하게 만들어 그녀의 입에 쪽 소리가 나게 붙였다가 떼지도 않을 것이다.
겨우 며칠이었지만.
깊이도 들어왔었구나.
유정은 가슴을 부여 잡고 몸을 숙였다. 참았던 눈물이 눈가를 적시고 이불로 흘러내렸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입술을 깨물고 유정은 묵묵히 이불만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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