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그것이 사랑이었군요2017.07.12.
도착한 곳은 개인 병원 치고는 꽤 커서 건물 하나를 통째로 갖고 있는 병원이었다.
내과 수납처로 가서 증상을 이야기했다. 간호사는 유정을 보고 눈을 빛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아, 네.”
“남자 친구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유정은 당황해서 눈만 크게 떴다. 준서는 정정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하준서입니다.”
생년월일을 말하는 준서의 옆얼굴을 유정이 말없이 보았다.
“2번 방 앞에서 대기하세요.”
“아, 저......”
이미 말할 기회는 지나고 말았다. 준서와 유정 곁으로 다른 환자가 왔고 준서는 벌써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남자 친구 아니......”
생각해보니 이 병원은 유정의 가족들도 자주 오는 곳이었다. 내과, 정형외과, 가정의학과가 있는 이 병원은 개인 병원 치고는 입원실도 넉넉한데다 치료도 성심껏 하는 편이라 아는 사람 사이에서는 인기가 좋았다.
한동안 가족들이 안 아프기를 빌어야 하나.
다른 환자가 접수를 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유정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나중에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겠지 생각하면서.
“아니 왜......”
왜 아니라고 안했냐는 말을 유정은 다시 삼켰다. 뻔히 자기 좋다고 하는 남자에게, 거기에 대고 아니라고 말하라고 하는 것도 너무한 것 같아서였다.
입술만 으득 씹으며 옆에 앉는 유정을 준서는 말없이 지켜 보았다.
“여기 가족들도 자주 오는 병원입니까?”
준서의 말에 유정은 잔뜩 헝클어졌던 마음을 들켜 화득 놀란 표정으로 준서를 마주 보았다.
“지금이라도 정정할까요?”
“아,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유정이 두 손을 내젓자 준서의 눈이 웃었다.
“순간 순간 표정이 바뀌어요.”
“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인단 말입니다.”
유정은 준서의 눈을 피했다. 준서는 말없이 유정의 손을 쥐었다.
진료실의 문이 열리고 준서의 이름이 불렸다. 준서가 손을 쥔 채 일어서는 바람에 유정도 덩달아 일어섰다.
“들어 가시게요, 같이?”
준서가 웃으며 손을 놓았고 멋쩍어진 유정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런 유정의 머리에 준서가 살짝 손을 얹었다가 내려 놓고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진료실에서 나온 준서가 그 옆에 있는 주사실로 들어갔다. 유정은 공연히 웃음이 나와서 입술을 깨물었다.
주사실에서 준서가 어기적 걸어나오다가 유정을 보고는 부끄러운 듯이 눈을 옆으로 돌렸다.
“의사 선생님께도 혼났네요. 열 나는데 계속 방치했다고. 유정 씨가 좋다는 그 수액 맞고 가래요.”
주사가 꽤 아팠던 듯이 인상을 살짝 찡그린 준서가 천천히 유정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입원은요?”
“그 정도는 아니랍니다. 여하간 수액 맞고 한 두 시간 쉬고 가라는데, 유정 씨는 지금 가시는 게......”
유정은 대답 없이 미간을 모았다.
“저 수액 맞으면서 그냥 잘 겁니다. 유정 씨는 할 게 없는데.”
“어차피 저도 할 거 없어요. 저도 옆에서 잘게요.”
“같은 침대에서요?”
유정의 주먹이 준서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준서는 웃으며 유정의 주먹을 감싸 잡았다.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괜찮아지는 거 보고 갈 거예요.”
“내일도 출근인데, 피곤합니다.”
정색을 한 준서가 말해도 유정은 꿋꿋하게 고개를 저었다. 준서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신 아프면 안 되겠네요.”
“그럼요. 병 키우지 말아요.”
“알겠습니다. 약속할게요.”
새끼 손가락을 건 준서가 엄지 손가락으로 도장을 찍으려 하자 유정은 손을 재빨리 빼내고는 준서의 등을 밀었다.
“얼른 수액 맞으러 가요.”
입원실의 가장 안쪽 침대에 시키는 대로 누운 준서는, 간호사에게 팔을 내밀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강단 있던 사람이 제 살에 파고 드는 주사 바늘을 무서워하는 모양이 우스워서 유정은 피식 웃었다.
수액을 연결한 후 간호사가 나가자, 유정은 손수건으로 준서의 이마에 그 새 솟은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한숨 푹 자요. 그러면 싹 나아 있을 거예요.”
“지금이라도 집에 가요.”
준서가 어두워오는 하늘을 보고는 걱정 어린 눈으로 유정을 돌아 보았다.
“집에 가야 할 것도 없다니까요.”
“내일 수업 준비 해야죠. 주말에 내내 못했으면서.”
“알아서 해요. 수업 잘 못하면 누구한테 엄청 혼날텐데요, 뭐.”
유정이 입을 비죽이며 말하고는 준서의 손을 쥐었다.
“이렇게 안하면 불안해 하면서. 잡아줄 테니까 푹 자요.”
준서는 유정의 손을 내려다 보고는 다시 유정의 얼굴을 보았다.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랬던 것 같네요, 내가.”
불안은 그의 안에 없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늘 불안하게 살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상한 것은 유정의 손을 잡고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면 그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신기할 정도로 불안이 가라앉고 마음이 평온해졌다.
이 손에 무슨 마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얼른 눈 감아요.”
“잠깐, 얘기해 준다고 했잖아요.”
준서의 눈이 수업을 듣는 학생처럼 초롱 초롱 해졌다.
“오늘 학생들하고 얘기는 잘 했어요?”
“아휴, 교장 선생님. 다음에 꼭 이야기 해드릴 테니까 얼른 주무세요.”
유정이 말해도 준서는 눈에 힘을 준 채 유정을 보고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유정의 얼굴이 뚫어질 정도로.
“그럼 얘기해 줄 테니까, 졸리면 언제든 눈 감는 거예요.”
유정은 약속을 받아낸 후에 학생들과의 토론부터 시작해서 종훈과 이야기를 나눈 것까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준서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집중했다.
“학생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알았어요. 교육에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건 아니구나. 체벌을 비롯한, 위협하면서 강압적으로 관계 맺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영향을 줄 수 없는 학생들이 존재하더라고요. 종훈이 같은 학생이요. 원리 원칙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새로 깨달았어요.”
종훈을 위협했을 때, 그는 바로 숙였고 그렇게 관계가 시작되었다. 덕분에 종훈의 숨겨진 마음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아픈 데도 계속 이야기 듣겠다고 고집 부리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위협을 해도 안 통하고.”
유정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준서를 보자, 준서는 픽 웃었다.
“어떻게 하긴, 사랑해 주면 되죠.”
“네?”
“그 마음이면 된다고요. 교육이라는 건 결국은 사랑이니까.”
마음 속에 불이 켜진 것 같았다. 유정은 준서와 꼭 잡은 손을 보았고, 준서가 그 손을 들어 입을 맞췄다.
“잘 해낼 줄 알았습니다. 서유정 선생님은, 그 마음 만으로도 좋은 선생님이니까.”
유정은 공연히 뜨거워진 얼굴을 숙였다.
“얼른 자요.”
유정은 잡지 않은 손으로 준서의 눈꺼풀을 덮어 주었다. 준서는 그제서야 착한 아이처럼 눈을 감았다.
곧 준서의 숨소리가 평안해졌다. 그러나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유정은 잡히지 않은 손으로 준서의 이마를 가볍게 쓰다듬다가, 그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당신이 내게 준 게 이제야 보이는 군요.
시간을 내어 주는 것,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내게 용기를 주고 주저 앉은 나를 일으켜 준 것, 나의 성공에 함께 기뻐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은 것.
사랑이었군요.
당신이 내게 준 그것을 나는 아주 조금 베풀었을 뿐인데,
그것이 사랑이었군요. 우리의 힘이었군요.
유정은 수정의 뺨에 어린 짙은 보랏빛 자국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썬글라스 너머의 얼굴은 얼마나 참혹한 지경이 되어 있을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괜찮아?”
많이 피곤했다. 준서가 수액을 다 맞고 나서 바로 콜택시를 불러 집에 돌려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 수정에게 연락을 했고, 수정은 잠깐이면 괜찮다고 했다.
준서가 수정에게 연락을 하기 전에, 그녀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얼마 전에 보았을 때에도 이런 정도는 아니었는데.
“괜찮아. 급하게 나오느라 화장도 못했어.”
“아니, 화장이 문제가 아니라......”
“알잖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식사 자린데 내가 참석을 안했어. 흥분하셔서 그래. 다친 곳은 많이 없어.”
수정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유정은 입을 막았다. 그런 그녀를 두고 나는 준서와 내내 같이 있었다. 물론 준서가 아픈 것도 이유였지만 그 사실이 죄책감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갑자기 보자고 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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