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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45화 (45/102)

45. 그렇게 절 생각해 주시는 게 저는 좋군요.2017.07.11.

“쌤도 똑같으니까요, 아빠랑......”

종훈의 입에서 드디어 토해진 진심에, 유정은 전율했다.

“싫었겠구나.”

“네, 재수 없었어요.”

유정은 픽 웃었다. 종훈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앞으로는 그러면 나에게 직접 와서 이야기 해. 이런 거 아버지 생각나서 싫다고. 화내고 말 안 듣고 욕한다고 해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전달되지는 않아.”

아마 태어나서 한 번도 누군가와 진심 어린 대화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전하는 것도 관계를 개선하는 것도 하지 못했다.

종훈은 뭐가 불만인지 대답도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한다고 내가 여태까지의 네 행동을 그냥 봐주는 건 아니야.”

종훈의 고개가 들렸다. 유정의 미간이 찌뿌려졌다 펴졌다.

“학생부까지는 넘기지 않겠지만 지금까지 네 행동에 대해서 징계가 필요하다고. 잘못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질 나이니까.”

“뭐요? 맞아요?”

종훈은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으나, 유정은 그가 예전의 그와는 전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졌다. 종훈으로서는 처음 하는 경험일 지도 몰랐다.

“그건 내가 싫은데. 넌 가만히 있고 나만 움직여야 하잖아. 그래서 힘들어.”

종훈이 피식 웃었다.

“이제 보니까 쌤 엄청 특이하네요.”

“내가 뭐? 난 지극히 평범한데?”

유정이 발끈해서 말했으나 종훈은 전혀 믿지 않는다는 듯이 웃었다. 그런 종훈을 노려보던 유정이 다시 표정을 굳혔다.

“내가 주는 징계는, 자서전 쓰기야.”

“네?”

“네가 태어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글로 적어와. 분량도 정해져 있으니까 한 두 줄 쓰고 말면 안되고. 그리고 한 번에 통과할 거라는 생각도 하지 마. 제대로 쓸 때까지 다시 쓸 거니까 처음부터 힘빼지 말고 제대로 써.”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가, 자서전 쓰기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 좋을 것 같았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반항적인 마음도, 하나 하나 표현하다 보면 정리가 될 것이었다.

“그게 뭐예요, 자서전 쓰기라니, 그냥 때려요!”

“싫다고. 니가 힘들어야지 왜 내가 힘드냐? 양식은 내일 줄 테니까 일단 오늘은 들어가서 쉬어.”

종훈은 무언가 이야기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서전 쓰기라니, 최악이었다. 글을 쓰는 건 정말 못하는데. 더군다나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자서전 쓰기라니.

“그리고.”

“그리고 또 뭐요!”

자서전 쓰기도 막막한데 또 뭘 시키려는 건가. 종훈은 질린 얼굴로 유정을 보았다.

“성헌이 말이야. 성헌이는 자기 잘못 인정하고 징계 받겠다고 하는데. 네 의사가 어떤지가 중요할 것 같아서. 널 때린 거니까.”

종훈은 생각지도 않았던 이야기를 듣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당시에는 기분이 나빴지만 덕분에 결론적으로는 유정에게라도 마음을 이야기하게 되어서 시원했다.

“걔도 그럼 자서전 쓰기 시켜요.”

그러나 종훈의 마음 안에 있는 악마가 그를 자극했다. 유정의 미간이 찌뿌려졌다.

“성헌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제 의견은 그렇다고요.”

“너만 죽을 수 없다는 거지?”

종훈은 대답 없이 웃었다. 이제보니 아주 장난꾸러기네. 꼭 누구 같이. 종훈을 노려보던 유정은 이제 시시때때로 생각나는 인물에 질려서 얼른 눈을 다른 데로 돌렸다.

생각해보니 성헌과도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했다. 겉으로는 서글서글하고 사람 좋은 척을 하지만, 작년 일을 잠깐 들어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좋아.”

유정은 그렇게 대답하고 종훈을 마주 보았다. 종훈과 같은 벌을 주기에는 성헌이 억울하니까, 훨씬 적은 분량을 쓰도록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럼 이 폭력 사태는 없었던 걸로 하는 거다.”

“콜!”

“건방지게.”

유정이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정은 깊은 숨을 내쉬며 상담실을 걸어 나왔다. 잔뜩 긴장했던 어깨가 풀리며 아파 왔다. 종훈과는 웃으며 끝냈지만 내내 긴장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교무실로 돌아가려던 유정은 슬그머니 발걸음을 돌렸다. 냉랭한 그 곳에 가기 전에,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잔뜩 긴장하고 힘들었던 것을 위로 받고 싶었다.

꼭 무언가 해낸 후에 부모님의 칭찬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유정은 들뜬 기분으로 교장실로 가는 걸음을 빨리 했다. 거의 넘어질 듯이 문 앞에 이르러 노크를 했으나 안에서의 반응은 없었다.

슬그머니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다.

혹시 휴게실에 간 걸까. 한 시간 쉬라고 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슬그머니 잡았던 문손잡이를 다시 놓았다. 그러다가 뿌리칠 수 없는 예감에 도로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교장실 안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그러나 유정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장 선생님!”

책상 위에 엎어져 있는 사람은 분명히 준서였다. 뺨 옆으로 핏자국이 번져 있었고, 그는 죽은 듯이 굳어 있었다.

“준서 씨!”

한 번도 부르지 않았던 호칭이 유정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어깨를 거세게 흔들자, 준서는 조금 신음 소리를 냈으나 몸을 일으키진 못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러니까 내가 쉬라고 그랬잖아요, 고개 좀 들어봐요, 준서 씨!”

“으음......”

준서가 고개를 들었다. 서류 위에 번져 있는 핏자국에 놀라더니 유정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가, 어떻게 하고 있었죠?”

“어떻게 하고 있긴...... 피는 뭐예요? 왜 이러고 있어요? 휴게실 가라고 했잖아요, 내가!”

“아, 미안합니다. 잠깐 어지러웠는데. 코피가 났나봐요. 이제 괜찮......”

말을 마치지 못해서 준서의 등에서 불이 났다. 그야말로 정신이 번쩍 나는 일격이었다.

“괜찮다는 말 그만 좀 해요! 준서 씨 때문에 내가 정말 속상해요! 당장 병원에 가요, 가서 치료 받아요, 안 받으면 진짜 화낼 거예요!”

이미 화는 내고 있는 것 같은데. 준서는 희미하게 웃으며 맞은 등을 쓰다듬었다. 호칭이며, 태도며, 오늘도 예쁘지 않은 데가 없네.

“알았어요, 병원 갈 테니까.”

“구급차 부를 거예요.”

“아니 무슨 요란하게 구급차를 부릅니까. 소문 다 날 일 있어요? 내 차로 갑시다.”

“이러고 무슨 운전을 한다고 그래요? 택시 타고 가요, 정 소문나는 거 싫으면.”

시키는 대로 안하면 한 대 더 맞을 것 같아서, 준서는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정은 콜택시를 불렀다.

쓰러져서 잠시 쉰 것이 도움이 된 모양인지, 준서는 아까보다는 한결 두통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그냥 이대로 집에 가서 쉬었으면 하는데, 토라진 유정을 보면 그러면 안될 것 같아 준서는 시키는 대로 택시에 몸을 실었다.

“아, 유정 씨도 갑니까?”

“교, 아니, 준서 씨만 보낼 수 없잖아요.”

유정은 쌀쌀맞게 대답하고는 기사에게 목적지를 이야기했다.

기사도 있는 앞에서 준서가 교장이라고 말하기가 조금 껄끄럽다고 생각해서였는데, 그 말을 들은 준서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들으면 들을 수록 좋네요.”

“뭐가요?”

“준서 씨라는 호칭.”

유정은 말없이 준서를 노려보았다.

“왜요, 좋아하는 것도 잘못입니까?”

“아니예요. 좀 쉬어요. 눈 감고 입도 다물고.”

“닥치라는 거군요.”

“진짜.”

준서는 얌전하게 입을 다물었다.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는데, 자꾸만 몸이 꼬물거렸다.

유정의 향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유정의 숨소리, 그녀가 몸을 움직이면서 생기는 작은 소음, 모두가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슬그머니 눈을 뜬 준서는 유정의 손을 슬쩍 잡았다. 그리고 얼른 다시 눈을 감았다.

“뭐, 뭐하는......”

“아, 이게 유정 씨 손이군요.”

“시치미 떼지 마세요.”

“시치미라뇨. 눈 감고 있는데 보일 리가 있습니까.”

풋. 웃음 소리가 났다. 준서도 더 참지 못하고 웃으면서 눈을 떴다.

유정은 잡은 손을 더 단단히 잡아 주었다.

“아프지 말아요, 다치지도 말고.”

“그거 어쩐지 익숙한 말인데.”

“왜요, 나는 하면 안되는 말이예요?”

“그럴리가요. 얼마든지 하셔도 됩니다.”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준서의 이마를 유정의 손이 짚었다.

“아이구, 하루 종일 이러고 버텼어. 진짜 혼나야 해.”

“아까 혼났지 않습니까. 어머니한테도 요즘은 그렇게 안 맞고 사는데.”

“몸 좀 챙겨요, 제발. 아까 심장 내려 앉는 줄 알았어요.”

유정이 웃음을 지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준서도 장난기를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까 많이 놀랐나 보군요.”

“그럼요. 피까지 흘리고...... 아휴, 내가 진짜.”

“그런데 이런 말하면 또 혼날 것 같은데.”

준서의 눈이 유정을 깊이 들여다 보았다. 진중한 눈빛에 유정도 덩달아 숨을 죽였다.

“그렇게 절 생각해 주시는 게 전 좋군요.”

말 끝에 준서의 입꼬리가 매력적으로 올라갔다. 유정의 미간이 모아졌다.

“뭐라고요?”

“이것 봐요, 또 혼내려고.”

준서가 하하 웃으면서 유정의 뺨을 손으로 쥐었다. 유정도 덩달아 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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