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쌤도 똑같으니까요2017.07.10.
“성헌이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 이야기도 들어봐요.”
종훈이는 없었지만, 우리끼리라도 하자는 이야기가 지배적이었다. 수업 시간에는 수동적인 학생들이 모처럼 보이는 적극적인 모습에, 유정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렇게 하자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선 그 날, 제가 한 경솔한 행동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허리까지 꾸벅 숙이는 성헌을 보며, 유정은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것을 참았다. 저 집안 교육이 아무래도 궁금하다니까. 보면 볼수록 준서가 떠오르는 행동이라니.
“저도 선생님이 종훈이를 대하는 것이 화가 났고, 그래서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그런 행동을 했어요. 만약 제가 그것에 대한 징계를 받아야 한다면 받겠습니다. 대신에, 종훈이도 이제까지 한 행동과 오늘 욕한 것까지 모두 징계 받았으면 좋겠어요. 저렇게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성헌의 말에 학생들도 동의했다. 성헌이까지 징계를 받는 것은 너무하다는 입장도 있었다. 충분히 유정에게 버릇 없게 굴었고, 성헌이 오히려 나서는 바람에 속이 시원했다는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학교 징계라고 해봤자 벌점이나 청소잖아요. 그런 거 아무 소용 없어요. 진짜 예전에 체벌 있을 때가 나았는데. 유정 쌤도 그냥 때려요. 저런 애는 방법이 없어요.”
한 학생의 말에 너도 나도 동조를 시작했다. 유정은 고개를 저으며 확산되는 분위기를 막았다.
“내 생각에는, 학교는 교육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고, 따라서 징계도 교육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체벌은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거잖아. 그건 폭력적이고 반인권적이야. 학생들을 존중하지 않는 징계 방법이고.”
유정의 말에 학생들은 더 열이 오른 듯이 반박했다.
“하지만 존중도 사람 가려 해야지 자꾸 그러면 사람 깔본다구요.”
“민종훈 같은 애는 좀 맞아야 정신을 차려요.”
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폭력에 길들여진 거야. 너희 스스로 충분히 잘할 수 있고, 체벌이 아니라도 분명히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있어.”
“하지만 맞아서 돌이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죠.”
유정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성헌이 말했다. 문득, 유정은 성헌이 작년에 어떤 징계도 받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력하고 무단 결석이라고 했었나.
유정은 애써 머릿 속에서 성헌에 대한 생각을 몰아냈다. 자세한 사정도 모르지 않나. 지금은 그저 반 학생일 뿐이었다. 그녀가 똑같이 존중해야 할.
잠시 유정이 생각에 빠진 사이, 학생들은 격렬하게 토론하기 시작했다. 유정의 입장에 동의하는 학생들도 점점 많아졌다. 처음에는 기에 눌려 가만히 있다가, 유정의 말에 힘을 얻은 것이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요, 제가 잘못한 건 알겠는데요, 진짜 허벅지를 거짓말 아니고 이만한 몽둥이로 열 대를 때리는데, 저 걸음도 제대로 못 걸었거든요. 그게 그렇게 맞아야 할 잘못인지도 모르겠고, 나중에는 서러워서 막 울었어요. 근데 잘못한 게 반성이 된다기 보다는 복수심만 생겨서, 졸업할 때까지 그 쌤 쌩깠어요.”
그들은 주로 체벌에 대한 안좋은 기억을 털어놓았다. 이에 맞서서, 체벌이 오히려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 학생들도 입을 열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제 짝한테 담배를 배웠거든요? 화장실에서 피다가 걸렸는데, 그 때 담임 쌤이 엄청 좋은 쌤이고 우리 이야기도 되게 잘 들어줬는데, 담배 핀 애들 다 회의실에 몰아넣고 엄청 혼내고 때렸어요. 근데 그게 하나도 원망스럽지 않고, 우리 생각해 준 거 같아서 고맙고 그리고 담배도 끊었어요.”
유정은 자기 생각은 내려 놓았다. 학생들이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감동적이었다. 그녀가 자라온 교실, 그리고 가르치러 들어간 교실에서 이렇게 학생들이 활발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던가.
토론은 수업종이 울릴 때까지 이어졌다.
결론은 나지 않았다. 결론이 날 수도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유정은 분명히 알 것 같았다. 폭력적이든 아니든, 학생들은 교사와의 친밀한 관계를 원했다. 제대로 관계만 형성이 된다면 그 이후에 어떻게 대하든 괜찮다는 학생들이 대다수였다.
유정은 그것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학생들의 입장은 알 수 있었다. 종훈도 처음부터 잘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었어야 했다. 그가 유정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그의 삶에 개입했어야 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교실을 걸어나오다가, 유정은 복도 구석에 서 있는 종훈을 보았다. 쭈그리고 앉은 채로, 그는 무력하게 바닥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민종훈.”
종훈이 고개를 들었다. 성가시다는 얼굴이었다.
“왜 안 가고 여기 있어?”
유정은 일부러 냉정하게 물었다. 종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려고 했어요!”
종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유정은 그런 종훈을 묵묵히 보다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따라와.”
종훈은 움직이지 않았다.
“진짜 마지막 기회야. 오늘 아니면 바로 징계 위원회 넘길 거야.”
유정의 발걸음이 빨라졌고, 종훈이 비틀거리며 그런 유정을 따라 걸었다.
상담실에 들어선 유정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긴장이 온 몸을 조이는 것 같았다.
뒤이어 들어선 종훈이 유정의 맞은편에 앉았다. 종훈의 눈빛은, 여럿이 있을 때의 그 반항적인 눈빛이 아니었다.
유정과 독대를 해서 그런지 반쯤은 주눅이 든 것도 같은 표정이었다.
유정은 잠시 묵묵히 종훈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종훈의 눈이 불안을 담고 유정을 보았다. 말 한 마디 안하고 끝내는 건가.
“뭐 마실래?”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선 유정은 그렇게 물었다. 종훈의 미간이 좁아졌다.
“네?”
“같이 얘기할 건데, 뭐라도 마시자고.”
“저......”
“그럼 그냥 내가 가져 올게. 기다려.”
유정은 상담실을 나갔다. 종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화가 난 것 같은데, 마실 것을 준비한다고 하고, 그렇지만 여전히 화난 듯하고.
원래 저렇게 종잡을 수 없는 이미지였나.
유정은 5분도 안되어 다시 들어왔다. 종훈의 앞에는 초코 음료가 놓여졌다. 유정은 캔커피를 들고 있었다.
“마셔.”
유정은 그렇게 말하고 캔커피를 따서 입에 조금 머금었다. 종훈도 초코 음료를 마셨다.
도대체 언제 혼낼 생각인가. 종훈은 점차 짜증이 났다.
“반에서는 계속 이상한 얘기만 하고. 그래서 오라고 했어. 이제 하고 싶은 말 해.”
그런데 유정은 또 혼낼 생각은 안하고 말을 하라고 한다. 종훈은 진심으로 짜증이 나고 말았다.
“자꾸 무슨 얘길 하라는 거예요? 아까 다 말 했잖아요!”
“그렇게 말하면 혼나고. 이게 마지막 기회야. 여기서도 제대로 얘기 안하면 그냥 전학 보낼 거야.”
“네?”
종훈의 우그러진 얼굴을 보면서도 유정은 여전히 냉정한 표정이었다.
“작년에 꽤 유명한 사건 일으켰던데. 다시 뒤집으면 너 전학 보내는 거 일도 아니야. 교장 선생님도 그러라고 하셨고. 알지?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 재단 이사장님 손자고, 지금 실세야. 만나본 적 있나?”
종훈의 몸이 부들 부들 떨렸다. 그녀의 말은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고보니 교장하고 짜고 처음부터 나를 이렇게 코너에 밀어넣으려고 했던 거야. 일부러 잘해주고, 그래서 사람 성질 북돋은 후에 위협해 버리는.
종훈은 쾅 소리가 나게 음료수를 책상 위에 내려 놓았다.
유정의 미간이 좁아졌다. 또 화를 내네. 도대체 이런 녀석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지. 잘해줘도 안되고 위협도 안되면, 결국은 체벌 밖에 답이 없는 걸까.
유정은, 물론 준서가 종훈을 따로 만난 적도 있고 전화도 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다만 그를 위협하기에 가장 적절한 사람이 준서여서 준서의 이야기를 꺼낸 것 뿐이었다.
준서가 종훈의 전학을 동의한 것도 물론 사실 무근이었다.
“죄송합니다.”
종훈은 갑자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유정의 얼굴은 우그러졌다.
대체 이 태도는 뭘까. 이야기를 해볼까 했더니 왜 또 밑도 끝도 없는 사과를 하는 걸까.
“이야기를 해 보라고. 불만 있었잖아, 욕하지 말고 제대로 얘기를 해 보라고!”
유정은 탁자를 탕탕 치면서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종훈이 움찔 몸을 떨고 유정을 바라 보았다.
이렇게 코너에 몰렸을 때, 그리고 아무리 해도 종훈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선택은 사과 뿐이었다. 적어도 그의 세계에서 사과는 자기가 잘못했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힘이 없을 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정은 그것이 아니라며 다그치고 있었다.
“뭘요?”
“왜 그렇게 나한테 함부로 굴었냐고. 방금 전까지도! 무슨 불만이 있는 건지 그냥 속시원하게 얘기를 해 보라고. 그렇게 사람 성질 긁지 말고.”
“죄송하다고 했잖아요!”
“사과 들으려는 게 아니잖아.”
“그럼 왜 불렀는데요, 잘못했으면 그냥 혼내요!”
종훈은 답답해져서 마주 언성을 높였다. 유정은 손으로 가슴을 치다가 고개를 젖혔다.
“그럼 불만이 아니더라도. 왜 그랬는지 이유나 들어보자.”
“이유 없어요.”
“아니 이유가 왜 없어? 몰라? 니가 왜 그랬는지 몰라?”
종훈은 유정을 바라본 채 가만히 있었다. 정말 모르나 보다. 유정은 우주인을 대하는 광막함을 느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감정대로 행동한 걸까. 그러면 이럴 땐 도대체 어떻게 훈육을 해야 하나.
“아버지한테 들었어. 너 어머니 새어머니라면서.”
내친 김이었다. 유정은 그냥 속시원히 속 이야기를 해 버렸다. 종훈의 눈이 커졌다.
“아빠가 그런 말까지 했어요?”
“그래서 잘 봐 달라더라.”
“그래서 그렇게 병신 같이......”
“뭐?”
“아니, 아니요. 그런데 아빠는 왜 그런 말까지 했어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유정은 옅은 한숨을 쉬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내가 그 마음까지야 모르겠지만, 아버진 너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거 같아. 무조건 오냐 오냐하고 받아줘야 하는. 그런데 작년에 담임 선생님이 그러지 않았나 보지. 그래서 나한테 널 잘 대해 달라고 부탁하신 게 아니었을까.”
“아빠나 잘하지......”
유정이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뱉으며, 종훈이 고개를 창 쪽으로 했다.
“아빠한테 불만이 많아?”
“애처럼 우쭈쭈하는 거 재수 없어요.”
유정은 그 말이 꼭 자신을 향한 것 같아 몸을 움찔 떨었다.
“그래?”
“아줌마는 나한테 별 관심 없고, 아빠는 맨날 우쭈쭈 거리면서 칫솔에 치약 짜는 것까지 참견하고.”
“피곤하겠구나.”
“열라 피곤하죠. 집에 들어가기 싫어요.”
“근데 왜 학교도 안 나와?”
유정의 말에 종훈이 고개를 바로 하고 유정을 보았다.
그 눈빛을 보는 유정의 머리에 그제야 깨달음이 왔다.
생각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자기 생각을 말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색해하고 말을 피했던 것이다.
“쌤도 똑같으니까요, 아빠랑......”
종훈의 입에서 드디어 토해진 진심에, 유정은 전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