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43화 (43/102)

43. 나가2017.07.08.

유정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학생들과 약속한 시간이었다.

유정이 교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학생들은 소리를 지르며 그녀에게 달려왔다. 안색을 살피기도 하고 울먹이기도 하며.

“무슨 일이야?”

되려 유정이 놀라 묻자, 여학생 하나가 울면서 유정에게 안겼다.

“괜찮아요? 괜찮으신 거죠?”

그제서야 유정은 보건실에 가기 전, 학생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난 일을 떠올렸다. 이제까지 반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아서 유정은 그런 일이 생겨도 학생들이 그렇게 자기 편을 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괜찮아.”

“우리가 다 찍었어요. 교도소 보내요.”

남학생이 휴대폰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유정은 말없이 미소했다.

“진짜 괜찮아. 그리고 같이 때렸잖아.”

“하하, 쌤 진짜 통쾌했어요.”

학생들은 구름처럼 유정을 둘러싸고 재잘거렸다. 그들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유정은 할 일을 생각하고 시계를 보았다.

“일단 자리 앉자.”

학생들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유정은 뒷자리를 살폈다. 놀랍게도, 종훈이 와서 앉아 있었다.

사건의 원흉인 종훈도 있어야 하는 자리였기에, 유정은 종훈에게 연락을 했다. 다행히 종훈은 휴대폰을 바로 받았다.

그는 오겠다고 했고 진짜로 왔다. 아직은 말 한 마디도 없이 입을 꾹 다문 채였지만.

“우선 사연들을 좀 볼까?”

유정은 조회 시간에 이야기한, ‘선생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쪽지를 모았다. 금세 교탁 앞이 수북해졌다.

“이 시간에 다 볼 수는 없겠지만 몇 개만 일단 보고 나머지는 내가 집에 가서 꼭 볼게.”

“꼭 보셔야 해요.”

학생들이 입을 모아 말했고 유정은 웃었다.

첫번째 쪽지를 열었다. 잠시 눈으로 쪽지를 훑던 유정이 입을 열었다.

“유정 쌤, 쌤이 처음 들어오신 순간 여신인 줄 알았어요.”

학생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든 유정은 눈을 찡긋했다.

“누군지 모르지만 사람 보는 눈이 있네.”

“인생을 사는 법을 아는 거죠.”

누군가의 말에 학생들이 웃었고 유정은 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그녀의 눈이 다시 쪽지로 내려갔다.

“이제까지 늙은 남자 쌤만 담임 선생님으로 만났었는데 유정 쌤을 만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런데 쌤, 종훈이 앞에서 늘 너무 위축된 거 같아서 저는 그게 되게 속상했어요.”

학생들이 서로 공감의 눈짓을 했다. 유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마저 읽었다.

“저는 쌤이 부드러운 것도 좋지만 또 강하고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쌤이었으면 좋겠어요. 종훈이도 막 휘두를 수 있고 그런 쌤이요. 하지만 안 그래도 저는 쌤을 응원합니다. 저의 여신이니까요.”

누구냐, 자수해라, 라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났고 유정은 쪽지를 내려 놓았다.

“음, 정체를 들켜버렸네. 나 실은 하늘에서 내려왔거든.”

유정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학생들이 오글거린다며 소란스럽게 웃었다. 잠시 학생들을 바라보던 유정이 표정을 굳히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엄하게 대하는 게 너희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부드럽게 대하려고 노력했고, 누구 표현대로 유치원 선생님처럼 굴었어. 하지만 내 원래 성격은 오늘 봤듯이 좀 과격한 면도 있어.”

유정은 시선을 내려 종훈을 보았다. 그는 이 쪽을 보지 않고 있었다.

오늘의 일로, 종훈의 위치는 완전히 추락해 버렸다. 그의 아버지가 유정을 함부로 대하는 것도, 그리고 유정을 때린 것도 학생들은 모두 보았다.

아버지는 집에 오는 내내 다시는 학교에 가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저런 선생은 선생도 아니라고 하면서. 전학을 시키거나 유학을 보낼 거라고 했었다.

그러나 종훈은 어쩐지 마음이 불편하기만 했다. 넘어서고 싶었던 것은 실은 관심 받고 싶어서였고, 자신에게만 잘해주는 유정에게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기울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아버지가 유정에게 가서 따지면 마음이 시원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억지에 당당히 맞서는 유정을 보면서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다.

미안했다. 유정의 선의에 대해 자신은 비겁한 모습만 보였던 것이. 장악하고 싶었고, 관심이 떠나지 않게 하고 싶었다. 자신이 유정의 호의를 받아들이면, 유정의 관심은 또 다른 곳으로 가게 될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아버지에게 그는 늘 아이였다. 그의 의사와 생각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보호하는 데에만 급급해 했다. 모든 것을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새어머니의 탓으로 몰았다.

온전한 사랑을 받고 싶었다. 흔들리면 잡아주는 사랑, 자신을 똑바로 보고 격려해주는 사랑.

유정의 전화를 받기 전에, 준서의 전화를 먼저 받았다. 엘리베이터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학교에 나오고 나서야 그가 교장인 것을 알았고, 다 알지는 못했지만 이미지만으로 굉장히 강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자신의 지난 죄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영영 유정과 준서의 눈에서도 벗어난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똑바로 하라고 말했을 텐데.”

준서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약간 쉰 듯도 한 목소리는 종훈에게 더욱 큰 공포감을 안겨 주었다.

“마지막 기회야. 아버지 따라 영영 여기를 떠나든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나와. 네가 아버지를 따라 간다면 다신 서유정 선생님 같은 분은 만나지 못할 거야. 뭐가 진짜 불행한 건지 네가 판단해.”

준서는 종훈의 마음을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전화를 끊고 얼마 안되어 유정의 전화가 걸려 왔다.

유정은 전처럼 다정하지 않았다. 나와서 이야기하자는 짤막한 메시지만 전했다. 그것만으로도 종훈은 벌써부터 심장이 욱씬거렸다. 관심이 떠나버린 걸까. 쥐고 흔들고 장난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머물러 주길 바랐는데.

마지막 용기를 냈다. 아버지가 출근한 틈을 타서 집을 나왔다. 학교에 가서도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반에 들어갔지만 종훈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제 썰렁하기만 했다.

학생들은 완전히 유정의 편이 되어 있었다. 자신에게 붙어 같이 그녀를 휘두르던 무리도, 지금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래, 종훈아.”

유정의 시선이 종훈에게 떨어졌다. 뭘 물었던 거지. 종훈은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유정은 묵묵히 종훈을 보고 있었다.

“뭐가요.”

처음으로 종훈의 입에서 불퉁한 대답이 떨어졌다. 유정은 전처럼 웃지도 않고 살갑게 굴지도 않았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고.”

“없어요.”

종훈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런 낯뜨거운 자리, 싫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고,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데.

유정은 천천히 종훈에게 걸어왔다. 바로 앞에서 발을 멈춘 채, 유정은 다시 묵묵히 종훈을 보고 있었다.

시선이 따가웠다. 종훈은 미간을 모으며 신경질적인 눈으로 유정을 마주 보았다.

“왜요?”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해 보라고. 존중을 담아서.”

“존중이요?”

종훈의 입술이 비틀렸다.

“남을 깔아 뭉개는 것 밖에는 네가 관계를 맺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네가 존중하면서 말해도, 충분히 우리는 그걸 들어줄 수 있어. 꼭 지배하고 억누르려고 하지 않아도.”

유정은 종훈의 마음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있는 듯이 콕콕 집어 말했다. 종훈은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나동그라졌다.

“웃기시네. 존중? 존중 같은 소리 하지 마요. 우리 아빠 네가 때렸잖아. 그러면서 무슨 존중을 따져? 네가 선생이야? 그래놓고 사람 오라 가라 하고. 나 아빠 복수하려고 나온 거야. 네년 목 따가지고 아빠 복수할 거라고!”

예상치 못한 말이 종훈의 입에서 토해졌다. 유정은 살짝 미간을 모았다가 펴고, 똑바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이제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성난 기세에 종훈은 자기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다시 한 번 말해봐.”

유정의 시선이 화살처럼 종훈을 찔렀다.

“복수할...... 거라고.”

종훈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유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반의 분위기가 전과는 전혀 달랐다. 전처럼 대놓고 비아냥대어도, 이제는 아무도 호응을 해줄 것 같지 않았다.

유정은 기가 죽은 종훈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그를 달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그의 어깨라도 짚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유정은 도로 손을 내렸다.

그를 달래고 싶은 것은, 그를 나만이 바꿀 수 있다는 욕심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겠는가. 진실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스스로 밖에 없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그녀가 해야 할 일은, 그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그녀를 바꾸는 일이다. 그의 어떤 대응에도 물러서지 않을 힘을 기르는 것, 그리고 그녀의 교육에 대해 당당해지는 것.

“나가.”

그녀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종훈이 고개를 들고 미간을 보았다.

“네?”

“나가라고. 나는 분명히 존중을 담아서라고 말했고, 너는 지키지 않았어. 난 네가 말하는 어떤 것도 들어줄 생각이었지만 너는 마지막까지 거부했어.”

“이년이!”

종훈이 팔을 번쩍 드는 순간 유정은 재빠르게 물러났다. 종훈을 붙든 건 다른 학생들이었다.

“나는 너에게 어떤 가르침도 줄 수 없어. 우리는 소통할 수 없어. 그러니 나가. 아버지한테로 돌아가.”

유정은 그렇게 말하고 교탁 앞으로 갔다.

몸이 떨렸으나 입술을 깨물어 참았다. 종훈은 유정을 노려보다가 그대로 교실을 나가 버렸다.

정적이 흘렀다.

유정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녀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어렸다.

“그럼 다음 쪽지를 볼까요?”

“괜찮으세요?”

학생들이 걱정 어린 시선을 받고, 유정은 막 펼쳐들려던 쪽지를 내려 놓았다.

“당연히 안 괜찮지.”

“그런데 잘하셨어요.”

“저렇게 혼내야 돼요. 그 동안 너무 오냐 오냐 했어요.”

유정은 잠시 문 쪽을 바라 보았다. 나가라고 했으나 진짜 나가 버리니 마음은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종훈이 선택할 일이었다. 유정은 더 이상 그가 예의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실은, 오늘 저번 폭력 사태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하고 싶었어. 그게 교사 회의까지 올라갔는데 내가 일단은 당사자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좋다고 고집 부렸거든.”

유정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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