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빨리 다 정리하고 연애합시다2017.07.06.
유정은 준서를 밀쳤다. 준서는 그대로 밀려나가 옆 침대에 걸터 앉았다.
자리에서 일어선 유정이 준서의 이마를 짚었다.
“미쳤어, 이 남자.”
준서의 눈이 몽롱해져 있었다. 다람쥐 운운 할 때부터 제정신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다.
“좀 누워요.”
“괜찮습니다.”
“누우라니까.”
유정의 손이 준서의 등을 가볍게 내리쳤다. 준서의 눈이 웃었다.
“뭡니까. 아이 혼내는 엄마 같이.”
“농담할 때 아니라고요.”
화를 내는 유정이, 준서의 눈에는 사랑스럽기만 했다. 점점 정신이 희뿌옇게 변해가서 그럴까.
유정의 팔을 무작정 끌어 당겼다.
“어머.”
유정이 그의 옆에 넘어지듯 주저 앉았다. 준서는 유정의 어깨에 어질한 머리를 대었다.
곧 유정의 향기가 콧 속으로 스며들었다.
“아픈 핑계가 좋네요.”
“취했어요?”
“취한 것 같네요. 유정 씨한테.”
열이 높은 게 확실하구나. 유정은 준서의 뺨에 가볍게 손을 댔고, 준서가 그 손을 입으로 가져와서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어머, 뭐하는......”
놀라 움츠리는 손을 당겨 자신의 몸에 얹고, 준서는 그르렁 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저 오늘 김윤호 선생님께 혼났습니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미주알 고주알 일러 바치는 아이 같아서, 유정은 웃음이 나는 것을 입술을 깨물어 참고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혼나다뇨?”
“너무 혼자서 앞서가지 말라고요. 교무실에 제 편이 아무도 없다더군요.”
“아무도라뇨? 전 사람도 아니예요?”
고개를 든 곳에 유정은 정말 화가 난 듯이 준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서유정 선생님은 제 편입니까?”
준서의 고독한 눈이 유정을 향했다. 핏발 선 눈을 보는 유정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가 얼마나 힘겹게 싸우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고집스러운 선생님들을 상대하며,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하루 하루가 그에게 쉽지 않은 것도 알고 있었다.
“바보.”
유정의 입술이 준서의 이마에 닿았다. 준서의 고개를 자신 쪽으로 하고, 유정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다른 선생님 말 듣지 마요. 잘 모르고들 하는 말이니까. 난 교장 선생님 편이예요. 끝까지 같이 가요, 우리.”
준서의 팔이 유정의 허리에 둘러졌다. 아이처럼 색색 숨을 쉬던 준서가 고개를 들고 유정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묻었다.
뜨거운 혀가 넘어오는 것을 말없이 받으며 유정은 눈을 감았다. 당신의 살을 받아 안듯이, 당신의 외로움에도 함께 해주고 싶어. 그렇게 슬퍼 보이는 눈은 보고 싶지 않아.
입을 뗀 준서가 유정의 볼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래, 같이 가자.”
그 순간, 유정은 그의 말이 시공간을 넘어선 진리처럼 그녀의 마음에 박힌 것을 느꼈다. 남들 앞에서는 강하고 당당하지만 그녀 앞에서만큼은 아이가 되는, 그녀의 위로 하나에도 기뻐하는 작은 심장.
“어떡하지.”
준서가 유정의 볼에서 손을 떼고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왜요?”
“못 기다리겠는데.”
유정의 미간이 좁아졌다.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빨리 정리하고 연애합시다, 우리.”
유정은 건우에게 맞은 뺨이 그제서야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어느 곳인가 숨어 있었던 양심의 소리 같은 것이었다.
“할아버지께 말씀은 드렸는데, 길게 끌지는 못할 것 같아요. 예식장까지 예약을 끝낸 상태니까. 취소하려면 얼른 해야죠.”
유정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빨리 처리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뭐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알아선 안되는 일입니까?”
유정은 준서의 빨려들 듯이 까맣게 빛나는 동공을 보았다. 그에게 말을 해도 될까. 달싹이던 입술이 도로 닫혀 버렸다.
준서는 픽 웃고는 유정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말 안해도 돼요.”
“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직접 만나 물어보죠.”
유정의 동공이 커졌다.
“뭘 들었다는 말은 안할 거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유정 씨는, 내가 당당해질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요.”
자리에서 일어선 준서가 유정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저, 교장 선생님......”
“그 지긋지긋한 호칭도 이젠 그만 듣고 싶은데요.”
준서는 싱긋 웃었다. 유정은 그의 눈을 피했다.
그 날 오후, 1차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학생 부장 오남우와 2학년 부장 고용순, 그리고 담임 교사 서유정과 교장 하준서가 회의실에 모였다.
학생 부장 남우가 모아 온 학생 진술을 바탕으로 사건이 재구성 되었다. 모두 알고 있는 사건이라 길게 설명할 것도 없었다.
“상해의 정도가 경미한 물리적인 폭력은 학교 규정으로는 교내 봉사 7일에 해당하지만 담임 재량으로 판단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서유정 선생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준서는 너덜너덜해진 규정집을 들추며 아까와는 전혀 다른 건조한 시선을 유정의 얼굴에 던졌다.
“학부모 항의도 있었으니, 담임 재량으로만 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막 입을 열려던 유정을 막고, 남우가 말했다. 준서의 미간이 모아졌다.
“학부모의 학교가 아니지 않습니까? 항의가 있고 없고가 중요합니까?”
“중요하죠. 교장 선생님은 처음이시라서 그냥 원칙대로 하시면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그게 현실적으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학부모가 신경쓰지 않으면 그냥 싸운 애들 엉덩이나 몇 대 두들겨 주고 끝내면 되는 일이죠. 하지만 이 사건은 이미 그렇게 끝낼 수가 없습니다.”
준서는 남우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옅은 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뜨거운 머리가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학생 부장님 말씀이 틀린 게 아니예요. 이건 서유정 선생님이 할 수 있는 일을 넘어선 겁니다. 그래서 실력 있는 교사들은 이렇게 사건을 크게 키우지 않는데......”
뒤이어 용순이 말했다. 준서는 고개를 바로 하고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유정은 완전히 기가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는 담임을 이십 년 간 했지만 일을 이렇게 키운 적이 없어요. 학부모가 사건 때문에 학교에 찾아온 적도 없고요. 능력 있는 사람을 담임을 줘야 하는데 요즘은 너무 아무나 주는 거 같아요.”
50대 초반의 용순은 정장 치마를 바로 하며 슬쩍 유정을 돌아 보았다. 유정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약간 붉어져 있긴 했으나 언짢은 기색은 없었다.
“하실 말씀 다 끝나셨으면 제가 말씀을 드려도 될까요?”
듣다 못한 준서가 한 마디를 하려던 때였다. 유정은 그렇게 말하고 준서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 눈에서 준서는, 그녀가 생각과는 달리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라고 하자 유정은 차분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차분하게 돌아보며 말했다.
“계속 생각을 해봤는데, 저는 일단 당사자들에게 의견을 말할 기회를 주고 싶어요. 징계는 그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에게는 징계의 결과 못지 않게 과정도 중요하고, 그것도 하나의 교육이니까요.”
준서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을 때, 남우의 입에서 참다 못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당사자라뇨. 학교 징계 건입니다. 서유정 선생님 지금 주제 파악 못하세요?”
“학생부장님.”
잔뜩 좁아진 미간으로 남우를 노려보며 준서가 큰 소리를 냈다. 호명 당한 남우 뿐만 아니라 용순과 유정의 시선도 준서를 향했다.
“선생님이시라는 분들이, 담임 경력 20년이라는 분들이 기본적인 예의와 존중은 어디에 두고 오신 겁니까? 주제 파악 못한다니, 당사자 앞에 두고 담임 아무나 준다느니. 여기 우리가 모인 건 누구에게 책임을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합리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니, 신입이 일을 키운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학부모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그러시는 거예요. 지금 중요한 건 이런 징계위원회가 아닙니다. 당장 그 학부모 앞에 가서 무릎이라도 꿇고 사죄해야 하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선.”
답답하다는 듯이 남우가 가슴을 두들기며 말했고 용순이 동의하듯이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요. 경력이 없는 게 이런 데서 차이가 나는 거죠. 전 담임 경력 20년 동안 문제 한 번 일으킨 적이 없어요.”
“그래서 20년 동안 찾아오는 학생이 한 명도 없는 거군요, 문제도 안 일으켰지만 아무 일도 안하셔서요.”
준서의 시선이 학년 부장을 향했다. 그녀는 미간을 구기며 벌떡 일어섰다.
“뭐라고요? 허,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알지 못하긴요. 취임하기 전에 이미 선생님들에 대한 모든 조사는 끝났습니다. 그러니 더 창피해지기 전에 자리에 앉으세요.”
용순이 비틀거리며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준서는 고개를 돌려 남우를 바라 보았다. 바라보기만 했는데도 남우는 기가 질린 듯이 몸을 곧추세웠다.
준서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힌 목소리로 다시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저는 서유정 선생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수업 시간에 가르치는 것만 교육이 아니죠. 학교는 학생이 학교에서 대하여지는 방식과 태도 모두가 교육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징계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따라서 일단 당사자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 후에 징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아니, 교장 선생님, 이건 그냥 갈등을 해결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학생끼리 싸운 문제가 아니라 학부모의 충돌로 봐야 하는 거에요. 민종훈이 아버지도 만만치 않은데 하성헌이 아버지는...... 아니 교장 선생님이 더 잘 아시면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허 참......”
남우는 아랫 입술까지 부들 부들 떨었다. 준서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쉰 후에 흐려져 오는 의식을 깨우듯이 이마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학부모가 누구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학부모의 학교가 아니지 않습니까? 학부모에 따라 학교가 좌지우지 되는 것은 학생에게도 전혀 교육적이지 않습니다. 이 사건도 원칙대로 해결될 거고, 차별은 없을 겁니다.”
유정은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준서의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 남우와 용순의 공격에 의기소침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준서가 있어서 힘을 낼 수 있었다. 당당하게 할 말을 했고 무력한 감정을 참아냈다.
그리고 준서는, 오늘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약해지지 말아요.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당신을 지지하니까.
남우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말했다.
“아니, 그걸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되죠. 작년에 성헌이도 만만치 않았어요. 그 무단 결석 기록하고 폭력 기록 제가 직접 없앴단 말입니다. 성헌이 아버지가 전화 하셔서요.”
유정은 처음 듣는 소리에 미간을 모았다. 그러나 준서는 표정 변화 없이 남우를 주시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