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나의 다람쥐2017.07.05.
“안녕하세요.”
유정은 애써 표정을 밝게 하고 인사했으나 민종훈의 아버지 건우의 표정은 구겨진 채 펴질 줄을 몰랐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학생들하고 마무리하고 나올 테니까......”
유정은 일부러 침착하게 말하고 학생들에게 인사만 하려고 몸을 돌렸다. 그 때에 건우의 손이 유정의 손목을 잡았다.
“지금 이 상황에 뭘 기다리라는 거예요?”
“네?”
손의 힘이 세어서가 아니라, 함부로 몸에 손을 대는 것이 당황스러워서 유정은 물끄러미 건우의 손을 보다가 가볍게 손을 뿌리쳤다.
“왜 이러세요?”
“왜 이러냐고? 우리 아들 상태를 보고서도 그런 말이 나와?”
“종훈이 오면 이야기하고 학교 차원에서 조치하려고 했어요. 그리고 종훈이도 잘한 것 없어요.”
유정이 투명한 시선으로 건우를 보았다. 건우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뭐야, 우리 아들이 맞았다고, 그런데 우리 아들도 잘한 거 없다고?”
“물론 때린 건 성헌이가 잘못한 거죠. 그렇지만 종훈이도 계속 반 분위기 흐리고 저에게 함부로 했어요. 아들이라고 종훈이 편만 드시면 안됩니다. 그건 오히려 종훈이에게도 좋지 않아요.”
유정은 옆에 묵묵히 서 있는 종훈을 보았다.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일방적으로 그의 편만 든 것이, 오히려 지금은 그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준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유정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이 아버지라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종훈을 너무 감싸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하, 이 여자가......”
건우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던 유정의 얼굴도 덩달아 일그러졌다.
“여자라뇨,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되죠.”
“그렇게 말하면 안돼? 학생 관리도 제대로 못하면서 나이도 어린 게 무슨 교사라고.”
건우의 비웃는 듯한 말에 유정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뭐라고요?”
“그렇잖아, 애를 키워보기나 했어? 나이도 한참 어리면서.”
“말씀이 심하시잖아요. 나이가 어리건 말건 저는 교사예요!”
“그래서? 선생님 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어서 교사가 된 건가? 선생님 대접 받고 싶으면 일을 똑바로 하든가. 자신 없으면 돈 많은 남자한테 시집이나 가. 여러 사람 고생시키지 말고.”
첫 만남에서의 정중함은 집어 던진 채로 건우는 그렇게 말하며 웃어 보였다. 유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주먹이 쥐어졌다.
유정의 시선이 다시 종훈으로 향했다. 종훈은 아버지가 그러는 모양을 재밌는 것이라도 보는 듯이 싱글거리며 서 있었다. 종훈이 유정에게 함부로 했던 것이, 유정은 또 다른 차원에서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부전자전이라더니, 이런 것을 종훈도 배운 거구나.
그러면 이대로 울거나 도망치면 안된다. 이런 놈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똑똑히 알도록 해야 한다.
“말씀 다 하셨어요?”
“왜? 더 들을 말이 남았어? 얼른 아들 때렸다는 놈이나 불러내.”
“학교 차원에서 처리한다고 말씀드렸어요.”
“네가 하는 거 못 믿으니까 데려오라고.”
“저나 학교를 더 이상 인정하지도 않겠다는 건가요?”
“일이나 제대로 하고서 그런 말을 하든가.”
건우가 픽 웃었다.
유정은 부들 부들 떨며 건우를 보고 있었다.
그대로 참으면 안될 것 같은데 참지 않으면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종훈이 아버님이야말로 제대로 못하신 건 마찬가지 같은데요? 종훈이 제대로 지도 안하셨잖아요. 그래놓고 학교 핑계만 대시니 저도 우습군요. 학교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요? 그러면 결국 종훈이만 망가지게 될 거에요.”
“뭐, 망가져?”
건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한 걸음 다가선 건우가 손을 높이 들었다. 복도에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유정은 이를 악물었다.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누가 보고 있건 상관 없이 손을 들어 건우가 했듯이 상대의 뺨을 내리쳤다.
“이 여자가 미쳤나!”
건우가 막 주먹을 치켜 들었을 때였다.
마침 복도를 지나던 학생 부장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달려왔다.
“민종훈이 아버지는요?”
어질어질한 머리를 어루만지며 빠르게 보건실로 걸어가는 준서의 걸음을 애써 따라잡으며, 학생 부장은 한숨을 쉬었다.
“그게, 붙든다고 붙들었는데 막 소리를 지르다가 그냥 나가 버렸습니다.”
“그냥, 나가 버렸다고요?”
걸음을 멈춘 준서의 눈이 화살처럼 학생 부장의 얼굴에 꽃혔다.
“아무리 그래도 폭력을 쓸 수는 없지 않습니까?”
“폭력을, 하아, 알겠습니다.”
준서는 학생 부장이 무슨 죄냐는 생각에 입술을 짓씹으며 감정을 참아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맞았다니, 민종훈 아버지에게 맞았다니.
생각 같아서는 그 놈을 찾아가 죽기 전까지 주먹질을 하고 싶었다. 그 놈을 그냥 보내준 학생 부장까지 덩달아 원망스러웠다.
“작년에도, 학부모가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민종훈 아버지보다 심한 경우도 있었고......”
“민종훈도 그러면 같이 돌아간 거죠?”
보건실 문 앞에 선 준서가 물었다.
“네, 아버지랑 같이 왔으니까 같이......”
“당사자는 없지만, 오후에 징계위원회 소집합니다. 일단 폭력 건은 처리를 해야 하니까요.”
“네.”
“징계위원회 관련 메신저 보내주시고, 목격한 학생들 진술도 확보해 주세요. 저도 들어갑니다.”
“네, 알겠습니다.”
학생 부장이 돌아간 후에도 준서는 잠시 묵묵히 보건실 앞에 서 있었다.
애써 화를 억제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는 순간 어떻게 폭발할 지 알 수 없었다.
작심하고 문을 열었다.
“아, 교장 선생님.”
보건 교사는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가 인상을 살짝 찌뿌렸다.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
“저는 괜찮고 서유정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
보건 교사는 커튼 안쪽을 눈짓했다.
유정은 멍한 기분으로 침대에 일어나 앉아 있었다.
누구에게 뺨을 맞은 것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래서 맞는 순간은 굉장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치욕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후 벌어진 일들 덕분에 그녀는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알고 보니 유정의 반 학생들은 몰래 유정과 건우를 보고 있었다. 건우의 막말에 흥분했고, 성헌과 몇몇 무리는 여차하면 뛰쳐 나갈 생각까지 했었다.
건우가 유정을 때리는 것에 놀랐고, 그것을 촬영까지 하고 있었다. 아마 유정이 맞서 뺨을 내리치지 않았다면 바로 달려나왔을 것이다. 학생 부장이 이르자 그들도 달려 나와 유정을 보호했다.
학생 부장과 실랑이 끝에 건우와 종훈이 가 버리자, 괜찮냐며 유정을 살폈다. 여학생들 몇몇은 울기까지 했다.
괜찮다고 하며 그들을 떼어 놓으려고 하는데 학생 부장이 일단 보건실에 가서 안정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이리로 온 참이었다.
위기 때에 자신을 걱정해주는 학생들을 보니, 마음은 저절로 풀려 버렸다. 역시 교사는 학생이 주는 힘으로 먹고 사는 직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거칠게 커튼이 걷히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든 유정은, 온통 붉어진 얼굴로 자신에게 걸어오는 사람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교장 선생님, 어디 아프세요?”
“지금 그게 할 말입니까?”
준서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컸다. 유정은 흘긋 보건 교사가 있는 쪽을 살폈다.
“아니, 얼굴이 새빨개서요. 열 아직 안 떨어진 거예요?”
“제가, 저한테 보내라고 했잖아요?”
유정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책 때문에 화가 나는 걸 알면서도, 준서는 자기도 모르게 유정에게 책임을 돌렸다.
“민종훈이 아버지 상대하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왜 말을 안 듣고......”
보건 교사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여겼는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유정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 미간에 주름을 모았다.
“내가 뭐 학생도 아니고요. 그리고 괜찮아요. 제가 보기엔 교장 선생님이 더 아파 보이는데......”
“괜찮긴 뭐가...... 왜 이렇게 생각이 없어요? 서유정 선생님은 그냥 서유정이 아니란 말입니다. 학교를 대표하는 신분이고 어떻게 보면 학교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 새끼는 서유정 선생님이 아니라 학교에 주먹질을 한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자존심이 상한 거였나. 내가 걱정이 된 것이 아니라. 유정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걱정해 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는데.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처신을 잘못해서. 제가 맞서 때리는 게 아니었는데. 그냥 참고 맞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유정은 서운한 마음을 감추고 고개를 숙였다. 준서는 잠시 말이 없었다.
다시 고개를 든 유정은, 준서의 입이 호선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모았다.
뭘까, 방금 전까지 불 같이 화를 내더니. 너무 화가 나서 이제 웃음까지 나는 걸까.
“제가 뭘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같이, 때렸다고요?”
준서는 유정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이 그렇게 말하고 입을 벌렸다.
“하, 진짜, 이 여자, 나를 늘 놀라게 해......”
“여자라는 말 하지 말아요.”
유정의 눈이 샐쭉해졌다. 그러자 준서의 얼굴에도 미소가 지워졌다.
“종훈이 아버지도 저한테 여자라고 했었다고요. 나이도 어린 여자가 시집이나 가지 이런 일 한다고. 전 선생님이예요.”
“아, 그래서......”
준서는 대강 상황을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알고 나니 기가 막혔다. 아예 맞서 싸운 것이 아닌가. 사후 처리가 쉽지는 않겠지만 오히려 기분은 나아졌다.
아니, 오히려 통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여자라고 한 건 그런 뜻이 아닌데.”
말을 마치고 입을 다문 준서의 눈이 빛났다. 유정은 준서의 눈빛을 애써 피했다.
“제가 학교를 대표하는 신분이라면서요?”
그 안에 숨은 말을 짐작한 준서는 눈을 빛냈다.
“화 나셨습니까, 그런 말 들어서.”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화 난 표정인데.”
준서의 손가락이 유정의 볼을 살짝 건드렸다. 유정은 고개를 홱 돌리고 으르렁 거리듯이 말했다.
“교장 선생님도 맞고 싶어요?”
“때려주신다면 얼마든지.”
“하, 그런 취향인지 몰랐네.”
“그런 취향은 아니지만 유정 씨가 취향이라면 기꺼이 맞춰드릴 순 있죠.”
유정은 정말 화가 난 듯이 준서에게 주먹질을 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준서는 그러자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얼굴을 내밀었다.
유정은 주먹질을 하려던 손을 펴고 준서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지다가 인상을 찌뿌렸다.
“여기 누워야 할 건 제가 아니네요!”
“괜찮습니다, 저는.”
“괜찮긴 뭐가요. 얼른 누워요. 불덩이잖아요.”
유정이 일어나려는 것을 준서가 어깨를 잡아 앉혔다.
웃음을 지운 그는 평소에 보이는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일단 폭행을 당한 건 사실이니까 좀 쉬세요. 변호사 선임 할 거고, 후속 조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아까 한 말도 사실입니다. 서유정 선생님은 학교를 대표하는 사람이고 학교 그 자체이기도 해요. 저는 학교를 이런 식으로 대한 학부모를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변호사요? 뭐 그렇게 거창하게......”
“거창하게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원래 학교 상주 변호사가 있어야 해요. 교직원과 학생들도 법적인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으니까요.”
“뭐, 결국 교장 선생님이 이렇게 오신 것도 제가 학교를 대표하는 사람이라서......”
투덜대는 유정의 얼굴이 무언가에 푹 안겼다. 그것이 뭔지 유정은 이제 너무도 잘 알았다.
평소보다 뜨거운 품이었으나 그래서 유정은 더 단단히 보호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의 향과, 그의 촉감과, 그의 심장 소리에 취한 채로.
“아니란 거 알잖아요.”
유정은 가만히 준서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몸이 점점 더 조여졌다.
“다치지 마.”
갑작스러운 반말에 몸이 와짝 긴장했다.
“미치는 줄 알았잖아, 너 때문에.”
“너?”
“나의 다람쥐.”
준서의 입술이 유정의 정수리에 닿았다. 뜨끈한 기운이 그녀의 몸 안에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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