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내가 옆에 있으니까.2017.07.03.
“내내 생각했던 건데, 파혼이요.”
“네?”
“그거 조금만 늦춰줄 수 없을까 하고요.”
이 여자가.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연애를 할 수가 없어 미치겠는데 파혼까지 늦추라고.
자기도 모르게 우그러진 미간을 하고 준서는 낮게 으르렁 거리듯이 말했다.
“그건 저와 수정 씨 집안 이야기입니다. 유정 씨가 상관할 바는 아닌데요.”
“그런 건 아는데...... 제가 사정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는데...... 수정이 집안도 좀 사정이 있어서요. 파혼을 하면 수정이 그걸 다 덮어쓰게 될 것 같아요.”
준서는 미간을 펴고 묵묵히 이마를 손가락으로 긁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제 탓이라고 하면 됩니까?”
“그렇게 이야기해도 그 집안에서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내기 때문에...... 어쩌면 한 번 파혼한 걸 가지고 완전히 매장해 버릴 수도 있거든요. 수정이가 그 집안에서는 자랑스러워 보이도록 포장된 친구라서요.”
유정은 준서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파혼’은 그의 말대로 그와 수정 사이의 문제였기 때문에 유정이 언급하기가 매우 껄끄러운 면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돌아가려고 하니 수정의 생각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준서는 유정의 말을 듣고서야 그 동안의 수정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무언가 진심을 알 수 없도록 닫혀진 모습, 매너 좋게 행동하지만 그 이상 다가올 수 없도록 만드는 무엇.
“그렇군요. 그 문제에 대해서는...... 할아버지와 다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최대한 피해가 안 가도록 해야죠. 수정 씨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송해요, 이런 부탁, 힘든 거 알면서.”
준서는 신발을 다 신고 가만히 서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빛을 마주했다. 수정에게는 미안하지만, 정말 미안하지만.
“죄송한 부탁인 줄 알면.”
준서는 성큼 유정에게 다가섰다.
“나도 그만큼 죄송하면 되죠.”
유정의 입술에 준서의 입술이 닿았다. 이건 아니잖아, 라는 생각을 하는데 살짝 입술을 머금고는 바로 떨어져 버렸다.
이건 아니지만 이것도 아니잖아. 유정은 자기도 모르게 준서의 온기가 남은 입술을 입 안으로 밀어넣고 혀로 핥았다.
준서는 더 욕망이 짙어지기 전에 얼른 몸을 세웠다. 붉어진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을 마주하다가 양 팔로 그 얼굴을 끌어안고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내일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네.”
“내가 옆에 있으니까.”
유정은 준서의 품에 코를 묻었다. 오래 묻혀 있던 옷이라 나프탈렌 냄새가 났으나 그 냄새조차 싫지 않았다.
“푹 자요, 오늘.”
“고맙습니다.”
“내 꿈은 안 꿔도 되니까.”
준서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포옹을 풀었다. 유정은 가볍게 눈을 흘겼다.
“선수야, 은근히.”
유정의 눈을 준서가 미소로 받았다. 그러자 유정도 눈에 힘을 풀고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내일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몸이 떨리지만, 그래도 아주 죽을 것 같지는 않아. 당신이 있어서.
“아휴, 나오지 말라니까......”
세단은 유정의 집 앞에 멈췄다.
아픈 준서를 두고 얼른 나가려는 유정을 준서가 갑자기 따라 잡았다. 바래다 주겠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머릿 속이 복잡한 그녀를 그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유정과 준서의 집은 걸어서는 30분 이상이 걸렸다. 유정은 운동 삼아 걸어가겠다고 했지만 준서는 막무가내였다.
“한잠 푹 자고 났더니 이제 괜찮아요.”
“옷이라도 갈아입고 오시든가!”
“어차피 차에 있을 건데요.”
좀 촌스럽다 했던 츄리닝은 알고 보니 고등학교 때 체육복이었단다. 키가 크고 멀끔하게 잘생긴 준서는 츄리닝에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어도 빛이 났다.
어쩔 수 없이 도로 유정의 집에 오고 말았다. 유정은 혹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눈을 들어 진구가 나오지 않는지 살폈다.
“얼른 가요, 저 들어가 볼게요.”
차 문을 닫는데 준서가 유정 쪽의 차창을 열었다.
“오늘, 고맙습니다.”
“뭘요. 푹 쉬세요.”
준서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려다가 대신 손을 들었다. 그러자 유정도 픽 웃으며 마주 손을 들었다.
어릴 때 친구끼리나 하던 인사를 나누며 유정은 그가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에 깊이 자리한 것을 느꼈다.
수정은 멍한 눈으로 유정이 아파트로 들어가는 모양을 보았다.
자신이 여기 왜 왔는지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녀가 인사를 하는 대상은 분명히 준서였다. 차도 준서의 차가 맞았고, 열린 차창 저 쪽으로 보이는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손을 흔드는 것을 보니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사이일까. 어떻게 아는 걸까. 설마 같은 직장이었던 걸까.
기분은 오히려 덤덤했다. 단순한 직장 동료가 아니어도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준서는 좋은 남자고, 유정은 좋은 친구니까. 하지만, 모든 것을 다 허용해 줄 수는 없었다.
무슨 행동을 하고 다니든, 준서는 종내에는 수정과 결혼해야 했다. 그것이 수정에게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것이 아니면 수정이 이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수정은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천천히 돌아나가는 차를 먼 눈으로 보며, 수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녕하세요.”
유정의 밝은 인사에도, 인기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유정은 인사를 한 것으로 그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잘못은 인기가 한 것이니까.
그러나 수연조차 유정에게 별로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떨떠름하게 인사를 하고는, 자기 할 것을 하는 수연은 여러 모로 어색해 보이기만 했다.
“언니.”
유정이 수연의 팔을 잡고 흔들자, 수연은 갑자기 소스라치듯이 놀라며 팔을 가볍게 뿌리쳤다.
“언니, 왜......”
“아, 아니. 좀 피곤해서.”
수연은 어색하게 웃고 교무실을 나가 버렸다.
당황한 유정의 옆얼굴을 인기의 눈이 뚫어져라 노려 보았다.
“그래, 교장이나 빨아주면서 그렇게 살아. 근데 그거 알아? 교무실에서는 대부분이 내 편이야. 교장은 교장실에 있고. 앞으로 편하게 교직 생활 하겠어.”
유정은 고개를 돌렸다. 비열해 보이는 눈이 그녀의 눈 앞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 사람은 정말 상종을 못할 사람이구나.
한 때 그의 눈치를 보았던 것마저 치욕스럽게 느껴졌다.
“부장님이 먼저 잘못하신 거잖아요? 저 곤란하게 만드신 것도 부장님이고요.”
“하, 교장 빽이라 이제 막말한다는 거야?”
“제가 언제 막말 했다고 그러세요? 저는 처음에 부장님 편의 다 봐드렸어요. 안되는 거 알면서도 다 해드렸잖아요.”
“그러면 뭘해? 결정적일 때 배신을 때렸는데. 한 배를 탄 사람들은 그러면 안되는 거야. 어어, 이수연 선생, 커피 사줄게 잠깐 나가자.”
인기는 말을 하다 말고 교무실에 들어서는 수연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수연은 고개를 끄덕하고는 도로 발길을 돌려 교무실을 나갔다.
유정은 그제서야, 수연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를 알았다. 인기가 손을 썼던 것이다. 그녀에게 가장 힘이 되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으니까.
더럽고 치사해.
유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교무실 문이 닫히고도 안은 썰렁하기만 했다.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숙였지만 울지는 않았다.
지지 말자, 절대로. 준서는 매를 맞아가면서까지 자신의 의지를 지키려고 하지 않았나. 난 그에게 해줄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적어도 내 스스로는 지지 말자.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펴고, 유정은 조회 시간에 전달해야 할 사항들을 정리했다.
준서는 허물어지듯이 의자 위에 몸을 부렸다.
몸이 좋지 않았다.
어제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서 유정을 바래다 주기까지 했는데, 집에 돌아오니 다시 몸이 오슬오슬 추워지면서 열이 올랐다.
미혜도 없어서 준서는 별 수 없이 혼자 끙끙 앓았다. 해열제를 먹고 새벽녘에야 조금 눈을 붙이고 바로 나온 길이었다.
오늘 하루 정도는 쉬고 싶었지만 산재한 일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몸보다는 정신이 문제인 것 같았다. 할아버지와 그런 일을 겪고 난 후, 그의 마음 안에서 자꾸만 무언가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했다. 준서는 전화기를 들고 김윤호를 호출했다.
나이며 실력이며 부장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전 교장과 일마다 충돌하는 바람에 아직도 평교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교사였다.
곧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세요.”
준서는 반쯤 쉰 목소리로 말하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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