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보고 싶은데2017.07.01.
준서는 몸을 휘감는 나른한 온기를 느끼며 눈을 떴다. 푹 잤는지 개운했다. 뜨겁고 어지러웠던 머리도 조금 맑아진 것 같았다.
다리 쪽의 통증도 덜해진 것 같아 무심코 밑을 본 준서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살펴보니 몸에는 10년 전에 입었던 라운드 티와 고등학교 때 입었던 체육복이 입혀져 있었다. 그 스스로는 절대 찾아 입지 않았을, 작정하고 찾지 않으면 찾을 수도 없는 옷이었다.
다리에는 하얀 붕대가 친친 감겨져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내 몸에.
준서는 침실을 나섰다. 넓은 집안은 누가 왔다 갔는지도 모르게 황량했다.
무심코 식탁 앞을 지나치던 준서의 발길이 멎었다.
작은 짐승처럼, 누군가 식탁 위에 엎드려 있었다. 머리칼이 흐트러진 채 고른 숨을 내쉬고 있는 등을 보는 준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봐요.”
준서는 그녀의 등을 흔들고 나서야 자신의 꼴을 자각했으나, 생각해보니 이미 피하기엔 늦은 것 같았다.
“어, 일어나셨어요?”
“뭡니까, 이게.”
유정은 흐릿하게 눈을 뜨고 준서를 보았다. 그는 처음 보는 성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그런데 계속 땀을 흘리시고. 몸도 더 안 좋아지시고. 참, 슈트는 다 세탁소에 맡겼어요. 여기요.”
세탁소 명함을 내민 유정은 말없이 명함을 받아드는 준서를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한잠 주무시고 나니까 좀 나아요?”
“왜 멋대로...... 제가 이런 것까지 하라고 허락하지는 않았는데.”
일을 할 때의 준서는 아랫 사람에게 너그러운 편이었으나 자신의 영역을 침범할 때에는 조금 달랐다. 자기가 잠든 사이에 옷장이며 약상자까지 다 뒤졌다고 생각하니 불쾌함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럼 어떡해요. 제가 옷 갈아입으라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잖아요.”
“아무리 그런다고 해도 자는 사람 옷을 함부로 벗기고 갈아 입혀요?”
준서는 그녀가 자신의 벗은 몸까지 봤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유정은 묵묵히 준서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쾌하시다면 죄송해요. 그런데 저 정말 다른 생각 전혀 안했어요. 온 몸이 불덩이인데 열부터 식혀야죠. 치료도 해야 할 거 같고. 깨우면 또 괜찮다고 할 거잖아요. 그래서 제 마음대로 했어요.”
준서는 말없이 유정을 보았다.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복잡했다.
“갈게요. 교장 선생님 괜찮으신 거 보니까 가도 될 것 같아요. 마음 푸세요.”
유정은 희미하게 미소하고 일어서서 몸을 돌렸다. 걸어가는데 준서의 손이 유정의 팔을 잡았다.
“잠깐요.”
“네?”
“식사도 못하셨잖아요?”
몸을 돌린 유정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집에 가서 먹으면 돼요.”
“내가 불편해서 그래요.”
“아, 같이 먹을 사람이 필요해요?”
유정이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그러나 준서는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짧은 한숨을 토한 준서가 감정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 밥도 안 먹이고 보내기 싫어서 하는 얘깁니다.”
유정의 표정도 굳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어요. 별로 공개하고 싶지 않은 모습까지 다 공개됐다고 생각하니 불쾌했습니다. 화내서 미안합니다.”
준서는 정중한 태도로 말하고 유정의 눈을 마주했다. 유정은 그런 준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집안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럼 뭐, 밥은 먹고 갈게요.”
“그런데 좋은 걸 대접할 수는 없겠네요. 오늘 미혜 씨가 오프라서. 그게 아니었다면 맛있게 요리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저는 상관 없어요. 좋아하는 사람하고 같이 먹는 밥이니까.”
유정의 말에 준서의 눈이 다시 굳었다.
“왜요? 따라해 봤는데.”
빙긋 웃는 유정 앞에 준서가 성큼 다가섰다. 유정이 눈을 올렸다. 그 순간 준서의 입술이 유정의 이마에 닿았다.
“자꾸 그런 말 하면,”
입술을 뗀 준서의 뜨거운 시선이 유정의 얼굴에 머물렀다.
“못 보낼 지도 몰라요, 오늘.”
유정이 당황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자, 준서가 유정의 손을 잡고 밑으로 당기며 그녀의 몸을 자신의 몸에 밀착시켰다.
“오늘 집에서 보자고 한 게 실수인 것 같군요, 아무래도.”
유정을 끌어안은 준서가 낮은 소리로 웃으며 말하자, 유정도 덩달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얘는 어딜 가서 연락도 안 받고. 유정이 어디 갔니?”
유원은 고개를 들어 혜신을 보았다.
“누나 아직 안 왔어요?”
“응. 어디 갔는지 말 안했어?”
유원은 고개를 젓다가,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눈을 빛냈다.
“연락하지 마요.”
“응?”
“아니, 그냥. 모른 척해요.”
“남자 친구 만나러 갔어?”
혜신은 바로 눈치를 채고 유원에게로 몸을 숙였다. 유원은 헤실거리며 말했다.
“확실하진 않은데.”
“어제 비리비리한 놈이 하나 왔다고 하던데.”
“비리비리하진 않은데.”
“너도 봤어?”
“그냥 슬쩍 봤죠.”
“어떤데?”
혜신의 반짝이는 눈을 유원이 피했다.
“슬쩍 봐서 모르죠. 그런데 아버지 말처럼 막 그렇게 이상하진 않아요.”
“그래? 아주 막돼먹은 놈이라던데.”
“아버진 맨날 누나 남자 친구 생기면 그랬잖아요.”
“그래? 한 번 데리고 오지, 궁금하네.”
“어제 아버지한테 찍혔다면서요. 조심스럽겠죠, 아무래도.”
유원은 그렇게 말하고 혼자 피식 웃었다.
“그러면 아버지 없을 때 좀 데리고 오라고 할까?”
“그러든가요.”
유원은 주먹질에 대한 사과도 할 겸, 그를 다시 만나야 겠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못한 것이 두고 두고 아쉽기도 했다.
“누군데, 뭐하는 사람인데?”
“몰라요, 나도. 잠깐 얼굴만 본 거라. 누나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그렇게 말하고 나니 유원은 문득 외로워졌다. 내가 남의 연애에 참견할 상황이 아니지. 내 앞길도 분명하지 않은데.
“그러게. 들어오기만 해봐.”
혜신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유원의 방을 나갔다. 그 모습을 픽 웃으며 보고 있던 유원은 휴대폰을 들었다.
전화를 하면, 뭐라고 할까.
뭐라고 하는지는, 전화를 해보면 알겠지.
집에는 다행히 일하는 아주머니 외에 아무도 없었다. 수정은 방으로 들어가서 의자에 쓰러지듯 기대어 앉았다.
아버지가 출장을 가고 나면, 어머니의 패악질이 시작되곤 했다. 그것을 고스란히 몸에 받아내고 나면 당분간은 다른 사람인 듯이 잘해준다.
언제까지 이런 살얼음판을 걸을 수 있을까.
어릴 때부터 그 모든 이유가 그녀의 잘못이라고 낙인 찍혀버린 탓에 수정은 죄책감을 버리지도, 이 집안에서 도망치지도 못했다. 마치 어릴 때 끈에 묶여 버린 코끼리처럼.
아무도 없는 집에서 비로소 휴식하던 그녀의 몸이 휴대폰의 진동에 파르르 떨었다. 뭘까. 설마 어머니일까. 집에 들어왔다고 뭐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망설이던 그녀의 손이 휴대폰을 들었다.
- 누나.
“유원이?”
- 저장했네요!
수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이상한 녀석이었다. 10년 전에 보고 처음인데 매일 본 것처럼 군다. 나와는 태생부터가 다른 친구.
“어, 뭐.”
- 어, 뭐는 뭐예요. 지금 뭐해요?
“으응? 그냥 쉬고 있는데.”
- 내가 같이 놀아주고 싶은데. 지금 나 아파서 누워 있거든요. 꼼짝을 못해요. 왜 그럴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수정의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커졌다.
- 맞추려는 성의라도 있어야지, 너무한다.
“힌트도 없잖아.”
- 힌트는, 어제 공연.
“공연이 뭐?”
- 맞춰봐요.
막무가내다. 그런데 그 막무가내 때문에 긴장했던 몸에서 웃음이 났다.
“그걸 어떻게 맞춰?”
- 나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았거든요.
수정의 웃음이 멈추었다. 웃을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유원의 말소리는 즐겁기만 했다.
- 아, 진짜. 왜 아무 말이 없어요?
“왜? 무슨 일인데?”
- 그건 비밀, 맞추려는 성의가 없어 안 가르쳐 줄래요.
“야, 서유원.”
- 꼭 누나처럼 부르네.
다시 웃음 소리가 났으나 수정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미간을 우그러뜨리며 언성을 높였다.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다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너희 집 그렇게 엄격한 편도 아니잖아.”
- 올래요?
유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 보고 싶은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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