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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35화 (35/102)

35. 같이 할까요?2017.06.30.

“좋아해요, 나도.”

“정말?”

“그럼,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랑,”

유정이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포옹하고 있는 준서의 팔을 보았다.

“이러고 있겠어요?”

“유정아.”

유정은 다시금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몸을 가볍게 떨었다.

직함을 떼고 이름만으로 불릴 때마다 그에게 날 것을 보인 듯이 부끄러웠다. 소름이 오소소 돋아날 것처럼.

“이렇게 불러도 돼요?”

유정의 마음을 또 꿰뚫어 본 듯이 준서가 묻자, 유정은 얄미운 듯이 눈을 흘겼다.

“불렀잖아요, 벌써.”

“유정 씨도 그럼 이제 이름 불러요. 교장 선생님이라고만 하지 말고.”

“아니 잠깐만요, 교장 선생님.”

유정은 별안간 생각난 현실에, 방금 준서가 한 말을 정면으로 어기고 그를 뿌리쳤다.

“수정이랑 약혼했잖아요, 나랑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니예요?”

준서는 잠시 묵묵히 유정을 보다가, 표정을 굳히고 대꾸했다.

“파혼하기로 했습니다.”

“네에?”

설마, 나 때문에? 파르르 떠는 유정을 보고 준서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유정 씨 때문은 아닙니다. 어차피 집안끼리 약속이었으니까요. 더 이상 집안이 요구하는 것은 하지 않겠다는 제 의지의 표현이고, 할아버지께서도 받아주셨고요. 그것에 대해서는 제가 수정 씨에게도 충분히 설명할 생각입니다.”

“아......”

“그래도 유정 씨가 찜찜하고 마음이 불편하다면, 저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준서는 다시 예전의 정중한 그로 돌아간 모양으로 말하고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러나 유정은 여전히 수심이 어린 표정이었다.

“역시 그것이 제일 큰 걸림돌이군요.”

준서는 갑자기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의자 위에 털썩 앉았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준서 쪽에서 파혼을 요청했을 때, 아무리 잘 설명을 한다고 해도 수정이 그 집에서 질책을 피할 수 있을까. 아니,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혼외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가 받는 대우는 유정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파혼이라는 꼬투리를 수정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여자가 어떻게 활용을 할지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쳤다.

그런 반면, 준서에게 말도 없이 결혼 후에 유학을 계획하고 있던 수정을 생각하니 어차피 그렇게 될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유정은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에 빠져 잠시 준서의 상태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준서가 갑자기 식탁 위에 머리를 대었을 때, 그녀는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래요?”

생각해보니 조금 전에 안았을 때에도 준서는 지나치게 뜨거웠었다. 흥분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유정은 식탁 위에 엎드린 준서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어머, 열 나는 거 같은데요?”

“좀 어지럽네요.”

준서는 몸을 일으켰다. 유정과 안고 난 후부터 긴장이 풀리면서 온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맞은 곳도 전보다 배로 화끈거려서 걸음을 옮기기도 어려웠다.

“그러고보니 아까 아프다고 하셨죠. 몸살이에요? 얼른 누워야 될 것 같은데.”

“미안합니다. 긴장이 풀리니까 갑자기 이러는 거 같아요. 배웅 못할 것 같은데.”

“저는 걱정하지 말고요. 꺅!”

애써 고통을 참아내며 걸음을 옮기던 준서가, 종이가 구겨지듯이 자리에서 그대로 넘어져 버렸다. 유정은 놀라서 물러섰다가 다시 다가가서 준서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왜 그래요? 많이 아픈 거예요? 침대까지 못 가겠어요?”

“아니, 그게, 그래서가 아니라......”

준서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준서의 몸을 유정이 잡았다. 팔을 어깨에 걸게 한 후에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거울 텐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남 걱정할 때 아니거든요. 얼른 가서 눕기부터 해요.”

유정의 도움으로 겨우 침대에 몸을 얹은 준서는 깊은 숨을 내쉬며 그대로 베개에 머리를 댄 채 엎드려 버렸다.

“똑바로 누워요. 열 나는데 그러고 있으면 더 안 좋아요.”

유정이 준서의 몸을 흔들었으나 그는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아휴, 진짜. 갑자기 왜 이래요? 똑바로 누우라니까.”

“아파요.”

“아픈 거 아니까 똑바로 누우라고요.”

“그게 아니라. 똑바로 누우면 아프다고요.”

준서는 그렇게 말하고 옅은 숨을 내뱉었다. 그의 이마에 금세 땀이 고였다. 유정은 그 순간 유원을 떠올렸다. 똑바로 누울 수 없어서 내내 엎드려서 앓고 있는.

“설마, 할아버지한테 맞은 거예요?”

유정의 말에 준서는 놀란 듯이 눈을 위로 치켜 떴다. 놀란 눈빛에서 유정은 긍정의 답을 읽어냈다.

“진짜요? 어제 오늘 무슨 날이예요? 왜 다 큰 어른들이 맞고 다녀요? 교장 선생님은 뭘 잘못해서.”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준서는 얼굴을 잔뜩 찌뿌렸다. 그러나 유정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자기 할 말을 쏟아냈다.

“약은 발랐어요? 아, 나하고 같이 들어왔으니까 못 발랐겠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서 좀 가져올 걸. 유원이 발라준다고 잔뜩 사다 놨거든요.”

“약은 됐고, 물 좀 가져다 줄래요. 목이 너무 타네.”

준서의 말에 유정은 얼른 부엌으로 가서 물을 컵에 따랐다. 수건을 찬물에 적셔서 손에 들었다. 서둘러 침실로 걸음을 옮기며 유정은 속상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왜 정신 못 차리고 맞고 다니나. 유원이처럼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면서. 겉보기와는 다르게 마음이 여리다니까. 할아버지하고 맞섰다고 해서 제대로 눌러준 줄 알았더니 결국 매나 맞고 온 거야.

“옷은 벗고 자야 하지 않아요?”

어느새 옅게 잠이 든 준서의 어깨를 흔들자, 그는 신음을 물며 몸을 일으켰다.

유정이 가져온 물을 마신 후에 그는 다시 침대 위에 몸을 얹었다.

그는 여전히 슈트 차림이었다. 재킷은 벗었으나 넥타이와 셔츠, 바지는 그대로였다.

“약도 발라야 해요. 해열제도 먹어야 하고. 아휴, 왜 이렇게 땀이 나......”

침대에 걸터 앉아 이마의 땀을 닦아 주자 준서는 기분이 조금 좋아진 듯이 입에 호선을 그렸다.

묘한 느낌이었다. 꼭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은. 부산스러운 그녀의 움직임이 그에게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왜 맞고 그래요? 다 컸는데. 손 대지 말라고 그러지 그랬어요.”

“제가 때려달라고 했습니다.”

준서는 그렇게 말하며 유정의 손길에 이마를 맡긴 채 몸을 옆으로 했다.

“왜요?”

“안 그러면 제가 흔들릴 것 같아서요. 할아버지는 제 우상이셨거든요. 그런 분에게서 돌아서려니 저도 보통 결심으로는 안되어서......”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꼭 이렇게 몸 상해 가면서 해야 하는 거냐구요.”

“지금, 저 걱정해 주는 겁니까?”

준서가 그렇게 물으며 유정을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그럼 걱정이 안 되겠어요?”

팩 쏘아붙이니 갑자기 왈칵 눈물이 터졌다. 준서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울어요?”

“왜 걱정을 시켜요? 좋아한다고 갑자기 고백이나 하고. 그래서 외면할 수도 없게 만들고!”

“허, 참. 울지 마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아픈 건 쉬면 나을 거고, 다행히 휴일이니까.”

“안 되겠어요. 상처 좀 봐요.”

눈물을 닦아낸 유정이 말하자 준서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니까요. 유정 씨는 내일 수업 준비는 다 했어요?”

아픈 곳을 찔린 것처럼 유정의 입이 다물렸다.

“저 수업에 민감한 거 아시죠? 전 괜찮으니까 돌아가서 이제 수업 준비 하세요.”

“어차피 내일 새 진도 나가는 반 우리 반 밖에 없는데, 우리 반 수업 안할 거예요.”

“그럼 뭘 하시게요?”

“이야기 하려고요. 이제까지 제가 좀 헤맸잖아요. 민종훈이 사건도 있었고. 여러 가지로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아서 같이 학생들하고 이야기 해보려고 해요.”

준서의 눈이 묵묵히 빛났다. 그가 손을 뻗어 유정의 손을 잡았다.

“역시 멋진 서유정 선생님.”

“뭐예요, 이 반응은?”

“응원이죠. 잘할 수 있을 겁니다. 대신에 하나만 명심하세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학생들이 한 이야기대로 따르는 건 분명히 달라요. 되도록 많이 들어주되 원칙을 가져야 합니다. 안 그러면 오히려 몇몇 학생들에게 휘둘릴 수 있어요.”

유정에게는 아직 어려운 말이기만 했다.

“원칙이 뭐죠?”

“서유정 선생님이 꼭 지켜야 할 가치 같은 거죠. 예를 들면 학생들을 차별 없이 대하고 학생들 역시 서로를 차별 없이 대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 그리고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도요.”

준서의 눈에서 물기 어린 빛이 반짝거렸다. 아픈 중에도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힘이 나는 듯했다.

“학생들은 의외로 현명하기도 하고 아둔하기도 해요. 좋은 교사는 학생들이 자유로움을 느끼면서도 안정감을 느끼도록 해주죠.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시되 분명한 원칙 또한 알려주세요. 그리고 그 원칙이 모두에게 필요한 이유도 알려주시고요.”

유정은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어제 고민했던 것이 떠올랐다. 준서와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말을 꺼내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저 실은......”

“네.”

“공부해 보고 싶어요.”

준서는 호기심이 어린 눈을 깜박거렸다.

“무슨 공부요? 전공이요?”

“아니, 그게 아니라......”

가볍게 입술을 물었다가 놓은 유정은, 그 사이 다시 솟기 시작한 준서의 땀을 닦아주며 말을 이었다.

“제가 교육에 대한 작은 주제 하나 하나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걸 알았거든요. 교장 선생님 말씀하신 그 원칙이랄까, 소신 같은 걸 가지고 가려면 제가 우선 논리가 바로 서고 제 입장이 확고해져야 할 것 같아요. 그것도 없이 고집을 부리니까 금세 밑천이 드러나더라고요.”

준서는 말없이 웃었다. 역시 자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유정은 좋은 선생님이 될 거다. 다른 누구를 따르는 교사가 아니라, 자기만의 소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그리고 학생들 또한 그렇게 자기만의 생각들로 빛나게 해주는.

“그래서 공부해 보고 싶어요. 어제 잠깐 찾아봤는데,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도 많은 책이 있더라고요. 같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교육에 대한 고민들을 나누고 싶어요.”

“같이 할까요?”

준서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유정의 눈이 마주 웃었다.

“실은 이 생각을 했을 때, 교장 선생님이 제일 먼저 생각났어요.”

“그런데 우리 둘만 말고, 좀 더 끌어들이죠. 윤상우 선생님 소식은 아세요?”

“윤상우 선생님이요? 요즘 바빠서 말할 시간도 없네요.”

“요즘 굉장히 힘들어하고 있거든요. 그럴 때에는 같이 힘들어하는 선생님들이 힘이 되어 줄 수 있죠.”

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들 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은 무언가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같이 어려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다. 유정도 이제까지의 교육 경험을 통해, 최근에는 준서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책을 읽는 것도 좋고, 교사들이 같이 마음을 모아서 각자가 생각하는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모이면 학생 뒷담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죠.”

“저 뒷담화 안하거든요!”

“제 얘깁니다. 너무 발끈하지 마시고요.”

준서는 빙긋 웃다가 기운이 다한 듯이 희미하게 눈을 떴다.

“졸리네요.”

“옷 벗고 주무셔야 해요. 안 그러면 계속 땀이 찰 텐데. 저는 일단 수건 좀 빨아가지고 올게요.”

유정은 수건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물을 축여 돌아오니 준서는 몸을 옆으로 한 채 잠들어 있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고, 망설이다가 넥타이부터 풀고 셔츠의 단추를 조금 열어 주었다.

“에이, 모르겠다.”

유정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옷방으로 갔다. 대충 입고 잘만한 티셔츠와 츄리닝 바지를 챙겼다. 집안 서랍들을 열다가 상비약도 찾아냈다.

“나중에 뭐라고 하면 사과하지 뭐.”

유정은 약과 옷을 챙겨서 다시 준서가 자고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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