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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34화 (34/102)

34. 좋아해요.2017.06.29.

“그럼, 우리 집에 갈까요?”

준서가 옆눈으로 유정을 보았다. 유정의 얼굴이 붉어졌다.

“네?”

“식사는 하셨다고 하고. 카페 같은 곳은 시끄럽지 않습니까. 지금 제 꼴이 좀 우습기도 하고요.”

“어제는 그런 말 하고 오늘은 집에 가자고 하고...... 전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죠?”

유정이 빙글 빙글 웃으며 묻자 준서의 얼굴이 우그러졌다.

“해석 필요 없습니다. 가장 편한 방법을 생각한 것 뿐입니다.”

“가요.”

유정은 대답하고는 차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준서가 당황하고 말았다.

“네? 진짜 가자고요?”

“들어보니까 그게 제일 편한 방법인 거 같아서요. 솔직히 저도 다른 사람 있는데 싫거든요. 조용한 데서 얘기 듣고 싶어요.”

“과감하군요, 생각보다.”

날 남자로 생각하지는 않는 걸까. 준서는 생각하며 차문을 열고 걸음을 옮겨 디뎠다.

그러자 다시금 잊었던 고통이 치받쳐 오르며 입술이 깨물렸다.

“왜 그래요?”

유정은 차에서 나오자 마자 어디가 아픈 듯이 일그러지는 준서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아, 아닙니다. 몸이 좀 좋지 않아서요. 들어오십시오.”

준서는 애써 내색하지 않고 고통을 참으며 천천히 걸어 아파트로 들어갔다. 유정은 고개를 갸웃하고 그를 따라 걸었다.

“와, 이게 교장 선생님 댁이에요? 엄청 좋네요.”

준서의 성격대로 깔끔하게 정리된 집을 보는 유정의 입이 헤 벌어졌다.

“전 유자차요.”

식탁 앞에 앉아, 유정은 손님이 된 듯이 차를 주문했다. 그러나 준서는 냉정한 어투로 말했다.

“유자차 없어요.”

“그래요? 어떻게 유자차가 없지, 이렇게 좋은 집에.”

“없을 수도 있죠. 녹차, 캐모마일, 둥글레차 있어요.”

찬장을 열고 차를 꺼내며 준서가 말했다. 오늘 미혜는 오랜만에 집에 간다고 했었다.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고. 준서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을 둥글게 살아야죠. 둥글레차 주세요.”

유정이 웃지도 않고 말했다. 준서는 둥글레차와 캐모마일을 꺼내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실은 교장 선생님께 궁금한 게 엄청 많은데.”

준서가 마주 앉자, 유정이 가만히 준서를 보면서 장난스럽게 운을 떼었다.

“어제 일은......”

“잠깐.”

유정은 말하려던 준서를 막으려는 듯이 손을 들어 보이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술에 취해서 나도 모르게 한 말이다, 다 거짓말이다, 진심이 아니다,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준서의 미간이 찌뿌려졌다.

“뭡니까, 그게 답일 수도 있어요.”

“답이 아닌 거 아니까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숨기고 감추는 거 별로 좋은 거 아닌 거 같아요. 어제 유원이도, 아 어제 보신 그 동생이요. 남동생. 걔도 내내 부모님한테 숨기다가 어제 죽도록 맞았거든요. 지금 걸음도 못 걷고 침대 신세에요. 수정이가 교장 선생님 약혼녀고, 또 우리 아빠도 교장 선생님 별로 안 좋아하는 등등의 상황들이 있지만 그래도 진심을 얘기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별로 안 좋아합니까?”

유정이 한 말 중에 그 말만 들렸는지, 준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그럼요, 우리 아빠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금수저예요. 빽 믿고 설치는 사람들. 교장 선생님은 그런 사람 아니지만 어제는 딱 그런 사람처럼 대답하셨잖아요.”

준서는 가느다란 한숨을 쉬었다. 가능하다면 어제로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무작정 유정을 찾아갔던 것에서부터. 그런 식으로 함부로 내뱉고 싶었던 진심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빠는 제가 좋다면 허락해 주실 거예요. 어제 유원이도 결국 허락해 주셨거든요. 걔가 등록금 받아서 등록도 안하고 자기 좋아하는 음악하고 다녔는데도요. 그러니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어제 왜 그랬는지, 이제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준서는 유정의 눈을 보았다. 피할 수 없는 맑은 눈이었다. 사랑받고 사랑하며, 자신을 꿈을 향해 올곧게 걸어온 눈, 그래서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걸을 수 있는 힘이 있는 눈.

그 힘 덕분에 준서도 용기를 얻고 윤택에게 어려운 말을 할 수 있었다.

너는 내가 뭘 해도 그렇게 웃으며 받아줄 것 같아서.

“좋아합니다.”

그러니 더 이상 피할 이유는 없었다.

유정은 눈을 깜박거렸다. 진심을 이야기하라고 말을 했으나 막상 들으니 소름이 끼쳤다.

“정......말이요?”

“네. 처음 봤을 때부터, 그 맑은 느낌이 좋았어요. 순수하고 정의로운,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닮은 사람입니다, 유정 씨는.”

유정의 얼굴에서 천천히 미소가 퍼져 나갔다. 꽃처럼 붉어지는 여자의 얼굴을 준서는 잔잔히 웃으며 보고 있었다.

“순수하고 정의롭다고 하니까 부끄럽네요. 정인기 선생님께 그렇게 이용 당했는데......”

“그거야, 오히려 안 그런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요? 부장 선생님이 시키는 데 안 그럴 도리가 없죠. 오히려 마지막에 제 앞에서 당당하게 할 말 한 것이 대단합니다.”

이 사람은 손을 씻어도 내가 하면 대단하다고 할 사람인 건가. 유정은 빙글 빙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니까요. 왜 저를 그렇게 보실까.”

“학급 운영도 남들 하는 대로 따르지 않고 본인 생각 가지고 운영하셨잖아요. 그런 부분들 하나 하나를 저는 말씀드리는 거예요. 처음 만났을 때도, 아무도 시키지 않은 교무실 청소를 혼자 하고 계셨고.”

“그 때 초면에 너무 아는 척하고 무례하게 굴어서 딱 찍힌 줄 알았는데.”

“딱 찍었죠. 곁에 두고 싶은 사람으로.”

“뭐, 뭐야, 왜 이렇게 닭살스러워요? 교장 선생님 너무 하시네.”

유정은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의자를 뒤로 끌었다. 준서는 얼굴을 펴고 하하 웃었다.

나를 이렇게 웃게 하는 사람이라서. 따뜻하게 내 길을 함께 걸어가 줄 것 같은 사람이라서. 준서는 다시 진지한 얼굴을 해 보였다.

“어제 너무 멋없게 고백해서 미안합니다. 어제는 그냥 충동적으로 찾아간 거였어요. 그렇게까지는 안하려고 했는데.”

“어제는 그렇다치고, 그렇게 해놓고 연락 한 통 없는 건 너무한 거 아니예요?”

유정이 샐쭉한 표정으로 말하자 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죠. 실은, 복잡한 문제가 좀 있어서요.”

“무슨 문제예요?”

준서는 묵묵히, 자신의 앞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그러니 술에 취하지도 않았는데 취기처럼 그녀를 안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집에 오는 것이 아니었나.

준서는 유정의 눈을 피한 채로,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오늘 찾아가서 결국 참았던 말을 했다는 것도. 맞았다는 말은 어쩐지 부끄러워 하지 않았지만 그 외의 말들은 대강 요약해서 전해 주었다.

“아......”

고개를 든 곳에 유정의 눈이 젖어 있었다.

유정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준서는 당황한 눈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녀를 보았다.

“뭐 하시는......”

“멋있어서요. 불과 얼마 전에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할아버지가 교장 선생님의 힘이라고. 그래서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다고. 그런 교장 선생님이 이렇게 달라진 모습을 보니까......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어서요.”

준서의 옆에 선 유정이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준서가 픽 웃었다.

“손은 너무 경한데.”

“네?”

준서는 몸을 일으켰다. 다시 고통이 느껴졌으나 애써 표정에 드러내지 않은 채 천천히 팔을 벌려 유정을 안았다.

유정은 당황한 채로 그대로 있었다. 실은 그에게 일어서서 다가간 것은, 그를 안아주고 싶어서였다. 그의 옆에 서고 나서야 어제와 오늘의 고백들이 생각났고, 왠지 그러면 안될 것 같아 손만 슬쩍 잡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준서는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는 듯이 망설임 없이 그녀를 안아 버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소리 없는 감정들이 그녀의 안에서 폭죽처럼 팡팡 터졌다.

“실수하셨어요.”

준서가 유정의 품에서 속삭였다.

“네? 무슨......”

“그 날 말입니다. 저를 안아준 거요. 그 뒤로 자꾸 생각난단 말입니다.”

준서는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내뱉었다.

고향에 온 것 같은 나른함이 몸을 감쌌다. 내내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며, 그녀의 숨결과 온기에 더 깊이 몸을 묻고 싶은 마음이 더해졌다.

“유정아.”

유정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녀의 귀에 속삭여지는 목소리는 음울한 진심을 담고 있었다.

“가끔씩, 이렇게 나 안아줄 수 있어?”

외로웠던 걸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굴 때에는 언제고, 오늘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까.

유정은 말하지 않은 그의 마음까지 읽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럴게요.”

“고마워.”

준서가 포옹을 풀었다. 그리고 잠시 유정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있다가, 고개를 내려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었다.

유정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곧, 그의 뜨거운 혀가 그녀의 몸 안으로 넘어왔다. 자연스럽게 혀가 섞였다. 눅눅한 온기가 온 몸을 감아 흘렀다.

몸을 탐하는 수컷의 냄새가 그녀는 싫지 않았다. 그의 움직임에 반응한 그녀의 몸은 곳곳마다 뜨겁게 피어오르는 듯했다. 비벼지는 살과 설렘들이 붉은 향기를 담고 일렁였다.

준서는 천천히 입을 떼고, 손으로 가만히 유정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의 올곧은 눈에서, 유정은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깊은 마음을 읽었다.

“유정 씨 마음은 듣지 못했는데.”

준서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꼭 말로 들어야 하나요?”

“듣고 싶은데, 난.”

준서의 몸이 뜨겁다고 느끼며 유정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좋아해요,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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