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우리집에 갈까요?2017.06.27.
“니가 학교에서 그 난리를 치면서도 이제까지 문제가 없었던 게 내 보호 때문이라는 거 몰라? 힘이 있어야 네 뜻대로 할 수 있단 말이다.”
윤택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실렸다. 그러나 준서는 오히려 그 말을 비웃듯이 옅게 웃었다.
“그 힘이, 제 뜻을 꺾어갈 겁니다. 그리고 결국은 저 또한 그 힘에 굴복하게 되겠죠. 나날이 커지는 권력에 눈이 어두워 그렇게 될 겁니다.”
“어리석은 녀석!”
윤택이 서안을 내리치며 언성을 높였으나 준서는 미동도 없었다. 윤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준서는,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재단을 키우면서 부정을 행하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준서가 찾아낸 채용 비리는 오히려 작은 축에 속했다. 윤택은 자신의 그런 부정을, 준서의 깨끗함이 말소시켜 주기를 바랐다. 그가 누구보다도 큰 권력을 얻게 되었을 때, 자신의 부정마저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기를 바랐다.
세상은 승자를 기억하고, 승자는 면죄부를 얻기 마련이니까.
“네가, 내가 그토록 아꼈던 네가, 결국 이 할애비의 가슴에 칼을 꽂는다는 게냐? 이제까지의 모든 것은 저버리고 네 마음대로 살겠다는 거야? 이게 네가 말하는 정의냐? 네가 말하는 힘이 이런 불효막심한 거였냐?”
윤택은 마지막 힘을 그러모아 소리쳤다. 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질책에 대해 준서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윤택은 지금까지 준서를 돌보고 키워준 사람이었다. 오히려 준서의 부모보다 그를 더 깊이 알고 생각해주는 이이기도 했다.
그래서 준서는 윤택이 마지막으로 그 카드를 꺼냈을 때 자신이 무너질 것을 알고 있었다. 못이기는 척 도로 윤택의 편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준서는 윤택의 손에 나뭇가지를 내밀었다.
윤택은 얼결에 받은 나뭇가지를 멍한 기분으로 보고 있었다.
처음 나뭇가지를 보았을 때에는 그것을 실제로 사용하라고 내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준서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만 생각 했었다.
“화 풀리실 때까지 치십시오.”
바지를 걷고 선 준서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것이 흔들리는 자신에 대한 대처이자, 윤택의 질책에 대한 대답이었다.
“지금 네가...... 이게 무슨 짓이냐?”
윤택은 몸을 파르르 떨면서 소리쳤다. 준서는 고개를 숙였다. 붉어진 눈으로 바닥을 주시하며, 그는 애써 격정을 다스린 목소리를 냈다.
“제가 비록 이런 선택을 했지만, 할아버지는 영원한 제 할아버지이십니다. 제가 이제껏 힘을 내고 살 수 있게 해주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런 할아버지를 배신하는 것이 저도 괴롭습니다. 저 때문에 화가 나시고 심기가 불편해지신 것도 그렇습니다.”
준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눈을 감고 호흡을 다스렸다.
“잘못했습니다. 아무 것도 고치지도 바꾸지도 못하지만 할아버지께는 그냥 그 말씀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할아버지.”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눈물을 보는 윤택의 눈도 붉어졌다.
준서가 전한 회초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윤택은 회초리를 높이 휘둘러 드러난 준서의 종아리를 내리쳤다.
몸에 회초리가 닿는 순간, 준서는 윽 소리를 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보다 따끔했다.
윤택은 아무 말 없이 팔을 휘둘렀다. 붉게 부풀어 오르는 다리를 보면서도 팔의 힘을 줄이지도 사정을 봐주지도 않았다.
적막한 방 안에 매를 치는 소리와 소리 죽인 신음 소리만 울렸다.
얼마나 맞았을까, 피가 날 정도로 맞은 곳이 새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맷자국이 무수한 곳에 다시 매가 떨어지자, 준서는 더 이상 참기 어려웠는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굽히고 거친 숨을 토했다.
그러면서도 차마 손을 뻗어 맞은 곳을 쓰다듬지 못하고, 준서는 곧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 모양을 본 윤택이 회초리를 내려 놓았다.
“그만 앉거라.”
그제서야 아픔이 느껴지는지 준서는 신음을 참으며 조심스럽게 바지를 내리고 아까처럼 무릎을 꿇었다. 맞은 곳이 눌려지는 순간 준서의 미간이 찌뿌려졌으나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이 입술만 세게 깨물었다.
“내게 죄송해서 맞은 것이냐?”
윤택은 준서를 노려보며 물었다. 준서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네가 내 뜻을 거스르든, 지키든, 너는 내 손자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윤택의 말에 준서가 고개를 들었다. 놀라움이 묻은 얼굴이 벌개져 있었다.
“넌 내 뜻을 거스른다고 하지만 나는 널 거스르지 않을 거다. 앞으로 널 따로 불러서 혼내지는 않겠지만 널 지켜보고 있겠다. 네가 이룬다는 그 뜻이 뭔지, 그 힘이 뭔지 이제는 내가 보겠다.”
준서의 입에서 그제서야 아픔이 섞인 신음이 새어 나갔다.
“네가 얼마나 답답하게 살았을지 나도 안다. 내가 아들을 잘못 키웠어. 그놈은 그저 약한 사람 앞에서 강하게 굴 줄만 알지. 그래서 너에게 더 마음이 갔다. 네가 내게 남은 죄책감이 있다면 오늘의 매질로 나는 다 해결했으니 너도 그만 덜어내라.”
윤택이 말하고는 짙은 한숨을 토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믿었던 손자가 돌아선 것이 그에게도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기회를 주고 마지막 하나만 지켜달라고 했는데도 그는 기어이 돌아서 버렸다. 한 번의 매질로 모든 것을 용서하기에는 그도 마음의 충격이 컸다.
그러나 말한다고 들을 손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편으로 할 수 없다면, 그의 편이 되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준서는 울컥한 감정을 참아내며 윤택을 보았다.
“저는 더 이상 할아버지에게서, 힘을 얻고 싶지 않습니다. 저에게 그저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였으면 좋겠습니다.”
끝까지 고집을 세우는 준서를 노려보던 윤택이, 회초리를 들어 그의 팔을 내리쳤다.
“못난 놈, 알았다, 알았어. 그래,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지켜볼 테니까, 네 마음대로 해라.”
준서는 맞은 곳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과는 그만 해라. 그리고 파혼은...... 집안끼리 한 약속이니 집안끼리 정리해야 겠지. 내가 그 집안 어른과 이야기를 할 테니, 너는 약혼녀나 충격 받지 않게 잘 조치하거라.”
준서가 참았던 눈물을 쏟으며 고개를 숙였다. 깔끔하게 끝내고 나오려고 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덜어내려고 했던 죄책감은 오히려 더해지고 말았다.
고개를 든 곳에 윤택은 허탈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아직도 많이 아파?”
“아, 나가라고, 좀!”
하루 종일 엎드려 있는 유원에게, 유정은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어제 얼마나 심하게 매타작을 당했는지 유원은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그래도 드디어 밴드 활동을 허락 받았다고 그는 아픈 와중에도 싱글거렸다.
유정은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꼭 그렇지만은 않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유원은 이렇게 몸으로 때워서라도 원하는 것을 얻어낸 것을 좋아하고 있으니까.
“아, 좀 보자니까? 피멍 들었어?”
“손 떼라, 좋은 말 할 때.”
“약은 발랐고?”
“아휴, 진짜. 나가, 나가라고!”
유원이 베개를 던지자 유정은 가볍게 베개를 받고는 흣 웃었다.
“고맙지, 그래도? 내가 말 잘해줬지?”
“해결은 잘 됐지만 앞으로 그러지 마. 누나도 이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앞으로 또 사고 치려고? 아휴 그 땐 내가 먼저 일러 바칠 거야. 나도 이런 꼴 다신 보고 싶지 않거든.”
유정은 장난스럽게 말하고 유원의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여하간 축하한다, 이제 당당하게 활동할 수 있게 됐네.”
“참, 그 새...... 아니 그 남자는 어떻게 됐어?”
유원의 질문에 유정은 애써 눌러두었던 감정이 다시 살아오는 것을 느꼈다.
어제 이후로 일부러 생각하지 않았었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키스한 거였어? 내가 실수한 거야?”
유원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러나 유정의 얼굴은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아, 뭐, 아냐, 신경쓰지 마.”
“아니면 당한 거야? 난 딱 당한 걸로 봤었는데. 누나 표정이 완전 아니었다고.”
“신경쓰지 말라고.”
유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신경은 유정이 더 쓰는 눈치라, 유원은 말없이 그녀를 살폈다.
“그런데 그 놈 말이야.”
“함부로 이 놈 저 놈 하지 마.”
“누나 많이 좋아하는 거 같던데?”
싱글거리며 말하는 모양에 유정은 기어이 베개로 유원의 등을 내리치고 말았다. 아니 등을 내리친다고 생각했는데 베개는 그의 엉덩이를 맞고 튀어 올랐다.
유원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유정을 노려 보았다.
“무슨 짓이야! 아파 죽겠잖아!”
“내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아. 입 다물어.”
“아휴, 남자로서의 솔직한 감상을 얘기해도 그러냐. 남자는 남자가 알아본다고. 얘기 좀 하고 싶었는데 아버지 때문에......”
“간다.”
유정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준서에게서는 어제부터 오늘까지 아무 연락이 없었다.
원래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런 일이 있었는데 연락이 없는 것은 너무했다.
유정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가 떼고, 아무도 없는 방을 빙글 빙글 돌다가 침대에 누웠다가 책을 펼쳤다가 다시 일어나 버렸다.
“아니, 내가 왜 이래야 해?”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했다. 폭탄은 그가 터뜨리고 왜 마음 고생은 내가 해야 하는가.
망설이다 전화를 했다.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여러 번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나 나갔다 올게요.”
유정은 결국 나갈 준비를 했다. 가서 물어봐야 겠다. 대체 왜 그랬는지, 더군다나 내가 수정의 친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야 했는지.
도저히 내일 아무렇지도 않게 학교에서 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준서는 주차를 하고 가만히 시트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맞을 때에는 몰랐는데, 지금은 다리가 건드릴 수도 없게 아팠다. 그러나 어쩐지 달콤한 아픔이었다. 윤택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자신은 마지막 부탁까지 저버렸는데도, 윤택은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수학의 계산식처럼 딱딱 떨어지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이 아니면 저것인 그런 곳이 세상이라면.
아니 그러지 않아서 오히려 아름다운 걸까.
준서는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 상태에서 먼 눈으로 자신 쪽으로 오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닮았네. 다람쥐. 어제 기습적으로 고백을 해 버린 여자.
내가 좋아한다고 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준서는 점차 가까워지는 여자를 보았다. 그의 미간이 모아졌다. 단순히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닮은 정도가 아니었다.
여자는 곧은 걸음으로 그에게 오고 있었다.
“뭐하세요? 얼굴은 왜 그래요?”
유정은 멍한 얼굴로 차 안에 앉아 있는 준서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 얼굴은 잔뜩 붉어져 있었고, 심지어 눈은 퉁퉁 부어 있기까지 했다.
준서가 놀란 듯이 얼굴을 가리고 무심결에 내렸던 차창을 올렸다.
“다 봤는데.”
유정이 말하자 준서가 입술을 으득 깨물며 닫으려던 차창을 그대로 하고 유정을 노려 보았다.
“이럴 땐 혼자 두는 게 예의 아닙니까?”
“저도 그런 예의를 모르는 건 아닌데, 어제 폭탄 선언을 하고 나서 아무 연락도 없는 분이 예의 따지니까 저도 황당하네요.”
유정의 목소리가 청량했다. 준서는 어쩔 수 없이 차의 잠금을 해제했다.
“타세요.”
유정은 준서의 옆자리에 올라 탔다.
“오늘은 무슨 사정인지 안 물을게요. 궁금해 죽겠지만 그보다는 더 궁금한 게 있거든요.”
“밥 먹으러 갈까요?”
“저는 먹고 왔어요. 교장 선생님은 안 드셨어요?”
“그럼, 우리 집에 갈까요?”
준서가 옆눈으로 유정을 보았다. 유정의 얼굴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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