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다 버리겠다는 거냐?2017.06.26.
“말해보라고. 그래, 대체 무슨 대단한 사정이 있었는지, 그래서 우리 싹 속이고 이딴 짓을 벌였는지 얘기해 봐.”
누그러든 태도에 유정은 오히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였으나 현실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동생을 보호해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진구는 한 번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혜신조차도 진구가 화를 내면 일단 물러나고는 했었다. 특히 아들인 유원에게는 많이 엄한 편이었다.
그런데 유정이 겁도 없이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거짓말처럼 통한 것이었다.
“저...... 실은 제가 군대 다녀오고 나서, 저하고 같이 밴드 했던 녀석들이 같이 하자고 했어요. 저는 복학할 생각이었는데...... 그 동안 제가 빠진 채로 활동하던 밴드가 상도 받고...... 인디 밴드로서는 꽤 선전하고 있었더라고요.”
유원은 우물대다가 사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진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유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활동하다 복학하려고 했어요. 등록금도 제가 벌어서 다 갚으려고 했고요. 그런데 끊을 수가 없어가지고...... 정말 죄송합니다, 아버지.”
유원은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에 발끈했던 것과는 다르게, 지금은 풀이 죽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정은 새삼 말을 들어준다는 것의 신비를 생각했다. 일단 들어준다고 하니 유원도 더 이상 흥분하며 소리칠 이유가 없었다.
유원의 태도에 진구도 아까처럼 막무가내로 손부터 휘두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화는 가라앉지 않은 모양으로 몸을 가볍게 떨고 있었다.
“그렇다고, 부모를 속여? 그 돈을 나하고 네 엄마가 어떻게 마련한 건줄 알아? 먹을 것 입을 것 참고 모은 돈이야. 네 엄마, 몇 년 전부터 옷이며 신발이며 전혀 안 사고 유정이 결혼 자금하고 네 등록금 모은다고 하고 있고. 나도 최대한 쓸 것 자제하면서 저축하고 있어. 그런데 그 돈을 네 마음대로 그렇게 써도 되는 거냐?”
“죄송합니다.”
유원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진구는 그런 유원을 노려보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유정은 어쩌면 잘 풀릴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진구를 바라 보았다.
“유정이 너는 그만 나가 보거라.”
그러나 진구는 그렇게만 말할 뿐, 유원을 여전히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 아빠, 유원이는요?”
유정이 일어서며 물었다. 그러자 진구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나가서 빗자루 좀 가져와.”
“네?”
유정은 갑자기 청소할 일이 있나 생각하며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물었다. 그러나 유원은 눈치를 챈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빗자루는 왜......”
유원이 천천히 두 팔을 짚고 엎드렸다. 그제서야 빗자루의 새로운 용도를 눈치 챈 유정은 아연한 기분으로 소리쳤다.
“때리시려고요? 아빠, 얘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몇 살이면? 내 아들 아니냐? 더군다나 거짓말까지 하고. 당장 가져와.”
진구는 타협이 없는 얼굴로 냉정하게 말했다. 유원이 매를 맞았던 것은 고등학교 때 백일주를 마시고 열두시가 넘어 귀가했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대학을 가서는 술을 마시고 늦게 집에 와도 진구는 말로 야단을 칠 뿐 매를 들진 않았었다.
“아빠, 지금 학교에서도 체벌 금지거든요? 이건 전혀 교육적이지도 않고......”
“누나, 빨리 가져와.”
유원이 엎드린 상태에서 고개를 돌렸다. 유정은 난감한 표정으로 유원과 진구를 번갈아 보았다.
“밤새 저렇게 둘 작정이냐? 자기 잘못한 값은 해야지. 얼른 가져와라.”
“꼭 이 방법 밖에 없는 거예요?”
“왜 이 방법은 안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진구는 엄한 표정으로 유정을 보았다.
“그야......”
“우리 땐 매 안 드는 건 애정이 없는 거라고 했어. 나도 장가가기 전까지는 집에서 맞고 컸다. 넌 알아서 잘해서 매를 덜 대고 키웠지만 이 녀석은 아니야. 얼른 가져와.”
유정은 고집스러운 진구의 얼굴을 보다가 어쩔 수 없이 방을 나왔다.
체벌은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왜 안 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말이 없었다. 다 컸다는 말과 교육적이지 않다는 말은 유정이 생각해도 논리가 없었다.
나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도 명확한 내 입장이 없구나.
이러니 학생들에게 휘둘리는 게 아닌가. 단순히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덤벼서 민종훈에게도 그렇게 당한 것이 아닌가.
열정만 있지 생각이 없었던 거야. 그래서 나 역시 쓸데 없는 고집을 부리면서 성헌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데 민종훈에게 끝까지 끌려다녔던 거야.
“안 가져오고 뭐하냐?”
멍하니 서 있는 유정에게, 진구가 문을 열고 물었다. 유정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청소함에서 나무로 된 빗자루 하나를 꺼내 진구에게 전해주고 문을 닫아 버렸다.
곧 문 안에서는 살과 단단한 것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소리 죽인 신음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저건 아니야, 저건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라고.
마음 속의 외침을 유정은 설명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씁쓸하고 복잡한 마음으로, 그녀는 방에 들어와 음악을 크게 틀고 이불 속에 몸을 묻어 버렸다.
주차를 마친 준서는 가느다란 한숨을 쉬었다. 어제 결정한 직후에는 잠깐 마음이 가벼워졌으나, 금세 전보다 더 무거운 마음이 바위처럼 온 몸을 짓눌렀다.
그가 의지했던 유일한 사람을 배신하는 것.
그것은 그의 존재를 뜯어내는 것만큼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이제 그 자신으로 살아야 했다. 그가 처음에 결심했던 것을 버리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차에서 내려서서 물끄러미 윤택이 사는 고택을 올려다보던 준서는, 고개를 내리고 마당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 몇 개를 주웠다.
나뭇잎을 떼고 대충 정리를 마친 나뭇가지를 들고, 준서는 천천히 고택 안으로 들어섰다.
준서가 올 줄 몰랐던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허둥지둥 서둘렀다. 곧 개량한복을 입은 윤택이 미간을 모으며 거실로 나왔다.
“뭐하는 게냐? 이제는 네 멋대로 연락 끊고, 네 멋대로 집에 발을 들이겠다는 거냐?”
준서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윤택의 호통을 듣기만 했다.
“계속 봐주고 어르는 것도 한계가 있어. 이런 식이라면 때려 쳐라. 다 그만 두고 네 하고 싶은 대로 살아.”
“할아버지.”
그렇게 말은 해도, 윤택이 결코 준서를 보내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준서도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그와 관련된 말씀 드리려고 찾아 뵈었습니다. 안에 들어가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정중했으나 어딘가 가시를 숨긴 것 같은 태도에, 윤택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
윤택의 눈이 그제서야 준서가 들고 있는 나뭇가지를 보았다.
“그건 뭐냐?”
“혹시 필요할까 해서 가져왔습니다.”
눈치가 빠른 윤택이었다. 그의 몸이 이전과는 다른 감정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게야?”
준서는 말없이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윤택은 매섭게 몸을 돌렸다.
“들어오거라.”
준서는 아무 말 없이 무릎부터 꿇었다.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은 표정이 없었다.
“네가, 오늘 단단히 혼나러 온 게구나.”
윤택은 준서가 옆에 내려놓는 나뭇가지를 보고 말했다.
“그 뜻은, 이제는 내 뜻을 따를 수 없다는 뜻이겠지.”
“죄송합니다.”
“왜 그러는 거냐? 내가 다른 건 다 네 마음대로 하라고 했잖아. 그런데 그 마지막 것마저 너는 네 마음대로 기어이 해야 한다는 거냐?”
윤택은 곰방대를 꺼냈다. 입에 물었다 놓기를 반복하다가 옆에 소리나게 내려놓고는 준서를 노려 보았다.
그러나 준서는 여전히 깊게 가라앉아 있는 듯이 고요했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일을 하십시오. 저는 제 일을 할 겁니다.”
“뭐라고?”
“할아버지께서 저를 쫓아내시면 저는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곳에 있는 한은, 저는 제 뜻을 버리지 못합니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그 마지막 것, 정인기 선생님에 대해서도 저는 같은 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준서는 고개를 들었다. 그 눈이 아까와 달리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윤택은 눈쌀을 찌뿌렸다.
“네 뜻이라는 게 뭐냐? 너는 대체 지도자라는 게, 리더라는 게 뭐라고 생각하는 게야?”
“리더는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입니다. 학교가 나아갈 방향이 어딘지를 제시하고 구성원들에게 꿈을 꿀 수 있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아니다, 리더는 그런 게 아니야.”
윤택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손이 몇 번을 서안을 쥐었다 놓았다. 그가 느끼는 안타까움을 보여주듯이, 그의 손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떨고 있었다.
“결국 학교도 사람이 있는 곳이고 사람과 사람이 관계하는 곳이다. 많은 갈등이 있는 곳이고 싸움이 일어나는 곳이지. 리더는, 바로 그런 갈등을 중재하고 통합하는 사람이다. 학교에는 정인기도 있고 하준서도 있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공간에 있단 말이다. 그런데 무조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억압한다면 그게 뭐 사람 사는 사회겠느냐?”
“하지만 원칙은 지켜져야 합니다.”
준서는 조금도 흔들림 없는 태도로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했다.
“중재하고 통합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그 원칙에 어긋나게 행동하고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다면, 그걸 정리하는 것도 리더의 일입니다.”
“그 원칙이라는 게 뭐야?”
윤택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결국 그냥 네 고집이지 않아?”
“자기 멋대로 수업을 만들어서 신청도 안한 학생들 끌어들였어요. 그걸 바로 잡는 게 제 고집입니까?”
준서의 눈이 윤택을 잡아 죽일 듯이 형형하게 빛났다.
“더 이상, 할아버지께 실망하고 싶지 않습니다. 할아버지는, 제 우상이었어요. 제 꿈이기도 했고요. 저를 잡아주신 유일한 분이었습니다.”
준서는 붉어진 눈을 깜박거렸다. 그의 입에서 탄식 같은 한숨이 흘러 나왔다. 윤택의 얼굴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정인기와 함께 지내는 것도 실력이야. 고집만 부리지 말라는 거다. 원칙이니 뜻이니 이런 거, 결국 너를 좀먹는다는 걸 왜 몰라?”
윤택은 가볍게 혀를 차며 곰방대로 바닥을 탁탁 두들겼다. 준서는 고개를 숙였다. 격해진 호흡을 집어 삼키며, 그는 물끄러미 곰방대만 보고 있었다.
“지금은 이해가 안 가도 나중에 시간이 가면 이해가 될......”
“정인기 할아버지께서, 할아버지를 키워주셨다면서요.”
준서의 입에서 참았던 말이 토해졌다. 윤택의 미간이 좁아졌다.
“뭐?”
“정인기의 집은 예전에 대지주였고, 할아버지는 그 집 마름의 아들이었고요. 젊고 일도 잘한다고 키워 주시고 학교도 보내 주시고. 그런데 그 집이 거꾸로 망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또 어디서 듣고......”
“은혜를 갚는 것과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건 다르지 않습니까? 정인기에게 그렇게 은혜를 갚고 싶으시면 차라리 재산을 주시지...... 왜 여러 사람 피해 보게 하십니까?”
윤택의 얼굴이 붉어졌다. 실력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아들 어떻게 좀 해 달라고 사정을 하는 통에, 겨우 대학 졸업장과 교사 자격증만 받게 한 후에 학교에 집어 넣어 준 것이 오래 전이었다.
“왜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을 들고 날 공격하는 게냐?”
준서는 파르르 떨리는 윤택의 얼굴을 마주하고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의 우상이 무너지는 모습은 그의 심장을 조각내는 것처럼 아팠다.
“다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퇴직하신 김유종 선생님께도 말씀을 들었고요.”
준서는 일부러 교감에게 들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면 아직 자리에 있는 그가 윤택의 공격을 당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자초지종을 들은 후에 당시 근무했던 다른 선생님들에게 전화를 해서 사실 확인을 했다. 김유종은 멀쩡히 근무하다가 정인기 때문에 퇴직을 해야 했던 교사였다.
“김유종...... 하...... 그 놈이 너한테 말했단 말이지.”
윤택이 주먹을 쥐었다 놓았다 하다가 그 주먹으로 앞에 놓인 서안을 쾅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교과서 보듯이 그렇게 세상을 보지 마라. 그 당시는 다 그랬어. 나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깨끗한 편이었다. 돈을 받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잘못을 시인했다면, 윤택은 남과 다르다는 생각 정도는 남겨둘 수 있었을까.
“결국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을 거야. 정인기를 만만하게 보지 마라. 정인기하고 적이 되어서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적이 되어보지 않고 그것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준서는 슬픈 눈으로 윤택을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던 힘...... 그 힘의 원천은 두려움입니다. 그 힘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안될 것 같음 마음...... 그 두려움으로 사람은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겁니다. 하지만 두려움은, 아무 것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다시 고개를 든 준서의 눈에 눈물을 닮은 빛이 어렸다.
“그 두려움에 맞설 때 생기는 것이 진정한 힘입니다. 그것이 제가 꿈꾸는 힘이고요. 저와 할아버지의 길은 다릅니다. 할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저를 응원하고 지켜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저는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깊이 고개를 숙이는 준서를 윤택은 막막한 기분으로 보고 있었다.
“파혼...... 진행하겠습니다. 애초에 약혼부터가 저 스스로 한 것이 아니었고, 결국 할아버지도 제게 더 힘을 주시고자 맺어주신 약혼이니까요.”
그런 힘은 이제 필요하지 않았다. 준서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자신으로서의 삶이었다.
“너, 지금 뭐라는 거냐? 파혼?”
윤택은 예상치 못했던 말에 아찔함을 느끼며 준서를 노려 보았다.
“이제까지 내가 준 모든 걸 다 버리겠다는 거냐?”
준서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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