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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31화 (31/102)

31. 얘기해 봐.2017.06.25.

“제가 좋아합니다.”

유정의 시선이 준서를 향했다.

“제가 유정 씨...... 좋아합니다.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찾아오면 안되는 거 알면서도......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행동하지 않겠습니다.”

준서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유정은 멍한 기분으로 눈만 깜박였다. 진짜 단단히 취한 건가.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는 아는 걸까.

“너, 그 학교 당장 그만둬라.”

그러나 진구는 여전히 그가 취한 채로 좋아하는 여자 찾아와서 진상을 부리는 사람으로 알았는지 유정을 돌아보며 야멸차게 말했다.

“아빠.”

“이런 새끼가 교장으로 있는 데라니 빤하잖아. 그만 둬. 너 정도 실력이면 받아주는 데도 많을 거다. 들어가자.”

“나는 얘기 좀 하고......”

유정이 진구에게서 팔을 빼고 준서에게로 가려고 하는데, 진구의 손이 유정의 팔을 잡았다.

“무슨 얘기를? 나중에 술 깨고 나서 얘기하든가 해.”

“들어가요.”

준서가 유정을 보고 말했다.

유정이 고개를 젓고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던 순간, 그가 조금 전에 한 말이 머릿 속에 떠올랐다.

‘제가 좋아합니다.’

유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면서 그녀의 입술이 도로 닫혔다.

“월요일에 봅시다.”

준서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평소의 단단해 보이는 몸짓이 아닌,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모양새였다.

결국 유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가 몸을 돌려 돌아가는 모양만 먼 눈으로 좇아야 했다.

“남자 친구냐?”

진구가 물었을 때에야 유정은 고개를 들었다.

“네?”

“무슨 관계냐고. 아니면 저놈 혼자 따라다니는 거야?”

“그게......”

유정은 뒷머리를 긁었다. 그러자 조금 전에 그 강렬했던 키스가 떠올랐다.

“이제야 마음은 알게 된 관계......인 것 같아요.”

“뭐?”

진구의 미간이 우그러졌다.

“너도 저놈 좋아한다는 거야?”

“아빠는 좀, 보는 것만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요. 얼마나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인데. 오늘 무슨 일이 있는지 꼭 들었어야 했는데.”

유정은 태도를 바꿔서 진구를 노려 보았다. 그러자 준서 앞에서는 호랑이 눈을 뜨던 진구가 눈을 내려뜨며 고개를 돌렸다.

“그야, 나는 또 어떤 놈팽이가 너 건드리나 하고.”

“막 건드려지지 않거든요, 저!”

“그러면 말이야, 아니면 아니라고 말을 해야지 그냥 저러고 가? 아니야, 저 놈은. 패기가 없잖아, 패기가.”

“평소에는 패기가 넘쳐 흘러서 부담스러울 지경이에요. 오늘은 무슨 일이 있다니까요. 아빠 때문에 못 들었잖아요.”

진구는 입을 다물었다. 입을 삐쭉하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아빠.”

“너, 겨우 저런 놈팽이 때문에 아빠 야단치는 거냐?”

“아빠, 그게 아니라......”

“너 어렸을 때 아빠랑 결혼한다고 울던 거 기억 나냐?”

벌써 수 백 번 수 천 번은 들었던 레파토리였다. 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나 아빠 지금도 좋아해요.”

“아냐, 너는 지금 저 놈팽이에 빠져 있어. 할아버지 빽만 믿고 있는 실력도 없는 놈한테......”

“실력 있어요.”

“그것 봐라, 아빠를 버리고 네가......”

“아휴우, 그만 좀 해요!”

유정이 가볍게 진구의 팔을 때리자 진구가 웃으며 그런 유정의 어깨를 끌어 안았다.

“너 아무 놈팽이한테나 못 보낸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저놈 점수 따려면 언제 제대로 와서 인사하라고 해. 난 저놈 마음에 안 들어.”

“지금까지 마음도 몰랐다니까 무슨 점수를 따...... 그리고......”

유정은 입을 다물었다. 잊고 있던 현실이 떠올랐다. 그는 수정의 약혼자였다.

“그리고 뭐?”

“아니에요. 참, 유원이 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요. 응?”

유원의 이야기가 나오자 진구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유정은 가느다란 한숨을 쉬었다.

준서는 넥타이를 거칠게 벗어서 던져 버렸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아직도 얼얼한 한쪽 뺨을 어루만지며, 차라리 더 때려달라고 했어야 했나를 생각했다.

석훈과 헤어지고 나서 아무 술집이나 들어가서 혼자 술을 마셨다. 그냥은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존경할 수 있는 어른이 없었다. 아버지는 싫었고, 어머니는 부담스러웠다. 믿고 의지할 만한 어른이 필요했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믿었다. 그에게 윤택은 하나 뿐인 든든한 기둥이었다.

그런 윤택이, 인간 말종이라고까지 생각하는 정인기의 후원자였다니.

믿었던 것이 무너지면서, 준서는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어 버렸다. 직업과 결혼이라는 중요한 선택까지 내어주며 윤택을 따른 생을 이제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막막한 기분 속에 그녀가 떠올랐다.

자신을 안고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힘을 주었던 여자.

어쩌면 그 순간부터였는지도 몰랐다. 그의 우주가 달라진 것은. 그 전에도 윤택이 신영 고등학교 비리를 눈감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준서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준서는 모른척을 했다. 그 믿음마저 무너지면 자신의 생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가 그를 안아주고 힘을 북돋아 준 순간, 그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 기사에게 가려던 곳을 고쳐서 알려주었다.

그냥 집만 보고 오자고 생각했다. 그녀의 집에 불이 켜진 것만 보아도 지금은 힘이 생길 것 같았다.

그런데 홀로 서 있는 여자를 보았고, 다가갔고, 돌에 맞을 뻔했다.

말을 섞었고 안았고 입을 맞췄다.

남동생으로 보이는 남자와 그녀의 아버지까지 만났다. 그녀의 아버지가 처음 보는 그를 질책하자,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들어야 할 꾸중을 듣는 것 같았고 이제야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을 만난 것 같았다.

그래서 가지고만 있던 속 이야기를 해 버렸다.

그녀도 듣는 앞에서.

뱉어버리자 시원하긴 했으나, 뒷수습이 곤란했다. 그녀는 예상대로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앞으로 그녀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양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가 뗀 준서는, 허물처럼 옷을 하나 하나 벗으면서 욕실로 걸어갔다. 어쩐지 흐트러지고 싶은 날이었다. 완전히 알몸이 되었을 때, 그는 욕실 앞에 서 있었다.

욕실로 들어가 불을 켜고 거울 너머의 자신을 바라 보았다.

이것이 나의 몸, 꾸미지 않은 나 자신.

누구의 손자도, 아들도, 어떤 지위도 가지지 않은 나, 나는 어떤 사람일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진짜 나 자신을 만날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준서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내 고민했던 문제를 정리하자, 그녀와의 문제도 쉽게 풀렸다.

그의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가 새어 나갔다. 진작에 선택했어야 했던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직 늦진 않았어.

피로에 젖어 있던 얼굴이 점차 짙은 확신으로 빛났다. 평소의 단정하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돌아온 그는 샤워실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유원은 거실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혜신은 진구가 오자마자 그의 팔을 붙들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아까부터 저런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어요.”

“방금 들어왔는데 뭐.”

혜신의 말을 무정하게 자르고 진구는 유원을 흘끔 보고는 서재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들어와.”

몸을 일으킨 유원이 다리가 저리는지 비틀거리며 서재로 걸어갔다. 유정은 그런 유원을 조용히 따랐다.

“유정이는 나가.”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아는지, 진구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아빠.”

“나가 있어. 아빠 유원이랑 얘기 좀 해야 하니까.”

“얘기만 해요, 응?”

유정은 간절한 눈으로 말한 후에 싱긋 웃어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진구는 웃지 않았다.

유원은 거실에서 그렇게 했듯이 서재에서도 무릎을 꿇었다.

그런 유원을 진구가 묵묵히 내려다 보았다.

“니가 이러는 거 보니까, 학교 안간 게 사실인 모양이지?”

“드릴 말씀 없어요.”

“등록금은?”

유정은 문 곁에 서서 귀를 쫑긋 세웠다. 무언가 자신의 몸 위로 덮는 것 같아서 옆을 보니 혜신이 서 있었다.

방 안에서는 대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썼......어요.”

“어디?”

“악기 사는 데요.”

짝.

유정이 눈을 질끈 감았다. 시작이었다.

방문 너머로 들리는, 살과 살이 닿는 마찰음이 소름이 끼쳤다.

“그걸 말이라고 해!”

진구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주먹으로 방문을 두들기려는 것을 혜신이 말렸다.

“조금 있어봐라.”

“엄마, 유원이 쟤 맞아 죽어요.”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잖니.”

유정은 망설이며 손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유원은 맞은 뺨을 어루만지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진구는 부어오르는 유원의 뺨을 안쓰럽게 보면서도 분노로 떨리는 몸을 어쩌지 못했다.

“네가, 나를 속이고, 지금껏 학교 잘 다니는 행세를 했단 말이지, 응? 악기를 샀다고? 그 빌어먹을 음악을 또 시작했다는 거냐?”

“빌어먹을 음악 아닙니다.”

유원은 단단히 작심한 듯이 짭짤하게 입 안에 번지는 피맛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제 인생입니다.”

“뭐, 이 자식아!”

“아빠아!”

진구가 다시 손을 치켜들었을 때 유정이 정신 없이 문을 두들겼다. 진구는 입술을 깨물며 방문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조용히 해!”

“아빠, 진짜 문 안 열면 아빠 용서 안해요!”

다시 유원에게 고개를 돌리는 진구의 귀에 유정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진구는 가느다란 한숨을 쉬었다.

문을 열자 유정이 나는 듯이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맞아서 부어오른 유원의 얼굴을 보고는 인상을 찌뿌린 채로 진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빠, 진짜......”

“너는, 그럼 참을 수 있겠어? 등록금을 다 썼다는데, 그 빌어먹을 음악에......”

“아빠가 한 번도 허락해주지 않았잖아요.”

유정은 당돌하게 말하며 유원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유원이 그런 유정을 노려보았다.

“뭐야, 왜 이래.”

유정은 유원을 무시한 채,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진구의 미간이 좁아졌다.

“유원이 음악에 재능 있는 거 어렸을 때부터 다들 알았잖아요. 못 다루는 악기가 없고 노래도 잘하고. 그런데 아빠가 고집 부려서 관심도 없는 경영학과 들어갔어요. 그래서 군대 가기 전까지 다녔으면 되는 거잖아요. 그만큼 해서 아닌 거면 이제는 허락해 주셔야 되는 거 아니예요? 오죽하면 이런 선택을 했겠어요?”

“서유정, 너......”

진구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제까지 대든 적은 커녕 늘 예쁘게만 자라왔던 딸이었다. 비록 아기 때에 입양하긴 했으나 진구에게는 친딸이나 다름 없는 딸이었고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딸이었다.

그런 딸이 눈 앞에서 그에게 반격을 하니 눈 앞이 캄캄해졌다. 배신감에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너 지금 아빠한테......”

“유원이 제 동생이예요. 그리고 제가 계속 봐온 애에요. 장난 좋아해도 엇나가는 애는 아니었어요. 도리 지키고 부모님께도 깍듯했잖아요. 그런 애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한 번만 헤아려 주세요.”

유정의 목소리가 파들 파들 떨리고 있었다. 진구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피곤이 어린 표정이 복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래서 넌, 거짓말하고 등록금 빼돌린 걸 그냥 용서하고 없던 일로 하라는 거냐? 이 모든 게 내 잘못이라는 거야?”

진구의 얼굴이 유정을 노려보았다. 유원은 유정의 손을 잡았다.

“누나 그만 나가. 아버지, 저랑 얘기해요.”

“아빠 잘못이라는 게 아니라, 유원이 좀 이해해 달라는 말이예요. 누구나 그렇게 행동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어요. 아빠 조금 전에 유원이 말도 하기 전에 손찌검부터 하셨잖아요. 혼낼 때는 혼내더라도 말이나 들어보시라고요.”

조금도 지지 않고 대꾸하는 유정에게 진구가 걸어 왔다. 유원이 그런 유정의 몸을 막으며 그녀를 밀어냈다.

“누나는 그만 좀 나가라고.”

“얘기해.”

진구는 붉어진 얼굴로 유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

“말해보라고. 그래, 대체 무슨 대단한 사정이 있었는지, 그래서 우리 싹 속이고 이딴 짓을 벌였는지 얘기해 봐.”

누그러든 태도에 유정은 오히려 놀란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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