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아직 결혼은 안했잖아요?2017.06.23.
홍대 앞 거리로 간 것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대학 다닐 때 종종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홍대로 갔었다. 수정은 1차만 하고 보통 집으로 갔지만. 그 1차 만으로도, 현실에서 벗어난 듯한 기분에 수정은 몽롱해지곤 했다.
거리의 공터에서 기타를 치는 남자가 있었다. 기타를 가야금처럼 뜯기도 하고 손으로 누르기도 하고 두들기기도 하면서 기타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음을 만들어 냈다. 홀린 듯이 구경을 하다가 수정은 앞에 놓여 있는 CD를 사들고 자리를 이동했다.
손을 잡거나 어깨 동무를 하고 걷는 연인들,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동성의 집단들이 어우러진 거리는 시끄럽고 활기가 넘쳤다. 그 사이를 조심 조심 걷다가, 수정은 사람들이 우중 우중 몰려 있는 곳에 걸음을 멈췄다.
약간 더러운 양이었다. 매애 소리를 내자 사람들은 더 몸을 숙였다. 이런 길거리에 양이라니. 수정은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웃었다. 정말이지 별세계에 있는 기분이었다. 손을 가만히 뻗으니 몽글몽글한 털이 만져졌다.
양털의 촉감을 되새기며 그 몽글몽글한 기분이 어디에서 왔을까를 생각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수정은 무언가 익숙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여러분, 저희 새 앨범이 나왔어요.”
아까 기타를 치던 곳에서, 이제는 밴드 공연을 하고 있었다. CD 자켓을 높이 들고 있는 남자가 눈에 익었다. 수정은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다 사주실 거죠? 아, 조금 더 많이 들고 나올 걸 그랬다. 오늘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수정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목소리며 얼굴이 그가 맞는데, 대체 왜 그가 여기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럼 다음 곡 갈게요. 다 사주실 줄 알고!”
남자는 익숙하게 기타 연주를 시작했고, 곧 드럼과 서브 기타가 가세하며 음이 풍성해졌다. 남자는 마이크에 대고 좀 전까지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끌리듯이 다가간 수정은 빽빽한 사람들 사이를 파고 들었다. 원래는 이렇게 민폐를 끼치는 성격이 아닌데, 그가 누군지 아는 순간 뒤에 멍청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음악 소리는 너무 커서 귀에 쟁쟁거리기만 했으나, 수정은 자꾸만 가슴이 벅차 올랐다.
유원이 수정을 발견한 것은 노래가 거의 막바지에 들어가서였다.
처음에는 아닌 줄 알고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수정이었다.
유원은 노래를 하던 그대로 수정의 눈을 빤히 바라 보았다. 수정은 웃으며 눈을 피했다. 유원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노래를 마친 유원은 마이크를 옆에 있던 베이스에게 넘기고 성큼 걸어 수정에게 다가왔다. 놀라서 몸을 돌리는데 벌써 곁으로 다가온 그에게서 어제 맡았던 체취가 느껴졌다.
수정이 몸을 돌렸고 그 순간 사람들이 CD를 사러 움직이면서 그녀의 몸이 밀렸다.
어어 소리를 내며 떠밀리는 수정을 무언가가 붙들었다. 온기가 그녀를 덮었다.
“괜찮아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수정은 숨을 훅 내뱉었다. 심호흡을 해도 자꾸만 숨이 가빠왔다.
“답답하죠? 얼른 나가요.”
가슴에서 쿵쿵 울리는 말이 아득하게 들렸다. 손목이 잡힌 채 사람들을 제치고 인파 속을 빠져 나왔다. 유원의 이마에 어린 땀방울이 보였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사람이 드문 공터로 가서, 유원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수정은 고개를 저었다.
“몰랐......어. 어쩌다 홍대에 왔는데. 그런데, 밴드 하는 거야?”
“네. 집에는 비밀로 해주세요. 실은...... 저 복학 안했어요. 군대 갔다와서 죽 활동하고 있거든요.”
유원의 말을 들은 수정이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식구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누나 빼고요. 언젠가는 말씀드려야죠.”
수정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고 밴드 활동을 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유원이 조금 전에 신나게 노래하던 모습을 보자, 무조건 유원을 반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이라고 말하지 말고 말씀드려야지.”
“누나 친구라 그런가 누나랑 똑같은 말 하네. 그럴 거예요. 근데 아버지가 워낙 군대 가기 전에도 때려 치라고 몇 번을 그래서요. 아마 말씀드리는 순간 못하게 될 거예요.”
유원의 눈빛이 흐려졌다. 수정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런 유원을 마주 보았다. 유원의 부모님은 좋으신 줄만 알았는데, 그래도 음악하는 것은 반대하시는 구나.
“그래도, 계속 말씀드려보면 안돼?”
“안될...... 거예요.”
유원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수정은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여하간 와줘서 고마워요. 우리 또 만나요. 참, 연락해도 돼요?”
다시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유원이 눈을 반짝였다. 수정은 뜻밖의 제안에 눈을 크게 뜨고 유원을 노려 보았다.
“연락해서 어쩌려고?”
“누나 친구니까 맛있는 거나 얻어먹으려고요. 저 돈 없거든요.”
“왜, 내가 너 맛있는 거 사줘야 하는데?”
“싫으면 관두고요.”
그러면서도 유원은 기대에 찬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수정은 그런 유원을 마주하다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무엇에 홀린 듯이 자연스럽게.
“찍어.”
“진짜요? 전화 주시는 거예요?
“그건 내가 결정하고. 그리고 나 약혼했어. 딴 맘 먹지 마.”
느닷없는 말에 번호를 누르던 유원이 몸을 움찔 떨었다. 수정은 그런 유원을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유원은 잠시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번호를 다 누른 후 갑자기 통화키를 눌렀다.
“뭐하는 거야?”
수정이 내민 손에 휴대폰을 건네준 유원이 빙긋 웃었다.
“아직 결혼은 안했잖아요?”
“뭐?”
“그럼 저 가요. 뒤풀이 남았어요.”
유원은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너, 지금 뭐하는......”
수정이 걸음을 옮기기 전에, 유원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수정은 유원의 온기가 남은 휴대폰을 쥐었다. 휴대폰 속에서 툭툭 심장이 뛰는 듯이 맥박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준서는 긴장한 눈으로 일식집의 룸에 홀로 앉아 있었다. 어제 그리고 오늘, 그는 내내 생각 속에 빠져 있느라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교감 석훈이 룸 안으로 들어섰고, 준서는 일어나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 오래 기다리셨어요? 차가 좀 밀려서요.”
석훈은 언제나처럼 사람 좋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준서는 마주 웃지 못했다. 긴장과 미소가 섞인 엷은 감정이 입술을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1코스로 주세요.”
준서는 주문을 마치고 석훈을 보았다. 메뉴가 뭔지는 보지도 않았다. 아마 차려진 것을 대부분 먹지 못할 것이다.
“우리 교장 선생님 좀 쉬셔야 하는데, 저까지 불러내시고 이것 참 괜찮으실지 모르겠네요.”
준서가 그를 불러낸 이유를 대강 짐작한 듯이 석훈이 물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정인기 부장 선생님 때문에 속이 타시죠? 작년까지는 제가 속이 탔는데, 이제는 교장 선생님이 그걸 다 가져가 주셨네요. 덕분에 저는 속이 편한데...... 그래도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석훈은 앞에 놓인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준서는 여전히 말이 없이 석훈을 보고만 있었다.
“계속 그래왔어요. 뭐 다 아시는 일이니까 말씀드리면, 작년까진 교장 선생님과 한 패였죠. 그래서 아무도 못 건드렸고요. 저는 허수아비 교감이었습니다. 실질적 교감은 정인기 부장 선생님이셨어요. 눈 앞에서 고스란히 부정이 일어나는 걸 보고 있어야 했는데...... 그래도 어쩝니까, 집안에 딸린 식구들도 있고.”
석훈은 후 하고 숨을 내뱉은 뒤에 여전히 침묵하는 준서를 마주 보았다.
“안 깨질 겁니다, 정인기 부장. 특히 정당한 방법으로는 절대 숙일 사람이 아니죠.”
“그게, 혹시......”
준서는 말하다 말고 입술을 혀로 매만졌다. 몇 번이나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의지했던 세계를 깨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석훈은 잠잠히 준서를 마주했다. 이미 준서가 하려던 말을 짐작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하윤택 이사장님이 계시는 한은, 요.”
그리고 석훈의 입에서 준서가 두려워하는 이름이 말해진 순간, 준서는 자기도 모르게 탄식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실은 작년의 그런 부정이 일어나도록 방치했던 분도 그 분이신데...... 또 학교를 이만큼 키워놓으신 분도 그 분이시라서. 그리고 무엇보다 교장 선생님을 여기 보낸 분도 그 분이 아니십니까.”
“그러니까,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저를 왜 여기 보내신 건지.”
준서는 자조하며 물을 들어 마셨다. 그 때에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음식들이 들어왔다. 종류가 몇 개인지도 모르게 차려지는 음식을 준서는 남의 상에 차려지는 것처럼 감정 없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제가 모를 거라고 판단하진 않으셨을 거고, 알면서 참기를 바라신 걸까요.”
“하지만 그런 이사장님을 아무도 나쁘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저조차도...... 그 분이 이루신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영 재단에 소속되어 있는 학교는 모두 네 학교였다. 신영 대학과 신영 고등학교, 신영 외국어 고등학교와 신영 중학교였다. 외국어 고등학교 허가를 내기 위해 윤택이 한 로비에 대해서는 준서도 대강 알고 있었다.
현재 신영 외국어 고등학교는 명문대 입학 순위가 1,2위를 다툴 정도로 꽤 알아주는 학교가 되어서 매해 학생들이 몰리고 있었다. 준서가 졸업한 학교이긴 했으나 그 때보다도 지금 더 인지도는 좋았다. 그 명성에 발맞추어 신영 고등학교도 인지도가 올라갔다.
네 학교의 재단 이사장으로 윤택이 이제까지 해왔던 것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도 그는 분초 단위로 움직이며 네 학교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정인기 선생님과의 일은...... 당시의 하윤택 이사장님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저도 어디까지나 제3자일 뿐이지만.”
석훈의 눈을, 준서는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내내 고민했던 말을 혀 끝으로 매만지며 준서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물을 들어 마셨지만 찬물이 훑고 지나간 목과 입은 더 뜨거워지기만 했다.
“정인기 부장 선생님과......”
준서의 눈이 붉어졌다. 뜨거운 숨을 토한 준서는 술처럼 물을 단 번에 들이켜고 내뱉듯이 말했다.
“......하윤택 이사장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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