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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28화 (28/102)

28. 우리, 공통점이 있다, 그치?2017.06.22.

준서는 픽 웃으며 휴대폰을 내렸다. 수정이 이상한 말을 해서 자기도 모르게 경계심이 사라졌었다. 그런데 유정이었다니.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자꾸 다람쥐처럼 구는 거지.

당당해 보이다가도, 소심하게 굴고, 나약해 보이다가도 강단 있는 태도를 보인다.

그런 모습이 모두,

예쁘다.

수정이한테 잘하라는 말을 끝으로 수정의 휴대폰도 유정의 휴대폰도 꺼져 버렸다. 두 사람은 지금 뭘하고 있을까. 지금이라도 가볼까.

준서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곧 전화가 올 것이다. 그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어른에게서.

그가 속한 곳을 정의로운 공간으로 만드는 것, 약한 이들이 차별 받지 않게 하는 것, 억울한 이들이 없게 하는 것.

그 꿈은 그의 힘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침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이 휴대폰이 울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놓고 준서는 휴대폰을 들어 귀에 가져다 대었다.

“준서야.”

“네, 할아버지.”

무슨 말이 나올지 알고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준서는 귀에 들리는 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정인기한테 주먹질을 해?”

휴대폰 너머 소리가 왕왕 울렸다. 주먹질을 했다니. 이야기가 벌써 그렇게 와전됐는가. 아예 반쯤 죽여 놨다고 하지.

준서는 입가에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냐? 그토록 말을 해도 왜 못 알아들어. 내가 정인기만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그런데 며칠이나 됐다고......”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말로만 하지 말고, 정신 좀 차려, 이놈아. 오늘 좀 들러라.”

부를 줄 알았다. 준서는 예, 라고 대답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 교장도 건드리지 않았던 사람이야. 학교 창립 멤버이기도 하고. 네가 그렇게 구는 건 네가 내 빽 믿고 난동 부리는 것하고 다름이 없다.”

휴대폰을 든 채 나갈 준비를 하던 준서가 걸음을 멈췄다.

“왜 대답이 없냐, 지금 나오고 있어?”

“할아버지.”

무슨 충동일까.

준서의 입이 닫혔다. 밥을 먹다가 돌을 씹은 것처럼, 생각지도 않았던 거부감이 가슴 속으로부터 차올랐다.

유정과 대화할 때 느꼈던 따스함이, 그녀가 성큼 다가와 안아주었을 때의 두근거림이, 그의 피 속을 돌면서 그가 하려던 말과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준서는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땀이 와짝 났다.

“뭐?”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많이 바쁩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너, 지금 뭐 때문에 오라고 하는 줄 몰라?”

“바빠서 끊겠습니다.”

준서는 상대측에서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예 전원도 꺼버렸다.

멍한 기분으로 홀로 서 있었다.

쇼파 위에 몸을 던졌다. 출렁거리며 닿는 촉감이 꿈 속인 듯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며, 준서는 방금 전에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생각했다.

어린 준서는, 힘이 없었다. 불쌍한 어머니를 구할 수 없어서 괴로웠던 그에게, 할아버지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그의 구원이 되어 준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욱씬대는 감각으로 그는 새로운 힘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솔직한 이야기를 했을 때 경청해 주었던 학생들, 그리고 오늘 그에게 힘을 내라며 안아 주었던 유정까지.

그들의 공감과 경청으로, 준서는 자신의 생각을 이제서야 분명히 인정할 수 있었다. 처음 정인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 때부터 미심쩍었던 것을. 윤택의 빽을 믿고 난동을 부리는 건 준서가 아니었다. 인기와 윤택의 사이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을 건드리지 않으면, 준서가 원하는 정의는 이룰 수 없었다. 지금을 버려서 얻는 것이 진정한 힘일까. 그렇게 힘을 얻는다고 한들, 그 힘은 누구를 위한 것이 될 것인가.

어쩌면 준서가 원하는 진정한 힘, 정의라는 것은 안전한 것을 떨쳐버릴 때에 가능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것은 준서의 자리까지 위협할 지도 몰랐지만, 그는 이미 고등학교 때에, 아니 그 전부터 그런 삶을 살고자 다짐했었다.

어머니를 괴롭히는 아버지의 힘에 편승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친구를 죽음으로 내몬 학부모와 학교의 힘에 편승하지 않겠다고, 그는 다짐했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그는, 그 길이 그보다 더 센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여리고 약한 것을 보호하기 위해 가져야 하는 힘은 그런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고, 준서는 생각하며 오래도록 쇼파 위에 앉아 있었다.

아침을 먹고 인사를 하고 수정은 유정의 집에서 나왔다. 더 있고 싶었지만 피곤한 유정을 더 귀찮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유원을 볼 수 있을까 했는데 계속 자는지 소식이 없었다. 물어볼까 하다가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원이 어제 한 말이 자꾸만 머릿 속을 맴돌았다. 아니, 말보다 그 표정과 말투가 더 진하게 남아 있었다. 그 표정은 수정을 삼켜 버릴 듯하다가 또 살살 달래는 듯했다.

아직도 얻어맞은 볼이 얼얼했다. 이제는 무슨 이유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기분이 나빴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나가라는 말에 그냥 나왔으니 돌아가면 또 맞을 지도 몰랐다. 그녀에겐 수정의 존재 자체가 죄악이며 치워야 할 쓰레기니까.

어릴 때에는 마음에 들기 위해 꽤나 노력을 했다. 지금은 그저 그런 척만 한다. 눈에 나지 않을 정도로만, 비위 상하지 않을 정도로만 행동하면서 수정은 마음 속에 가족을 지웠다. 그런 것 따위 처음부터 나에겐 없었던 거라고, 그러니 적당히 놀아주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거라고.

그 사라짐이 죽음인지, 아니면 유학인지, 아니면 실종인지는 정하지 않았다. 원래 그녀는 고등학교 때 사라질 생각이었다. 유정이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이 돈은 다 뭐야?”

다짜고짜로 학교로 찾아온 하영은 수정을 끌고 계단 밑의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갔다. 하영의 손에 잡힌 돈다발이 수정의 뺨을 때렸다.

“훔쳤어? 너 도둑이야? 뭐하는 짓이야, 너?”

훔친 것은 아니었다. 용돈에서, 그리고 부모의 눈을 피해 인터넷으로 번역 알바 같은 것을 하면서 푼푼이 모은 것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었다. 하영에게 수정은 오점 덩어리였으니까. 이미 초등학교 때에 자신의 모든 노력이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이후, 수정은 욕을 하면 듣고 때리면 맞으면서 살아내고 있었다.

“말 안해? 이년아!”

돈을 바닥에 던져버린 하영이 본격적으로 손바닥으로 수정의 볼을 가격하기 시작했다. 집에서야 더 심하게도 맞았지만 학교에서 이러니 신경이 쓰였다.

“말 하라고, 어디서 난 거야!”

바닥에 핏방울이 떨어졌다. 수정은 손으로 입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았다. 그래도 피는 계속 뚝뚝 흘러내렸다.

“수정아.”

돌아본 곳에 유정이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이 정신 없이 떨리고 있었다. 수정의 앞에 서 있던 여자는, 유정도 전에 본 적이 있었다. 반장 엄마라며 시험이 끝나는 날 찾아와 햄버거를 돌렸었다. 예쁘고 품위 있는 아주머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잘 꾸며진 모습이긴 했으나 치뜬 눈은 그 때와는 다르게 악귀 같았다.

“집에서 보자.”

하영은 가방을 챙겨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유정은 눈을 깜박이며 서 있었다. 수정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나, 좀 혼자 있고 싶어.”

잠시 후에, 수정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말했다. 유정은 아무 말 없이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잠시 후에 휴지 뭉치를 가져와서 수정의 입과 목 언저리를 닦아 주었다.

수업 종이 울렸다.

“너, 그냥 여기 있어, 아니다. 저 밑에 창고 있거든. 좀 어둡긴 해도 괜찮을 거야. 체육복 가져다 줄게.”

핏자국이 흐른 채로 교실에 들어갔다가는 금세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 버릴 것이었다. 유정은 수정을 지하에 있는 창고까지 바래다 주고는 얼른 교실로 돌아갔다가 체육복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너, 수업 중인데......”

“괜찮아. 양호실 갔다고 얘기해 놓을게, 한 시간만 어디서든지 쉬고 있어.”

“그럼, 양호실에 가 있을게.”

다음 수업은 아무도 듣지 않는 영어 시간이었다. 수정조차도 영어 시간에는 다른 영어 공부를 하는 정도였다.

양호 선생님은 수정의 아프다는 말에 별 의심 없이 그녀가 쉬게 해 주었다.

유정이 다시 찾아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눈에는 염려하는 빛이 가득했으나 아무 것도 묻지는 않았다.

“왜, 어떻게 왔어?”

“그냥 나도 아프다고 했어.”

유정이 웃으며 수정의 옆에 누웠다. 수정이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부어오른 뺨 때문인지 그녀의 표정은 웃음이 아니라 경련하는 것처럼 보였다.

유정이 손을 내밀어 수정의 손을 잡았다.

“있잖아.”

“응.”

“나 부모님이 친부모님이 아니야.”

수정이 고개를 돌려 유정을 보았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전에 집에 놀러 갔을 때 유정의 부모는 자신의 부모보다 더 부모 같았다.

“입양됐어, 내가 기억나지 않을 아기 때였대.”

“그, 그렇구나.”

“이 말, 나 너한테 처음 하는 거야. 초등학교 때 이후로는 잘 안 해. 자꾸 이거 가지고 애들이 놀려서.”

유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수정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놓았다. 그래도 입술은 자꾸만 떨렸다.

“난,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야.”

유정은 대답 없이 손을 꼭 쥐었다.

“아빠가 외도로 낳은...... 자식이야, 나는.”

유정의 눈이 감겼다. 그녀의 눈에서 긴 꼬리를 그리며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

“우리, 공통점이 있다, 그치?”

눈을 떠보니, 수정은 물기 하나 없는 눈으로 웃고 있었다. 유정은 몸을 돌려 수정을 안았다. 울음을 터뜨린 건 유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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