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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27화 (27/102)

27. 행복은 쟁취하는 거예요.2017.06.21.

“나 실은, 유학 준비하고 있어.”

유정의 얼굴이 굳었다. 수정은 멍한 눈으로 천장을 보고 있었다.

“결혼하면 어차피 집에서는 나오잖아.”

“야, 약혼자는 알아?”

“몰라. 말 안했어.”

“말을 해야지, 그래도.”

“그냥, 목표 같은 거 가지고 싶어서.”

유정의 손이 수정의 손을 쥐었다. 손이 차가웠다.

“아무 것도 안하고 집에 있으니까, 이건 뭐 죽을 날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해서. 못 가게 되더라도 시험이나 볼까 하고.”

“그래도, 약혼자하고 말이나 해봐.”

“그럼 집에도 전달이 될 텐데? 나 죽으라고?”

“비밀 지켜달라고 하면 되잖아.”

“그런 게 어딨냐? 차라리 말을 안하고 말지.”

수정이 이불을 끌어 덮었다. 그런 수정의 옆얼굴을 보다가 유정은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수정은 눈을 떴다. 유정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많이 피곤한지 옅게 코까지 골고 있었다.

슬그머니 몸을 침대에서 빼낸 수정은, 통화 목록을 확인했다. 준서에게 전화가 와 있었다. 그런데 2분 30초나 통화를 한 기록이 있었다.

수정은 고개를 갸웃하며 유정을 보았다. 씻으러 간 사이 준서의 전화를 받을 수는 있지만, 모르는 사람하고 왜 2분 30초씩이나 전화를 했을까. 그리고 왜 그 이후에 오는 전화를 받지 못하게 했을까.

이미 밤이 늦어 준서에게 전화를 하기는 어려웠다. 수정은 휴대폰을 두고 거실로 나왔다.

“으하!”

화장실로 걸음을 옮기던 수정은, 긴 그림자를 보고 비명을 막으며 걸음을 멈췄다. 그림자도 덩달아 놀란 듯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수정을 보았다.

“아, 누나, 아직 있었구나.”

유원은 싱긋 웃었다. 수정은 놀란 가슴을 쓰다듬었다.

“으응, 그래, 그래요.”

“말 놓으라니까요.”

“어, 그래.”

“화장실 가는 길이었어요?”

“어, 으응.”

“갔다 와요.”

“응.”

별 일도 아닌데 왜 내가 당황을 하는 걸까. 수정은 생각하면서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유원은 부엌 앞에서 부시럭 대고 있었다.

“배고파?”

금요일 저녁 술 약속 아니었나. 왜 이 시간에 먹을 것을 찾을까 생각하며 수정은 다가갔다.

“네, 집에 라면이 하나도 없네요.”

“왜 그런 인스턴트 먹으려고 해.”

“할 줄 아는 게 그것 뿐이라서요.”

유원이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수정은 순간 어릴 때의 그의 얼굴을 스치듯이 기억해 냈다.

“뭐 만들어 줄까? 우리집 부엌도 아니지만.”

“상관 없어요. 요리 잘해요?”

“응. 집에서 하는 게 없잖니? 그래서 요리를 틈틈이 익혔지.”

수정은 냉장고를 열었다.

“떡볶이 해줄까?”

마침 떡국떡이 있는 것을 보고 말하자, 유원은 아이처럼 웃으며 소리나지 않게 양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좋죠!”

“이 시간에 요리라니. 깨시지 않나 잘 봐봐.”

남의 집에서 한밤 중에 뭐하는 거람. 수정은 스스로의 처지가 우스웠으나, 그러면서도 마음은 오히려 편했다.

10년만에 찾아든 집인데도, 10년 전과 다름 없이 맞이해 주는 가족이, 수정에게는 더 가족 같이 느껴졌다. 유원도, 유정의 부모도.

익숙하게 양파와 양배추를 썰고 멸치를 우려낸 국물에 고추장을 풀면서 수정은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까지 불렀다.

“와, 진짜 맛있겠다, 대박.”

유원은 물 흐르듯이 요리를 하는 수정을 보면서 엄지를 추켜 세웠다.

“보이는 것과 맛은 다르지.”

수정은 완성된 떡볶이를 그릇에 담아 내밀었다. 김이 포슬포슬 일어나는 떡볶이 앞에 앉으며 유원은 군침을 삼켰다.

“진짜 맛있어요. 누나도 드셔보세요.”

유원은 한 입 먹고는 다시 엄지를 추켜 세우고 옆 의자를 당겼다. 수정은 들어가겠다고 하다가 얼결에 유원의 옆자리에 앉았다.

유원에게서 체취 섞인 땀냄새가 났다. 기분 나쁜 냄새는 아니었다. 수정은 포크로 떡을 찍어 입에 넣었다.

“너무, 싱거운가?”

떡을 오물거리며 수정이 말하자 유원이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전혀, 전혀, 아닙니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맛있는 떡볶이에요.”

“첫 번째는?”

당연히 그런 질문이 나갔다. 유원은 픽 웃었다.

“첫 번째로 맛있는 떡볶이라고 하면 너무 거짓말 같잖아요.”

“뭐야, 너 선수라더니 진짜 선수구나?”

수정이 토라진 듯이 말하자 유원은 양 손을 저어 보였다.

“하, 누나가 뭐라고 한 모양인데 전혀 아니거든요. 그냥 전 오는 사람 안 막았을 뿐이에요.”

“그게 선수지 뭐.”

“거절하는 거 못해서 그런 건데, 나중에 진짜 나쁜 남자가 됐어요.”

“나쁜 남자 맞는데.”

“아휴, 아니라니까요.”

삐죽 입술을 내미는 수정이 보고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그는 10년 전의 그 꼬마인 것 같았다.

“그래서, 계속 그럴 거야?”

“이젠 안 그래요. 진짜 엄청 혼났다고요. 물도 맞고 뺨도 맞고. 김치 싸대기만 안 맞고 다 맞았다구요, 제가.”

“들켰어?”

“들켰죠. 안 들킬 수가 없어요, 그런 건. 사랑하고 감기는 숨길 수 없는 거라잖아요.”

유원의 말에 수정의 눈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그녀의 머릿 속에 한 가지 장면이 스쳤다.

그녀는 자신의 약혼자를 ‘준서 씨’라고 호칭했고, 유정은 그것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치고는 꽤 긴 통화를 했다. 인사만 나눈다고 해도 1분이면 끝이 나는데.

그런데 더 이상한 건 수정 자신의 감정이었다. 준서와 유정이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도, 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저 집에서 시키는 결혼 상대자일 뿐, 준서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혹시 전에 만났던 남자 생각?”

유원이 짖궂게 웃으며 몸을 숙였다. 수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닌데, 남자 생각했는데. 내가 감 하나는 좋거든요.”

“남자는 맞는데, 전에 만났던 남자는 아니야.”

“그럼, 지금 만나는 남자인가?”

유원이 수정의 눈을 깊이 들여다 보았다. 마치 그녀의 마음 속을 짐작하는 듯이.

“그런데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어?”

“맞죠? 내가 감 하나는 좋다니까.”

하하 웃는 유원이 얄미워 수정은 그에게 눈을 흘겼다.

차마 인정하지 않았던 감정이었다. 유원이 가볍게 말해 버리자, 그렇게 쉬운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허탈해졌다.

“그게 뭐가 중요해.”

“네? 뭐가요? 설마 감정이 별로 안 중요하다는 말 하려는 거예요?”

“응. 어차피 집에서 시키는 대로 결혼할 건데.”

수정은 고개를 조금 숙였다. 유원이 손가락으로 그런 수정의 머리를 콕콕 찍었다.

“이봐요, 누나.”

“아, 너 뭐하는 거야?”

수정이 인상을 찌뿌리며 유원에게서 몸을 피했다. 유원이 싱글 싱글 웃었다.

“집에서 죽으라면 죽을 거예요?”

“결혼하라고 했지 죽으라고는 안했어.”

“그게 그 말이죠.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하라는 건, 평생 지옥에서 살라는 거니까요.”

수정은 유원의 눈을 피했다. 위험하다. 지금은 그 생각 뿐이었다.

“다 먹었으면 들어가. 나도 이제 졸려서 들어가야 겠다.”

“어, 피한다, 피한다.”

“그만 좀 까불어. 아무리 유정이 동생이라도.”

수정은 괜히 토라진 척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먹었어요.”

돌아본 곳에 유원은 아까처럼 싱글 웃고 있었다.

“설거지는 네가 해. 지금 말고 내일 아침에.”

“그럼요. 저 설거지 잘하는 남자예요.”

설거지통에 그릇을 담그고 유원은 수정에게 다가왔다. 돌아서서 들어갈 생각이었던 수정은 우뚝 멈추어 선 채 유원을 올려다 보았다.

유원은 무릎을 굽혀 키를 맞추고, 미소하며 수정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오늘, 진짜 고마웠어요. 배 고파서 죽는 줄 알았는데.”

수정은 눈을 깜박거렸다. 갑자기 긴장이 되면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리고.”

유원도 마주 눈을 깜박거렸다.

“스스로 불행해지지 마요.”

“응?”

“행복은, 쟁취하는 거예요.”

유원의 손이 수정의 어깨에 얹어졌다. 가볍게 토닥이던 손을 거두고 유원은 몸을 돌렸다. 수정은 미간을 모으며 유원의 손이 스친 어깨를 보았다.

가슴에 불이 인 것처럼 몸이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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