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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26화 (26/102)

26. 나 유학 준비하고 있어.2017.06.20.

“너, 여긴 어떻게......”

내내 설렜지만, 결국은 비통한 감정만을 느끼고 돌아온 집에서 유정은 뜻밖의 사람을 보았다. 죄책감의 원천 같은, 오늘은 연락은 커녕 생각도 말자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냥.”

수정은 희미하게 웃었다. 손을 뻗어 훑으면 지워질 것 같은 웃음이었다. 유정의 얼굴이 비틀렸다. 치솟는 죄책감은 한 쪽에 밀어넣은 채, 유정은 수정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밥은 먹었어?”

“응, 너 기다리다가 먼저 먹었어.”

“야아, 넌 친구 오는데 연락도 없이 늦냐?”

유정 엄마 혜신이 유정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 박았고, 유정은 머리를 감싸 쥐며 과하게 아픈 시늉을 했다.

“아, 일이 있는 걸 어떻게 해요?”

“그래도 연락은 하지. 내내 기다렸잖아.”

“아니예요, 진짜 괜찮아요, 전.”

“얘 없어도 종종 와서 밥 먹어. 우리야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되니까.”

혜신이 빙긋 웃었다. 수정이 유정의 집에 제발로 찾아 온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그 날도 오늘처럼 뺨은 부어 있었고, 눈은 붉어져 있었다. 신발조차도 없어서 맨발인 채로, 수정은 갈 곳이 없다며 울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유정의 집에서 며칠 동안 잘 먹고 잘 지낸 후, 수정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갔다. 그리고 나서 10년 만인가. 유정의 집이 10년째 그대로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유정은 붉어진 수정의 뺨에 손을 대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리고 괜히 말을 시켜서 힘들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참, 유원이, 많이 컸더라.”

유정을 따라 수정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왔어, 유원이? 오늘 같은 날 바쁠 텐데.”

금요일 저녁은 특히 공연이 많은 날이라 유원은 거의 집에 없었다.

“있던데. 아까 같이 저녁 먹었어. 그리고 약속 있다고 나갔어.”

역시. 유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저녁에도 공연이 있겠지. 대체 언제까지 숨기고 있을 건가. 등록금 다른 데 쓴 거 알면 집이 뒤집어질 텐데.

“키가 요만했는데 엄청 컸던데.”

수정의 말에 유정은 정신이 든 듯이 눈을 깜박이고 웃어 보였다.

“어, 걔 고등학교 때 키 다 컸어. 중학교 다닐 땐 앞에서 1번이었는데 지금은 집에서 젤 크지.”

“누나라고 부르는데 되게 놀랐어. 처음에는 누군지 못 알아봤거든.”

유정은 피식 웃었다.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지, 그 녀석이. 특히 예쁜 여자한테는 심장도 내줄 듯이 구는 녀석이니까.

“걔한테 마음 주지 마. 걔 양다리 문어 다리야. 아휴, 내가 말하기 다 쪽팔리다.”

“정말?”

“걘 좀 당해봐야 해. 참, 너도 약혼자 있지. 서유원하고는 비교도 안되는.”

“비교도 안되긴. 저번에 싸웠어. 그리고 나서 연락도 안해.”

수정의 말에 유정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싸우다니.”

“막 언성 높인 건 아닌데, 내 말에 기분이 상했어. 그래서 연락 안했어. 연락도 안오고.”

수정의 고개가 조금 숙여졌다.

“모르겠어. 올해 가을 결혼인데. 실감이 안 나. 실제 만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럴까.”

“왜, 별로야?”

수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정은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지 몰랐다. 대상이 누군지 몰랐다면 같이 욕이라도 해 주었을 텐데, 준서라는 것을 아는 상황이니 그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전혀 맥락 없이 화를 낼 사람은 아니니까.

“더 이야기를 해보지 그래? 연락이야 바빠서 못하는 걸 수도 있고.”

“결혼 같은 거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수정은 가벼운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아니다.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가도 돼?”

“그래.”

“그럼 나 좀 씻고 올게.”

수정이 미소하며 일어섰다. 유정은 수정이 새로 입을 만한 옷을 챙겨 주었다. 방문이 닫히자, 유정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침대에 걸터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면서도 알면 안될 것 같았다. 머리를 벅벅 긁다가 유정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수정의 부은 볼이 신경이 쓰였다. 그 여자가 또 히스테리를 부린 모양이었다. 혜신에게는 살짝 이야기를 해 두었다. 혜신은 고개를 절레 절레 저으며 말했었다.

“제 자식이 아니라서 그러는 거 아니야. 배로 낳은 자식이건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건 자식은 자식이지. 그 여자가 인성이 그 모양이라서 그러는 거야. 자식 학대하는 사람들은 싸그리 다 똥통에 쳐박아야 해.”

그렇더라도, 지금 수정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은 혜신하고는 조금 다른 처지이긴 했다. 남편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원치 않는 자식을 받아들여야 했으니까.

대개의 학대를, 수정은 티내지 않고 참았다. 유정의 집까지 온 것은 참다 참다 정말 못 참게 되었을 때였다. 드러나는 상처 외에 몸에 또 얼마나 많은 상처가 있을지도 알지 못한다.

준서가 원망스러웠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약혼녀인데 좀 잘해주지, 또 가르치려고 든 건 아닌지. 교육자 집안 티내는 것도 아니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여겼지만 이럴 때에는 엄마처럼 수정의 편을 들게 되는 것이었다.

점차 노곤함이 몸을 잠식해 갔다. 하루에 너무 많은 일을 겪은 것 같았다.

눈을 번쩍 떴다. 요란하게 울려대는 소리에 유정은 본능적으로 팔을 뻗었다.

“네, 여보세요.”

“아, 자고 있었어?”

이 사람이 반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어.”

그럼 나도 반말로 하면 되지.

“어? 어, 그래. 미안하다. 피곤한데 깨웠네.”

“응, 피곤한데 왜 깨웠어.”

“알았어, 더 자.”

“왜 깨워놓고 더 자래.”

“술 마셨어?”

웃음 소리가 났다. 그제서야 유정은 점차 돌아오는 의식 속에서 뭔가 어긋났다는 것을 느꼈다.

“어, 어?”

“귀엽네.”

“뭐, 뭐라니, 너?”

“하하, 너? 왜 술을 혼자 마셔, 같이 마시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유정은 휴대폰을 살폈다.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나서. 이제 끝나서 전화했어. 시간 되면 만날까 했는데, 다음에 봐야 겠네.”

“왜 이제 전화했어?”

내친 김이었다. 상대는 유정을 수정이라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면 수정이 못한 말이나 대신 해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나 화나게 하고 연락도 안하고.”

“응?”

“그랬잖아. 남자가 연락을 잘해야지, 잘 좀 챙겨줘. 나 외로운 여자라고.”

“목소리가...... 바뀌었나?”

유정은 입을 막았다.

“안하던 말 하는 것도 그렇고.”

“......”

“지금 갑자기 말 안하는 것도 그렇고.”

끊을까.

“서유정 선생님?”

끊을 것을 그랬다.

“많이 외로우세요?”

“저......”

“우리가 와인을 좀 과하게 했나 봐요.”

“수, 수정이한테 좀 잘해요!”

유정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손이 떨렸다. 휴대폰을 던지듯이 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문이 열리고, 수정이 들어서다가 멈칫 섰다.

“왜?”

“어?”

유정이 고개를 든 순간 다시 전화가 울렸다. 수정이 전화를 받으려는 순간 유정이 가로챘다.

“아니야, 수정아. 아무 전화도 받지 마.”

“집에서 온 거 아닌 거 같은데.”

“다 잊어버려, 너를 괴롭히는 것 따위.”

유정이 밧데리까지 분리해서 던져 버리고는 침대에 주저 앉았다.

“야, 서유정, 너 왜 그래? 집에서 온 거 아니라니까? 준서 씨야.”

수정이 밧데리를 도로 끼우는데, 이제는 유정의 휴대폰이 울었다.

“너, 전화 오는데?”

휴대폰을 확인한 유정은 그대로 전화를 꺼 버렸다.

“왜?”

“원래 퇴근 후에 상사 전화는 안 받는 거란다.”

“좋은 자세야. 그런데 내 전화는 왜 못 받게 해?”

“원래 싸우면 여자가 튕기는 거야.”

수정은 밧데리를 도로 끼운 후 유정의 옆에 앉아서 픽 웃었다.

“왜, 웃어?”

“귀엽네.”

수정이 웃으면서 하는 말 속에, 준서의 목소리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유정은 두 손으로 어깨를 감쌌다.

“귀엽다니, 말도 안돼!”

“왜, 너 얼마나 귀여운데.”

수정이 볼을 가볍게 쥐었고, 유정이 그런 수정을 밀쳤다. 수정이 하하 웃으면서 베개로 그런 유정의 머리를 퉁 때렸다.

“하, 이게, 해보자는 거야?”

유정은 벌떡 일어나서 장을 열고 새 베개를 꺼냈다. 수정은 거절하지 않고 유정을 때렸던 베개를 집어 들었다. 유정이 베개를 수정의 머리를 향해 내리침과 동시에, 수정이 유정의 옆구리에 베개를 휘둘렀다.

몸에 맞고 튀어 오른 베개가 넓은 호를 그렸다. 먼지가 풀썩 났고 두 사람의 입에서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기침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수정이 먼저 달겨 들었다. 머리를 맞은 유정이 수정의 등을 내리쳤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수정이 놀라 다가오는 유정의 얼굴을 정면으로 맞췄다.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진 유정에게 수정이 다가가자, 유정은 수정의 목을 팔로 걸어 쓰러뜨렸다. 수정이 비명을 삼키며 웃음을 터뜨렸다.

“수학 여행 온 거 같다.”

유정이 속삭이듯 말했고 수정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 그 때도 이랬었나?”

“그 땐 남자애들이랑 했었잖아. 교관님들한테 엄청 혼나고 밤에 단체 기합 받고.”

“기억력 좋네. 그랬었나?”

“그 때 너 좋아하는 영식이인가, 걔가 너 지켜준다고 니 앞에서 베개 휘두르다가 베개 터졌잖아.”

하하 웃던 수정이 유정에게 돌아 누웠다.

“집에 가기 싫다.”

“가지 마.”

“그럴까. 그냥 여기서 살까.”

“여기서 살다가 결혼해. 그러면 되잖아.”

“결혼...... 나 솔직히 모르겠어.”

수정의 미간이 모아졌다.

“나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응.”

“나 실은, 유학 준비하고 있어.”

유정의 얼굴이 굳었다. 수정은 멍한 눈으로 천장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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