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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25화 (25/102)

25. 힘내세요. 저도 힘 낼 테니까.2017.06.17.

“제가 너무 바보 같았어요. 교장 선생님 말씀대로, 남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는 건데. 아까 종훈이 저한테 뭐라고 했는 줄 아세요?”

유정은 음식을 먹는 것도 잊고 종훈이 했던 말을 몇 번이나 반복 중이었다. 준서도 덕분에 먹는 것을 잊었다.

“세상에, 제가 살다 살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봐요.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야.”

“그러니까요. 단단히 미쳤군요.”

“내가 왜 그런 녀석을 존중할 생각을 했을까요? 미친 건 내가 미쳤어요, 그럴 그릇도 안되면서.”

준서는 당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저 들어주어야 할 것 같아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주문한 와인이 나왔다. 아무래도 오늘은 알콜 없이 안될 것 같아서 주문한 것이었다.

“일단 좀 드시면서 말씀하세요.”

준서가 잔에 와인을 따라주며 말했다. 유정은 음식은 여전히 손도 대지 않은 채 와인만 들어 마셨다. 속에 불이 확확 나는 것 같았다.

“실은, 음, 아시는 지 모르겠는데.”

유정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준서가 눈으로 다음 말을 물었다.

“종훈이가,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니라고 하네요.”

준서는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그런 사정까지는 몰랐었다. 유정이 특별히 여긴 이유가 있었구나. 자신과 다른 관점에서 종훈을 바라보고 어떻게든 끌어안으려고 한 것이, 준서는 역시 남다르다고 여겼다. 유정에게도 교사는 단순한 직업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더 상처 받고 힘들어졌지만.

“저도, 실은 입양 됐거든요.”

뜻밖의 고백에 준서의 눈이 굳어졌다. 유정이 그런 준서의 눈을 보며 피식 웃었다.

“교장 선생님도 별 수 없구나. 놀라신 거죠?”

“아, 안 놀랄 수가 있습니까?”

“별 거 아니에요. 놀랄 일도 아니고. 부모님은 아이를 특별한 방법으로 가지신 것 뿐이에요. 단지 그게 별로 흔하지 않은 방법일 뿐이죠. 부모님은 누가 뭐래도 제 부모님이에요.”

유정은 단호하게 말했다. 준서는 순간 부끄러움을 느꼈다. 입양이라는 것을, 그 또한 편견을 가지고 바라본 것은 사실이었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드라마나 흔한 가십거리로 등장하는 ‘입양’에 대한 생각을 그 또한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상처 받은 건 학교 들어가면서부터였죠. 지금 교장 선생님의 태도, 거기에서 딱 백 배. 학교 선생님이 지은 표정이었어요. 완전 불쌍하다는 표정. 저는 왜 제가 불쌍한 사람인지도 몰랐죠. 친한 친구한테 배신도 당해봤어요. 그 애한테 이야기를 했는데 그 애가 소문을 내 버렸거든요.”

유정은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를 준서는 도저히 웃으면서 들을 수가 없었다. 입양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편견 때문에 상처 받아온 그녀에게, 자신 또한 상처를 준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자책감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 사실을 숨기기 시작했어요. 나는 입양 되었고, 하지만 부모님은 너무나 좋으신 분이시고, 동생하고도 잘 지내고 있고, 이런 이야기 구구절절 하는 것도 입 아프고. 그래서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저 입양된 거 몰라요. 말할 필요도 없었고. 아 딱 한 사람 제외하고는요.”

준서는 유정의 눈빛만 보고도 그 친구가 누군지 알아챘다.

“이상하죠. 집에서 상처를 받은 적이 없는데도, 내가 입양됐다는 거, 그래서 사람들이 특별한 시선으로 본다는 것 때문에 비슷한 사람들에게 정이 갔어요. 종훈이도 그랬었던 것 같아요. 나라면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고 자만했죠. 오늘 깨달았어요. 내가 혼자 착각 속에 살았다는 걸요.”

잔 속의 포도주를 입에 다 털어넣고는 유정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교장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사람을 대하는 데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건 아니고, 또 무조건 잘해주고 받아주는 것만이 옳은 방법도 아니에요. 좀 더 다양하게 생각하지 못했어요. 첫 담임이라 잘하고 싶었던 건데.”

이제까지 교과 담당 교사로 근무하기는 했으나, 수업 때에만 들어가는 교과 담당과 담임으로서 학생들을 만나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 유정은 요 며칠이 마치 첫 교직 생활을 하는 것과 같다고 느꼈다.

“그 마음까지 부정하지는 마세요. 서유정 선생님에게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런 사정이 있었다니. 겪으면서 배워가는 겁니다.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배웠다고 생각하세요.”

준서는 그렇게 말하고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 유정의 눈이 떨렸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네요.”

유정의 표정이 환했다. 준서는 다시 가슴이 벌컥거리는 것을 느꼈다. 유정에게 교사는 자신의 상처를 가지고 뛰어든, 그녀에게는 또 하나의 삶과 같은 자리였다.

준서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어쩐지 그녀라면, 모든 것을 이야기해도 좋을 것 같았다.

“친구가 자살을 했습니다.”

유정은 눈을 크게 떴다. 입학식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 후로 자세한 사정을 묻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였죠. 그 때의 저는...... 거의 공부에 미친 상태였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활동을 전혀 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늘 최상의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했죠.”

그래야, 아버지 태균이 어머니 정희를 무시하지 않았으니까. 아들 잘못 키운다고 구박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정희가 행복해 했으니까.

“그리고 저희 반에서 왕따를 당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저는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묵인했죠. 그 학생 탓이라고 여겼어요. 그 학생은 누가 뭐라고 해도 대응할 줄을 몰랐으니까...... 그냥 묵묵히 참기만 해서 표적이 된 거라고요.”

준서의 눈빛이 아득한 꿈을 헤매듯이 짙어져 있었다. 유정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준서를 바라 보았다.

“모든 것은 그 학생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일을 당하는 지도 잘 몰랐고 관심이 없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당장에 할 일에 쫓겨 일부러 마음을 닫은 거였죠. 괴로워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척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 녀석이 어느 날 나한테 그러는 겁니다. 학원 선생님인 것처럼 집에 전화 한 통을 해 달라고.”

준서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수롭지 않은 부탁이라고 생각했죠. 한 편으로는, 착하고 당하고 살기만 하는 이 녀석이 드디어 일탈을 하는 구나 해서 기쁘기도 했습니다.”

준서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유정은 묵묵히 기다렸다. 갓 따른 와인을 천천히 입 안으로 밀어 넣은 그가 점점 오르는 취기로 몽롱해진 눈을 들어 유정을 마주 보았다.

“보충 수업을 한다고 했죠. 그래서 11시 넘어서 끝날 거라고, 그렇게 말했어요.”

준서는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더 일찍 알았으면 살릴 수 있었을까, 그 거짓말이 통하지 않았다면 집에서 그를 더 일찍 찾을 수 있었을까.

수 천 번, 수 만 번을 더한 생각이 준서의 머릿 속을 뱅글 뱅글 돌았다.

“집에서 학대를 당하고 있었어요.”

준서의 말에 유정은 가슴에 덜컥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한 명의 친구, 준서의 여자.

“성적을 이유로 지속적인 학대를 당했죠. 그래서 대응할 능력이 없었던 거고, 학교에서도 그런 취급을 당했던 겁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고, 또 관심도 없었어요.”

준서는 시선을 내렸다.

“성적 비관 자살이라고...... 그렇게 뉴스가 나갔어요. 곧 잊혀졌고. 사실은 그대로 덮여 버렸죠. 너무 화가 나서 담임 선생님한테 가서 따졌어요. 상담 안했냐고, 정말 전혀 몰랐냐고. 그랬더니 그 여자가 그러더군요.”

눈을 들어 유정을 마주한 준서는 비통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난 최선을 다했고, 자살은 그 학생 책임이라고. 학교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유정은, 준서가 왜 그토록 미친 듯이 일을 하는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그는 책임을 미루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준서의 친구가 자살을 한 것은, 자살이었으므로 일차적으로 그 당사자의 책임일 지도 몰랐다. 아니, 책임이 있다면 그 부모에게 있지 학교에는 있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학교에서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학생과 부모와 상담을 하고 개입하려는 노력을 했었다면, 적어도 학교가 해야 하는 본연의 ‘교육’을 흉내라도 냈더라면,

그랬다면 과연 같은 결과가 얻어졌을까.

“그렇게 생각합니까, 서유정 선생님도.”

준서의 시선이 유정을 향했다. 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만약에 종훈이 같은 일을 겪었더라도 유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어도 책임은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차갑게 밀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전 그 때 학교가 도대체 뭔지, 뭐하는 곳인지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저 공장처럼 수능 성적 맞추어 제품 납품하는 곳인 건지 싶어서.”

그 후로 준서는 미친 듯이 방황했다. 날마다 지각을 하고, 수업 시간에 반항을 하고, 수업이 끝나면 학교 담벼락으로 가서 담배를 피고, 밤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화가 났다. 옆에서 그토록 괴로워 했었는데 아무 것도 몰랐던 것이. 아니 모른척을 했었던 것이.

“그 때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탓이 아니라고, 이것은 지금 한국 교육 자체의 문제라고요. 생각해보니 그렇더군요. 그것은 지식 교육에만 교육을 한정시켜 등수 놀이만 해온 지금의 한국 교육이 불러온 참혹한 결말이었으니까요. 할아버지께서는 네가 무언가 바꾸고 싶으면 힘을 기르라고 하셨죠. 아무 힘도 없는 고등학생의 귀에는 매우 솔깃한 말이었죠.”

“그래서, 지금 바꾸는 중인가요?”

일부러 명랑하게 묻는 유정에게 준서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지금도 힘이 없습니다.”

“힘이 없긴요, 학교에서 제일 무서우신 분이.”

“잘못한다고 할아버지께 요즘도 혼이 납니다.”

“혼난다고요? 할아버지께서 그 자리 앉혀 주신 거잖아요?”

“앉혀 주신 분이 그 분이시니까, 힘은 그 분한테 있죠.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 중이시고요.”

준서는 자조적으로 웃었으나, 유정의 눈은 푸르게 빛났다. 수정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준서는 어쩐지 속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기대했던 반응이라 그럴까, 아니면 유정의 반응이라서 그럴까.

“힘이 그 분에게 있다니, 말도 안돼요. 교장 선생님은 하준서 선생님이시잖아요. 그 이름 걸고 하는 일인데요. 책임도 하준서 교장 선생님이 지는 거에요. 앞으로 혼내시면 당당히 말씀하세요. 신영 고등학교 교장은 나라고, 아니면 할아버지가 대신 교장 하시라고요.”

준서는 더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단순한 말이었지만, 확실히 준서를 시원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웃겨요? 오늘 자주 웃네요.”

“그러게요. 자주 웃네요. 웃을 일이 통 없었는데.”

준서는 웃음을 그치고 유정을 보았다.

순간, 준서는 벼락을 맞듯이 깨달았다.

힘이라는 건, 그냥 이런 가벼운 위로, 공감 같은 아주 단순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고. 거창한 지위와 돈과 권력 따위가 아닌 그냥 이런 것일 지도 모르겠다고.

지금 이 순간 그는 누구에게서보다 유정에게서 힘을 받고 있으니까.

“집까지 데려다 주시고. 오랜만에 일찍 퇴근하신 날인데 저랑 밥 먹으려고 또 저녁을 날렸네요.”

대리 기사를 불러 일단 유정의 집까지 가 달라고 했다. 유정이 내리자 준서도 차에서 내렸다.

유정은 이미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말했다.

“아뇨, 즐거웠습니다. 오히려 잘 쉰 것 같아요.”

준서는 잔잔한 미소가 어린 얼굴로 말했다.

“저도 그래요. 모든 것이 꼬여서 복잡한 날이었는데, 밥 한 끼 먹고 나니까 많이 풀렸어요.”

유정은 준서를 마주했다. 달빛이 어룽진 얼굴이 평소의 딱딱해 보이는 얼굴을 부드럽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외로웠겠구나.

유정은 어둠 속에 선 준서를 보면서 생각했다. 친구의 죽음과 학교의 묵인, 그 속에서 홀로 죄책감을 짊어지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의 생애가 그의 어깨 위에 무겁게 내려 앉은 것이 보였다.

와인 때문에 약간 알딸딸해진 탓이었을까, 유정은 성큼 준서에게로 다가갔다. 숨소리마저 들릴 만큼 가까이. 준서는 놀란 눈으로 유정을 내려다 보았다.

천천히 팔을 뒤로 해서, 유정은 준서를 안았다. 온기가 느껴질 수 있도록 부드럽게. 격해진 호흡 소리가 났으나 준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힘내세요. 저도 힘 낼 테니까.”

유정이 고개를 들었다. 미소하는 그녀의 얼굴이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 그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한 나긋한 표정에 준서의 얼굴 근육이 떨렸다.

막 유정이 팔을 내리려고 하는 찰나, 그녀의 몸이 단단히 붙들렸다. 유정은 고개를 들었다. 준서는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유정을 안은 채,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고맙습니다.”

준서가 팔에 힘을 풀었다. 유정은 얼른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저는 가보겠습니다. 월요일에 봅시다.”

준서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유정은 준서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숨결과 자신의 몸을 조이던 촉감, 페라리향이 섞인 체취와 낮은 목소리가 한꺼번에 밀려와 그녀의 안을 온통 헤집는 것 같았다.

‘안돼.’

오래도록 외롭게 살았던 친구, 그래서 평생 지켜주고 싶은 친구, 그 친구의 남자다. 자신이 다가서면 안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운명은 하필 저 사람과 그녀를 엮은 걸까.

유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취기인지 열기인지 모를 것이 두 뺨을 가득 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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