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거, 굉장히 멋진 일입니다.2017.06.16.
“다람쥐 같아요.”
유정이 눈을 크게 뜨고 앞사람을 노려 보았다. 다람쥐라니. 뭐 그런 엉뚱한 말을. 준서는 여전히 웃고 있는 중이었다.
정색을 하면 날카롭게 빛나는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진 채 웃고 있는 모습이, 이 와중에도 매력적인 것이 유정은 원망스러웠다.
“다람쥐가 자기 엄청 무섭다고 볼 부풀리는 거요.”
“제가 지금 장난하는 걸로 보여요?”
“다람쥐도 자신이 진심으로 무섭다고 생각하겠죠.”
주먹이 부르쥐어졌다. 저 볼따구를 한 대만 때리고 싶다. 유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준서를 노려 보았다.
“그렇게 속상하면 그냥 때리지 그랬어요?”
애써 웃음을 그친 준서가 눈을 반짝였다.
“뭐라는 거에요, 저 고소 당하면 책임지실 거에요?”
“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여기나 저기나 책임지겠다는 말은 잘하지. 유정은 눈을 흘겼다.
“어떻게 책임지실 건데요?”
“고소 안 당할 겁니다.”
“왜요?”
“민종훈에 대해서 좀 알아보신 것 있습니까?”
웃음기를 지운 준서의 말에 유정의 표정이 굳었다.
“민종훈인 줄 어떻게 아셨어요?”
“작년 사건 모르십니까? 아시는 줄 알았는데.”
그녀의 말은 무시하고 자기 말만 하는 태도에 유정의 얼굴이 우그러졌다. 준서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여학생 성추행 사건이요. 고소까지 갈 뻔했는데 오히려 여학생들만 전학을 보냈습니다. 여차하면 그거 들춘다고 하면 돼요.”
유정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렇게 오냐 오냐 잘해주던 학생이 생각 외로 쓰레기라 놀라셨습니까?”
“아, 아니, 잘해준 건 어찌 알고......”
“다 알죠. 고민 있으면 찾아오라니까 찾아오지도 않고.”
“바쁘셨잖아요.”
유정이 불퉁한 목소리로 말하자, 준서의 얼굴이 다시 펴졌다.
“그건 그렇죠, 그래도 급한 일이라면 만사 제쳐뒀을 겁니다. 교사를 돕는 일이 제 일이니까요.”
“그런데, 정말 고소 안 당하겠죠?”
“왜요, 정말 때린 겁니까?”
“아니, 제가 아니라......”
잠시 입술을 잘근 잘근 씹던 유정은 눈을 내리 깔고 옅은 한숨을 쉬었다.
“성헌이가요.”
“하성헌이요?”
준서의 얼굴이 구겨졌다.
“제 잘못이에요. 제대로 막지 못해서.”
“하...... 새끼, 잠잠하다 했는데.”
유정은 물끄러미 준서를 보았다. 작년에 성헌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잠시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던 준서는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별 일 없을 겁니다. 그 쪽에서 고소하면 민종훈도 시끄러워지니까요. 학부모 연락 오면 저에게 연결시키세요.”
“아니, 그건 제가......”
“작년에도 그쪽 아버지 다루는 거 상당히 애를 먹었던 모양입니다. 서유정 선생님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런 학부모들이 있어요. 서유정 선생님은 그 시간에 다른 학생들 살피고 돌보세요. 담임이 한 명의 담임은 아니지 않습니까.”
유정은 입을 다물었다.
잘해보려고 했는데, 안 그래도 일이 많은 준서에게 폭탄을 안긴 꼴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제와서 끝끝내 자기가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도 민폐인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유정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 방과후 수업 업무는......”
준서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든 유정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 것도 진행되지 않았으니 역시 징계까지 가지는 않을 겁니다.”
“아까 정인기 선생님한테 한 말은......”
“그냥 열 받아서 한 말이었습니다. 부서, 바꿔줄까요?”
준서의 눈에 염려가 담겼다. 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힘들 겁니다, 앞으로.”
“학기 중에 부서가 바뀌는 일은 없었어요. 특권 같기도 하고. 그리고 어차피 당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당장이라도 치워버리고 싶은데, 지금으로서는 법적으로 어떻게 조치할 수는 없어요. 작년 일을 제가 처리할 수는 없는 거고, 지금 이걸 가지고도 어떻게 할 수는 없고.”
준서는 윤택이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정인기만 건드리지 말라는. 협박을 했으니 정인기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으나, 준서는 애써 그런 생각들을 지우고 앞에 있는 유정에게 집중했다.
“알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괴로운 표정을 짓는 준서 앞에서 유정은 미소했다. 지금까지도 준서는, 너무나 잘해주고 있었다. 이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었다.
“징계까지는 아니라도,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은 할 생각입니다. 솔직하게 말한 서유정 선생님이 피해 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아까와는 달리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로 그렇게 답하고 나서 준서는 좀 더 또렷한 음성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이건, 제 자리를 걸고 제가 할 일이기도 합니다.”
“아니 뭐 그렇게 자리까지 거실 이유는......”
“약하다는 이유로 피해 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제가 할 일이니까요. 그러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고요.”
유정은 말을 그치고 준서를 보았다. 이런 것에 반했었나. 심장이 또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러니, 앞으론 이런 일 없게 해주세요.”
“네, 죄송합니다.”
웃음기를 지운 딱딱한 표정이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을 모르지 않아 유정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정을 보는 준서의 눈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만에 식사나 하죠.”
“네에?”
유정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더 나누고 싶은 말이 있는데, 여긴 너무 딱딱한 것 같아서 말이죠.”
담임 업무에 대해서 이제는 말을 들을 차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식사를 하자는 거니까 괜찮겠지. 준서는 속으로 생각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퇴근 시간입니다. 저도 오늘은 오랜만에 칼퇴를 할까 하는데, 서유정 선생님은 어떻습니까?”
“저도, 뭐, 업무를 할 기분도 아니고.”
“갑시다. 주차장으로 나오세요.”
부드러운 태도에 유정은 물끄러미 준서를 보았다. 분명히 아닌데, 그런 거 아닌데, 데이트를 하는 듯한 이 기분은 뭘까.
꾸벅 고개를 숙인 유정은 빠르게 교장실을 벗어났다. 잘못했는데, 혼나기는 커녕 밥을 얻어먹다니. 하준서라는 인간이 이상한 걸까 아니면 내가 이상한 걸까.
하지만 이런 시간이 싫지는 않았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기대했던 일인지도 몰라.
정신 없이 교무실에 이르고 나서야, 유정은 교무실에 벌어진 상황을 짐작했다. 과연, 유정을 보는 교사들의 눈에는 염려와 안쓰러움이 교차해 있었다.
다행히 정인기는 먼저 퇴근한 후였다.
“괜찮아?”
수연이 다가왔다. 아마 준서에게 단단히 깨졌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한 태도였다. 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퇴근할게요.”
“저, 밥이나 같이 먹을까?”
“괜찮아요.”
이상하게, 수연에게도 준서랑 같이 밥을 먹는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유정은 다른 선생님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빠르게 교무실을 벗어났다.
“처음입니다.”
유정이 차에 올라타자, 차를 부드럽게 몰며 준서가 다짜고짜 앞뒤 잘라 먹은 말을 뱉었다.
“뭐......가요?”
“이렇게 해 보고 퇴근하는 거요. 요즘은 계속 야근이었거든요.”
“너무 일만 하지 마세요. 그러다 몸 상하면 누가 책임져 주나요?”
종알대는 유정을 준서가 흘긋 보고는 미소했다.
“그쵸, 제 몸 제가 아껴야 하는데.”
“뭐가 그렇게 바쁘세요?”
“요즘은 학교 규정을 보고 있어요. 체벌 금지 후에 교권이 침해되고 있는 상황이 많이 있어서요. 오늘 서유정 선생님도 겪었겠지만. 그런 것에 대한 규정을 일일이 다 손을 봐야 교사들이 보호를 받을 수 있거든요.”
“아, 그래요?”
“선생님이 매를 들지 않아도, 법으로 보호받도록 해야 교사들이 안전하게 자신이 해야 할 활동에 전념할 수 있지 않겠어요? 폭력으로 누르지 않으면 학생들이 함부로 대하는 상황에 교사를 던져두고, 학생과의 문제는 다 당신 책임이라고 하는 건 굉장히 무책임한 태도 같아서요.”
“아하.”
준서가 말한 것은 유정이 겪고 있는 현실이기도 했다. 체벌도 금지된 마당에, 전혀 실효성이 없는 벌점을 부과하는 것 밖에는 교사가 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 학생들은 망아지처럼 날뛰었고, 그런 학생 일탈의 모든 책임은 교사에게 돌아갔다.
“전 그런데 솔직히, 그렇게 하는 것이 싫어요.”
유정은 처음으로 속내를 꺼내 보였다. 이제껏 수연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억누르고 억압해서 복종하게 하는 거요. 교장 선생님은 다른 입장이겠지만, 저는 그게 왠지 인격적이라고 느껴지지 않거든요. 교사와 학생도 인격적으로 만나는 관계인데, 억지로 복종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오늘 실패한 것 같지만......”
유정은 엉망이 되어 버린 교실을 떠올렸다. 책상 배열은 흐트러지고, 학생들의 눈은 혼란에 젖었다. 대충 정리를 하고 허겁지겁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월요일에 그들을 다시 볼 것이 두려웠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준서는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그제서야 유정은, 자신이 온 곳이 꽤나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인 것을 알았다.
“그래도 최소한의 교사의 인권을 지킬 도구는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건 저도 동의해요. 하지만 학생을 억압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서유정 선생님의 신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대할 때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준서의 눈빛이 부드러웠다. 유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보태고 있었다.
유정은 자신이 수연에게 이런 부분을 설명하는 것이 힘들었던 이유가 그제서야 깨달아졌다. 수연은 한 가지 정답만을 가지고 있었다. ‘학생을 대할 때는 엄격해야 해’가 그녀의 정답이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수연의 정답이 아니었다. 수연 또한, 다른 선생님들에게 비판 없이 학습한 것이었고, 그래서 유정에게도 그냥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준서는 달랐다. 그에게는 수연과는 다른,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있었다. 남들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는 고집도 있었다. 그래서 유정은 그에게 오히려 이해를 받고 있다고 느꼈다.
“민종훈 같은 녀석은, 무엇보다 인격적으로 대우를 받은 적이 없는 녀석이죠. 아버지는 지나치게 싸고 돌았고, 어머니는 지나치게 냉정했고요. 그러니 서유정 선생님이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그 녀석에게는 만만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그럴 때에는 서유정 선생님의 뜻과 상관 없이 상대는 그것을 오해하고 이용하게 되어 버린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옳고 그르다는 기준으로 유정의 행동을 판단하지 않고, 준서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서유정 선생님처럼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거, 굉장히 멋진 일입니다. 특히 교사들에게는.”
준서의 눈이 유정을 주시했다. 웃음기를 지운 올곧은 눈이 유정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 심장의 떨림을 느꼈던 날, ‘좋은 교사가 될 것’이라는 말을 해주던 그 날처럼.
그에게는,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자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알아보고 키워주는 넉넉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하, 서유정 선생님.”
준서는 당황한 눈을 깜박거렸다. 유정은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눈을 눌렀다.
“자주 우시는 군요.”
“아니거든요.”
“제 말이 그렇게 감동적이었습니까? 두 번 씩이나.”
준서가 아까와는 달리 장난스럽게 말했고, 부아가 치민 유정은 준서의 어깨를 가볍게 주먹으로 쳤다. 그런 모습조차 우스워 준서는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상처 받으면서도 쉬지 않는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나아가는 단단한 풀꽃 같은 여자.
적절히 장막을 치고 예의를 차리는 이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자신이 다가서지 않아도 어느새 곁에 와 있다. 그와 같은 색깔로, 겁 없이 세상 속에 뛰어들며.
그의 손이 움직였다. 아직도 티슈를 손에 들고 있는 저 작은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용기 내라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준서는 공연히 운전대만 잡고 말았다.
“내리죠.”
아까 전에 주차된 차였다. 준서는 유정이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려 먼저 차에서 내렸다. 유정은 비틀거리며 뒤이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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