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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23화 (23/102)

23. 다람쥐 같아요.2017.06.15.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학부모들이 학교에 항의 전화를 시작했다. 확인을 하지 않았으면 스쿨뱅킹 통장으로 듣지도 않는 수업의 수업료가 빠져나갈 뻔했으니 그럴만했다. 유정은 일일이 사과의 말을 해야 했다. 인기는 예상대로 그런 전화를 다 유정에게 넘겨 버렸다.

겨우 학부모들을 달랬다고 생각했는데, 종례를 하러 들어간 유정은 또 한 번 복병을 만나야 했다. 정인기의 수업을 듣는 학생으로 유정의 반 학생을 넣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 사이 부모로부터 연락을 받은 학생들은, 그 담당이 유정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도끼눈을 뜨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너무 부드럽게만 대한 까닭에 몇몇 질이 좋지 않은 학생들에게 얕보이고 만 그녀였다.

종례 사항을 전달하고 났을 때, 한 학생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를 토했다.

“왜 있지도 않은 수업을 듣는다고 한 거에요?”

“선생님 사기꾼이에요?”

유정은 당황해서 학생들을 보았다. 이제까지 종훈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날카롭게 그녀에게 대응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 말은 너무 심하지......”

유정이 정색을 하고 말하려는 찰나, 뒷자리에서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종훈이 혼잣말이라고 여기기에는 지나치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 진짜 담임 바꿔달라고 해야지......”

종훈은 큰 몸집에 비해 아직 정신은 많이 어린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크고 위대해 보이기 위해서는, 집단의 권력자를 눌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정은 담임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으나, 자신 앞에서 쩔쩔 매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유정을 함부로 대할 수록, 집단은 유정 대신 자신을 우러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방과후 수업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으나, 유정이 코너에 몰린 지금이야말로 완전히 눌러 버릴 기회라고 생각했다.

“진짜 그렇지 않냐? 담임이 담임 같아야 말이지......”

“민종훈.”

유정이 할 말을 잃은 동시에 성헌의 입이 열렸다. 그 역시 참고 참았던 끝이었다.

“왜?”

안 그래도 유정에게 달라 붙어서 혀처럼 구는 성헌이 꼴보기 싫었던 참이었다. 교장 조카라는 소문도 재수 없었다. 종훈은 성헌을 노려보았고, 성헌은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말 그 따위로 하지 마라.”

성헌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은 태도에도 종훈은 싱글거리기만 했다.

“뭐? 왜, 담임이 니 깔이라도 되냐?”

“이 새끼가!”

성헌이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성헌이 빠른 걸음으로 종훈에게 다가갔다. 부르쥔 주먹을 떨고 있는데 유정이 성큼 걸어와서 성헌의 손목을 잡았다.

“그만, 하성헌.”

“선생님도 그만 하세요!”

성헌이 유정의 손을 뿌리치며 언성을 높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유치원 선생님처럼 구실 거에요? 민종훈 이 새끼가 선생님 무시하는 거 언제까지 봐주실 거에요?”

“종훈이 너도 오늘은 말이 심했어.”

유정은 떨리는 목소리로 종훈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전과는 달리 엄숙했으나, 이미 종훈은 그녀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종훈은 유정을 보고 피식 웃었다. 완벽한 무시였다.

유정은 뭔가가 어긋났다는 것을 느꼈다.

“민종훈.”

“아, 왜요.”

이제는 완전히 무섭게 들리는 목소리로 불렀으나, 종훈은 여전히 웃음기 어린 눈으로 유정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너 끝나고 나랑 얘기 좀 하자.”

“싫은데요.”

“민종훈!”

“싫다고요. 저 바빠요. 놀고 싶으면 저 애인 행세하는 하성헌 새끼랑 놀아요.”

종훈은 낄낄 웃으며 좌중을 둘러 보았다. 자신이 이렇게 담임에게 함부로 대하고 있다고, 과시하는 눈빛이었다.

유정의 가슴에서 무언가 조각나기 시작했다.

잘해주고 이해해주면 변할 것이라는 믿음, 진심을 보이면 받아들일 것이라는 믿음이 한 순간에 깨져 버렸다. 인간 대 인간이라니. 애초에 인간이 아닌 것을. 짐승 새끼와 다를 것이 없는 녀석이었던 것을.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부들 부들 떨면서 유정이 종훈에게 다가갔다. 종훈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저 애인 행세하는 하성헌 새끼랑 놀라고요.”

“너, 따라와.”

유정이 종훈의 손목을 잡았다. 그 순간, 종훈이 유정의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구 맘대로 따라와?”

“너 이 새끼!”

유정을 밀치고 종훈의 앞에 선 성헌이, 누가 말리기도 전에 주먹을 내뻗었다. 종훈이 비틀거리며 책상을 밀쳤고 책상이 우르르 밀리면서 학생들이 너도 나도 일어섰다.

교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종훈이 얼얼한 뺨을 쓰다듬으며 가방을 들고 나가 버렸다. 성헌과 맞붙은 적은 없으나 그가 마음만 먹으면 종훈 정도는 금세 때려눕힌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의 뒷배경도 무시할 수 없기도 했다.

“무슨 짓이야?”

언성을 높이는 유정 앞에서, 성헌은 전과는 다른 반항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그대로 가방을 들고 나가 버렸다.

“하성헌!”

유정은 막막한 심경으로 교실을 둘러 보았다. 엉망이다.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양 손으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걸음이 자꾸만 비틀거렸다. 시야가 컴컴했다. 그래서 누가 자신에게 오고 있는 줄도 몰랐다.

“서유정 선생님.”

고개를 들고서야, 유정은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남자가 눈 앞에 이른 것을 보았다. 남자의 미간이 좁아져 있었다.

“저 좀 보시죠.”

찬바람을 일으키는 태도에 유정의 머릿 속에도 냉기가 어렸다. 지금은 너무 힘든데. 무슨 일 때문인지 알면서도 걸음이 쉽게 걸어지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서유정이 그런 걸 왜 나한테......”

교장실에는 더 곤란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정인기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준서는 인기가 있는 쪽은 보지도 않고 유정을 쇼파로 안내했다.

이미 쇼파 위에 앉아 있던 인기는, 옆에 앉는 유정을 도끼눈을 뜨고 노려 보았다.

“유정쌤, 나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왜 학부모님 전화를 받고 제가 알아낸 걸 서유정 선생님 탓을 하시는 겁니까?”

준서가 싸늘한 어투로 인기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왜 서유정이 그런 걸......”

“서유정 선생님이, 정인기 선생님 수업을 개설하셨다는 뜻입니까?”

“그래, 그랬다고.”

인기는 이제 말까지 완전히 놓고 있었다. 유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서유정 선생님.”

준서의 눈빛이 화살처럼 유정을 찔렀다.

“정인기 선생님의 말씀이 사실입니까? 서유정 선생님이, 정인기 선생님 동의도 없이 정인기 선생님 수업을 개설하고, 선생님반 학생들을 명단에 집어 넣은 겁니까?”

준서의 말투에서 애써 억누른 분노가 느껴졌다. 유정은 깨물었던 입술을 놓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서유정 선생님.”

준서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그것 봐, 대답 못하잖아.”

“정인기 선생님은 잠깐 나가 계십시오.”

준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라고!”

“나가 계시라고요. 제가 서유정 선생님과 단둘이 이야기를 해야 겠으니까......”

유정의 머릿 속에서 모든 것이 엉켜 버렸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내가 일단은 좀 살아야 겠다.

“네, 시켰습니다.”

유정은 입술을 놓고 대답했다. 목소리 끝이 떨리고 있었다.

준서와 인기의 눈이 동시에 유정을 향했다.

“정인기 선생님이 시킨 일 맞습니다. 회의실에서 저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야, 서유정!”

정인기가 자리에서 일어섰고, 준서가 그런 인기에게 다가갔다.

“야라뇨. 말씀 삼가십시오.”

“그럼 내가, 흥분을 안하게 생겼어? 서유정 내가 오냐 오냐 봐주니까......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얼굴이 붉어진 채 삿대질을 하는 인기에게, 준서는 싸늘한 태도로 다가섰다.

묵묵히 응시하는 준서의 시선을 받으며, 인기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경고할 때 말을 들었어야지.”

준서가 인기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인기의 눈이 커졌다.

“이번에도 그냥 넘어갈 줄 아는 모양인데, 그렇게는 안되지. 일단 집에가서 쉬고 있어요. 어떤 징계가 내려질 지는 조사 후에 알려드릴 테니.”

“뭐, 뭐라고, 징계?”

“그럼, 작년처럼 그냥 넘어갈 줄 알았나? 내 이름 걸고 하는 일이에요. 하나도 허투루 안 넘길 생각입니다. 아마 그토록 원했던 승진에도 영향이 있겠죠.”

준서의 입에서 픽 웃음이 새어 나갔다. 인기의 손이 부들 부들 떨렸다.

“그만 나가보세요.”

준서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인기의 손이 준서의 멱살을 쥐었다. 쥐어진 주먹이 준서의 뺨을 향했다.

유정이 놀라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준서가 재빠르게 인기의 팔을 잡고 꺾어 버렸다. 어디서 배우기라도 한 것처럼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비명은 인기의 입에서 토해져 나왔다.

“더 하면 팔이 꺾일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준서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말했고, 인기는 대답 없이 헉헉댔다. 인기의 팔을 놓은 준서가 인기를 가볍게 밀치자, 붉어진 얼굴로 욕을 씹어 뱉은 인기가 비틀거리며 교장실을 걸어 나갔다.

교장실 안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조금 전의 몸싸움의 열기가 후끈하게 내실을 달구고 있었다.

“앉으시죠.”

준서는 여전히 싸늘한 얼굴로 유정을 보고 있었다. 유정은 자기도 모르게 일으켰던 몸을 다시 쇼파 위에 주저 앉혔다.

“시킨 일이라고 해도, 잘못은 잘못입니다.”

유정의 맞은편에 앉은 준서는 아까와는 달리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징계, 받겠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정을, 준서가 안타까운 눈으로 훑었다.

“왜 그랬어요?”

유정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첫날부터 무슨 짓을 한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정인기가 무서웠어요? 나한테라도 찾아오지, 왜......”

유정이 시선을 내렸다. 뭐라고 해야 하나. 변명할 말도 없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한 거 알아요. 그런데 왜 서유정 선생님이 그런 짓을 했느냐는 말입니다. 안 그럴 것 같은 분이......”

“안 그러다뇨. 저도 똑같아요. 똑같이 비열하고 무책임하죠.”

유정은 씹어뱉듯이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눈이 자꾸만 따끔거렸다. 준서는 그런 유정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아까보다 더 감정이 실린 목소리를 냈다.

“왜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합니까? 저는, 정인기하고 서유정 선생님은 아주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데요.”

준서의 눈빛은 여전히 곧고 찌르는 듯했다.

“잘못 보셨어요.”

“저 사람 잘 봅니다.”

“아니에요, 진짜 잘못 보셨다고요. 저희 반도 오늘 완전히 망했어요.”

준서의 미간이 모아졌다.

“잘하려고 고집 부렸는데...... 완전히 개판 됐어요. 자칫하다가는 학생 때릴 뻔했어요. 잘못인 줄 알면서 정인기가 시키는 대로 하고. 저 그런 사람이에요. 저 좋게 보지 마세요. 이상한 교사니까.”

유정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미칠 것 같았다. 부끄럽고 스스로가 가증스러웠다. 이건 동정을 바라는 걸까, 아니면 그냥 스스로 무너지는 걸까.

아무 소리가 없어서 슬그머니 고개를 드니, 준서의 입은 뜻밖에도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웃어요?”

그 말에 준서는 결국 큭,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유정은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았다.

“웃겨요? 사람 놀려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참을 수가 없네요.”

“네?”

“다람쥐 같아요.”

유정이 눈을 크게 뜨고 앞사람을 노려 보았다. 다람쥐라니. 뭐 그런 엉뚱한 말을. 준서는 여전히 웃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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