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전 서유정 선생님을 믿습니다.2017.06.14.
준서에게 연락이 온 것은, 점심 때가 지나서였다. 유정은 잔뜩 긴장했다. 이제서야 알고 부르는 걸까. 오라는 말에 따로 감정이 담긴 것 같지는 않았는데.
교장실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슬리퍼 끝이 자꾸만 복도 바닥에 쓸려 이상한 소리를 냈다.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넘어질 것 같기도 했다.
교장실 앞에 이르러 유정은 작게 심호흡했다. 문을 여니, 준서는 평소와 다름 없는 단정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 제가 신경을 못 썼네요. 연락하니까 오전에 이미 인수인계가 끝났다고 하더군요. 앉으세요.”
준서는 담담한 얼굴로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유정이 앉은 맞은편 쇼파에 앉았다.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까? 인수인계 하면서요.”
유정은 말없이 준서를 응시했다. 지금이라도 말해야 할까. 인기가 잘못된 부탁을 했고, 인수인계도 그가 다 해 버렸다는 사실을.
유정의 손끝이 떨렸다. 입술을 살짝 깨물고, 유정은 코로 긴 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작년’을 강조하던 인기의 음성이 지금도 생생하게 들릴 듯했다.
유정은 발끝을 오무렸다. 늘 정해진 틀 안에서 살아왔었다. 특별히 성장 과정에서 상처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안전한 삶이고, 또 모나지 않은 삶이라고.
“아뇨, 전혀요.”
“다행이군요. 그거 확인하려고 불렀습니다.”
준서는 모르는 구나. 유정은 잇새로 짙은 한숨을 뱉었다. 그런 유정을 준서는 잠잠히 살피다가, 작게 헛기침을 하고 아까보다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유정의 눈이 다시 들렸다. 준서의 까만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뭔지를 추측하며, 유정은 손끝을 떨었다. 잠시 말을 쉬던 준서는 아까보다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수업이나, 담임 업무 하면서 어려운 건 없습니까?”
오전에 성헌이 다녀갔었다. 내내 고민하다가, 준서에게 유정의 반 상황을 전했다. 종훈을 비롯한 몇몇 학생들로 인해 반 분위기가 무너지고 있는데 유정은 그냥 착하게만 대응하고 있다고. 삼촌이 뭐라고 말 좀 하라고 한참을 투덜거렸다.
서유정 선생님의 교육 방침인데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다고, 정 반 분위기가 걱정이 되면 네가 나서서 뭐라도 해야지 날 찾아와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반은 혼을 내고 반은 달래서 돌려보냈으나, 준서는 영 심기가 불편했다.
유정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도 첫 담임을 맡았을 때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건 누가 가르쳐줘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체험으로 깨닫고 자신의 몸에 맡는 역할을 찾아야 할 일이었다.
“아, 아직은요.”
유정은 뜻밖의 말에 당황해서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내내 방과후 업무만 생각했는데, 준서가 걱정했던 것은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것이라면 유정은 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처음으로 맡는 반이었고, 준서가 조언했던 대로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다른 이의 조언을 듣기보다는 일단 스스로의 철학을 실현해보고 싶었다.
유정은 어려움을 감추고 웃어 보였다. 준서는 그 웃음 속에 비친 지친 표정을 읽었으나, 일부러 모른체하고 대꾸했다.
“네, 다행입니다. 잘하실 줄 알았습니다.”
준서의 말에 유정은 웃음을 지우고 지친 표정을 좀 더 드러냈다.
“잘하는 건 아니고요......”
“제가 말을 잘못했군요.”
준서는 잠잠히 테이블을 보다가 눈을 들었다.
어려움도 꾹꾹 참아내는 것은, 혼자 해보겠다는 고집 때문일 것이다. 나도 첫 담임 때 그랬고, 그래서 실패했었으니까. 어떻게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서유정 선생님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죠. 한 사람 한 사람 교사가 곧 교육 과정이고 교육 자체입니다. 맞지 않는 옷은 이상하게 보이거나 찢어집니다. 저는, 이번 1년은 서유정 선생님이 자신에게 맞는 옷을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준서의 입에서 고르고 고른 단어들이 굴러 나왔다. 유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지워졌다. 준서의 말은, 마치 유정의 마음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보고 있는 듯한 울림이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서유정 선생님 반이고 선생님이 책임질 일입니다. 선생님이 알아서 다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많이 묻고 다른 선생님이 하는 것도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최종 결정은 선생님이 하는 겁니다. 묻는 걸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리고 남과 다른 것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전 서유정 선생님을 믿습니다.”
결정은 당신이 하지만, 그 과정까지 다 감당하지는 말기를. 준서는 자신의 말이 유정에게 잘 전달이 되기를 바라며 말을 마쳤다. 유정은 일렁이는 눈으로 준서를 보다가, 눈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잠시 후, 유정의 눈에서 굵은 눈물 방울이 테이블로 떨어졌다.
준서는 당황해서 가만히 유정을 보고 있다가, 일어서서 곽티슈를 가져다가 내밀었다. 유정이 떨리는 손으로 티슈를 뽑아서 눈을 닦았다.
“고...... 맙습니다.”
유정이 겨우 입을 열자, 준서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실은 아까부터 묻고 싶은 것이었다. 유정이 괜찮다기에 내내 참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유정은 안쓰러운 눈으로 자신을 보는 눈을 마주했다.
대학에서 교직 수업을 들으면서, 교육이 ‘만남’이라고 배웠다. 그녀가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면, 이제까지 학교에서 경험했던 교사와 학생과의 관계가 아닌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고 싶었다.
그녀가 경험한 것은 교사가 학생을 일방적으로 억누르는 것 뿐이었다. 학생의 의견을 묵살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학생은 폭력으로 다스렸다. 그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와 겪는 학교의 현실은 팍팍했다. 첫 담임부터 실패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실패하게 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실패했는지도 몰랐다.
그런 유정에게, 준서의 말은 큰 위로였다.
유정의 꿈을 짓밟지 않으면서, 동시에 남들이 하는 것도 살펴보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더한 그의 말은 그녀가 정말 듣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첫 담임은 당연히 어렵습니다. 어려운 거 있으면 말해요. 혼자만 끙끙 앓고 있으면 더 힘들어지기만 해요.”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유정은 입을 열어 말하려고 했다. 그 때에 누군가 교장실을 노크했다.
준서는 미간을 모으며 문쪽을 보고는, 아까보다 낮고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아, 교감 선생님하고 처리할 일이 있어서. 오늘 혹시 끝나고 시간 됩니까?”
“끝나고요?”
“차근 차근 얘기 합시다.”
“오늘 학생들하고 상담 있어요.”
“상담이라고요...... 그럼 내일도 좋고 언제라도 오세요.”
준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장실 문이 열렸다. 유정은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교장실을 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 후로 며칠이 지나도록, 유정이 준서를 만날 기회는 없었다. 준서는 계속 업무로 바빴고, 유정도 수업하랴 상담하랴 정신이 없었다.
종훈은 점점 통제 불가능한 태도를 보였다. 자기가 오고 싶은 시간에 오고 가고 싶은 시간에 집에 갔다.
유정을 우습게 본 다른 학생들도 한 두명씩 종훈을 따르기 시작했다.
청소나 반 정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실한 몇몇만 빼고는 다 도망을 가 버리는 바람에 유정은 학생들을 다 보내고 혼자 청소를 했다. 성헌이 몇 번 남아서 도왔으나 유정은 그런 도움도 거절했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그리고 실제로도 웬만한 일들은 잘해왔던 유정은 처음 겪는 일 속에서 나날이 혼란을 키워가고 있었다. 잘해주려고 한 건데 왜 반은 점차 엉망이 되는 건지, 사랑을 주면 학생들이 알아서 자라줄 거라고 믿었는데 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지.
수연에게 몇 번 이야기를 했으나, 수연은 답답하다는 듯이 ‘그러니까 내가 처음에 애들 잡으라고 했잖아, 지금이라도 잡아, 무섭게 혼내라고’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유정은 그런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몇 번 같은 대답을 듣고 나서는 수연에게 반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다.
몇 번 준서를 찾아갈까 고민했으나 준서는 늘 바빴다. 일거리가 없을 때에도 찾아서 하던 그였으니, 일이 많을 수 밖에 없는 3월 초에 그는 당연히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방과 후 수업 업무를 맡은 업체에서 전화를 받은 것은, 유정이 반에 대한 고민으로 인기의 부탁을 받은 일은 까맣게 잊었을 때였다.
“신영 고등학교 서유정 선생님이시죠?”
예의 바르나 어쩐지 딱딱한 어투였다. 유정은 불안함을 감지하며 되물었다.
“네, 맞는데, 무슨 문제 있으신가요?”
“다름이 아니고, 정인기 선생님 수학 방과 후 수업에서요, 학생들이 이런 수업 신청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한 두 명이 아니라 그 수업 신청한 학생들은 모두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제서야 유정은, 인기가 전혀 제대로 처리를 안하고 유정이 모두 한 것처럼 넘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각이 되면 유정의 탓으로 다 뒤집어 씌울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그게, 그거, 정인기 선생님이 인수인계......”
“그런데 업무 담당자는 서유정 선생님 아니신가요? 선생님 자리 안 계셔서 정인기 선생님에게 인수인계 받은 건데요.”
“그게 맞긴 맞는데......”
“학생 수업 신청 받은 건 선생님 아니신가요? 그럼 정인기 선생님이 신청 받으신 거예요?”
“아닙니다, 제가 받았는데요......”
잘못되는 것이 당연했다. 수업 신청도 안한 학생들이 명단에 들어가 있고, 업체에서는 당연히 그들의 계좌로부터 수업료가 입금되게 했을 것이었다.
인기가 윽박지르는 것이 무서워서 알면서도 눈을 감았던 것이었다. 일부러 모르는 척, 아니 아예 몰랐던 것처럼 머릿 속에 그것과 관련한 생각 자체를 지워 버렸던 것이었다.
유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이 이렇게 악해지는 거구나. 정말 악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 위에서 시키는 것이니까 아무 생각 없이 자기 생각을 포기하게 되는 거구나.
“죄송합니다.”
유정은 짙은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그럼 어떻게 된 건가요?”
“제가 잘못 처리를 했습니다. 정인기 선생님 수업은 삭제해 주세요. 돈도 돌려 주시고요. 정말 죄송합니다.”
“하, 이런 식으로 처리를 하면 안되죠. 저희만 이상한 사람 됐지 않습니까. 그러면 정인기 선생님 수업은 취소 처리 하겠습니다.”
“네,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내가 교사라고,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전화를 끊은 유정은 자조의 한숨을 쉬며 머리를 싸쥐었다.
마침 인기가 싱글거리며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유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인기에게 다가갔다.
“유정쌤, 왜?”
인기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이 싱글거렸다.
“전에, 부장님께서 분명 다 책임지신다고 하셨잖아요.”
“뭘?”
인기는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여전히 모른다는 듯이 굴었다. 유정은 머리로 스팀이 나오는 기분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방과후 수업 업무요. 지금 전화왔어요. 정인기 선생님 수업 신청한 학생들, 취소 시켰어요.”
“아, 그거?”
인기는 유정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가져온 교과서를 책상 위에 내려 놓았다.
“그거 유정쌤이 신청한 거잖아.”
“네에?”
예상했던 태도지만, 뻔뻔한 태도를 눈 앞에서 보니 유정은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입술이 깨물렸다.
“그럼 내가 신청했어? 유정쌤이 신청한 거잖아. 그런데 왜 나한테 그래?”
인기는 여전히 유정을 보지 않은 채 담배를 꺼내들고 교무실을 나가 버렸다. 유정은 인기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딱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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