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다 티나요. 편애하는 거.2017.06.13.
“개학하고 좀 어때? 바쁘지?”
인기는 소회의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있었다.
“네, 뭐.”
“담임 업무는 어때?”
“바쁘지만, 재밌어요.”
유정은 짧게 대답하고 인기를 마주 보았다. 인기는 잠시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 허공으로 눈을 돌렸다.
“내가 보기에 유정쌤은 싹수가 달라. 잘할 거야. 거 뭐시냐, 그 영어쌤은 맹탕이라고 소문 났데. 수업도 별로고. 애들도 못 휘어잡고.”
영어쌤이라면, 유정과 동기인 상우를 말하는 것 같았다. 상우가 어떻게 지내는지 유정은 몰랐다. 바빠서 말 한마디 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잘 지내길 바랐다.
교육대학원 졸업 이후 첫 수업이니까 시행착오도 많을 거고, 경력이 많은 유정과는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그걸 가지고 뒤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유정은 영 마음에 걸렸다. 상우는 괜찮은 걸까. 언제 시간 되면 밥이나 먹자고 해야 겠다.
“흠, 그건 그렇고 유정쌤.”
이제 본론을 이야기하는 모양이었다. 인기는 그렇게 부르고 나서도 몇 번 헛기침만 흠흠 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방과후 업무 말이야.”
“네.”
“거기에 내 수업 하나만 개설해줘.”
유정은 무슨 소린가 해서 멍한 눈으로 인기를 보았다.
“수학 수업이면 되겠지? 뭐 아무 거나, 유정쌤이 맘에 드는 걸로 골라서.”
“수업 개설 신청서는 어제 드렸는데, 거기 작성해서 주시면......”
방과후 수업을 개설할 교사들은 신청서에 작성해서 유정에게 주면, 유정이 그것을 모아 학교 홈페이지에 게시해서 학생들이 직접 신청하도록 했다. 수강 과목 당 10명이 넘으면 수업이 개설되었다.
그런 절차를 모를 인기가 아닌데.
“아아, 그러니까 내 말은.”
인기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답답하거나 짜증날 때 하는 그의 버릇이었다.
“아무 거나 만들라고. 실제 수업할 건 아니니까.”
“네에?”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유령 수업이라도 만든다는 걸까.
“어차피 10명이나 15명이나 수당은 똑같이 나가잖아. 그러면 분명 수업비에서 남는 부분이 생겨. 그걸 끌어다 쓰면 수업 한 두 개 정도 비용은 더 지급할 수 있다고.”
“그런데, 남는 걸 그렇게 쓰면 안될 것 같은......”
“하, 진짜, 너도 하교장 닮아가는 거야?”
인기가 책상을 손바닥으로 턱 치며 언성을 높였다. 유정은 놀라서 몸을 곧추세웠다.
“네, 네?”
“어차피 하교장 오래 못 가. 제 할아버지 빽으로 와서 기세가 등등하지만, 흠, 그러니까 전 하교장이 그러더라고. 계속 말 안 들어서 한 학기만 하고 갈아버릴 생각이라고. 재단 이사장이 직접 한 말이라니까 확실한 정보야.”
인기의 입 속으로 다시 누런 이가 보였다. 유정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줄 잘 타야돼. 요즘 젊은 교사들 위주로 하교장 빨아준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들리는데, 한 학기 지나면 땅을 칠 걸.”
“아니, 저는 줄을 잘 타려는 생각은 없고요......”
유정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까지 어른과 이렇게 맞섰던 적은 없었다. 학창 시절에도 대개는 얌전하게 공부만 했던 그녀였다.
“줄을 잘 탄다는 게 특별한 뭘 한다는 게 아니야.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유정쌤은 운이 좋아. 우리 부서로 오게 됐으니까.”
인기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유정이 놀라서 마주 일어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그래서, 뭘요?”
“뭐?”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고요?”
“방금 얘기했잖아.”
인기는 그 두꺼비처럼 튀어나온 눈을 뛰룩 뛰룩 굴리며 말을 이었다.
“수학 수업 하나 만들고, 쌤 반으로 해서 10명 신청자 넣고. 그런 다음에 수업료 지급하면 돼. 이제는 현금으로도 받지 말라니까 뭐,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지.”
인기는 그렇게 말하고 휙 나가 버렸다.
유정은 막막한 고개를 떨구었다. 수연이 아무 말도 못했던 이유를 알았다. 아마 작년에도 그렇게 했었겠지.
만약 안해준다면, 그녀에게 1년은 지옥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었다. 부서의 부장인데. 사사건건 부딪히고 트집을 잡겠지. 유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아픈 머리를 매만지며 종례를 하러 들어가니,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민종훈이었다.
“민종훈, 어디 갔어요?”
“가방도 없어요.”
학생들의 말을 듣고 자리로 가니 정말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집에 갔나봐요.”
“또 시작이다, 민종훈.”
“아까 점심 시간부터 없지 않았어?”
학생들의 쑥덕임이 심해졌다. 어쩐지, 그에 대해 안 좋게 말하고 있는 것이 유정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거 다 편견이야. 종훈이가 얼마나 불쌍한 녀석인데.
“알았어요, 모두 조용.”
유정은 목소리를 크게 하고 얼굴을 굳혔다.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게 종례 사항을 말하고 일주일 동안 고생했다는 말로 종례를 마쳤다.
오늘 청소 당번들을 손을 들게 했더니, 몇몇 학생들이 불만을 토했다.
“민종훈 청소 당번이에요.”
“민종훈 어제도 청소 안하고 도망갔어요.”
유정은 여린 한숨을 쉬었다. 청소를 하지 않고 도망가면 1주일 동안 혼자 청소를 하게 하는 벌을 만들었다. 학급회의 시간에 만든 규칙이었다.
그러나 유정은 종훈에게 차마 1주일 동안 혼자 청소를 하라고 시킬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삶이 힘들 텐데. 학교 나와주는 것만으로 고마운 녀석인데.
“오늘은 청소 안해도 돼요. 불금이니까.”
유정은 그렇게 말하고 빙긋 웃어 보였다. 몇몇 학생들의 얼굴이 굳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학생들이 모두 떠난 교실에서, 유정은 홀로 빗자루를 들었다.
쓰레기가 지저분하게 굴러다니는 교실에서는 퀘퀘한 냄새까지 났다.
앞자리부터 쓸기 시작하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뭐하세요?”
성헌이었다. 아까와 달리 표정이 굳어 있었다.
“응? 아, 금요일이잖아. 불금. 너도 그냥 가.”
“아니, 왜......”
성헌은 가라는 말도 듣지 않고 빗자루를 들었다.
“아, 괜찮아, 이 정도는......”
“애들 시킬 것까지 선생님이 하고 그래요.”
성헌은 성난 표정으로 빗자루질을 시작했다. 힘이 좋아 그런지 금세 쓰레기가 모아졌다.
“가라니까, 참......”
“종훈이 때문에 그러죠?”
성헌은 빗자루질을 계속하며 물었다. 유정의 몸이 굳었다.
“다 티나요. 편애하는 거.”
“편애하는 거 아니야.”
“애들도 다 안다구요. 근데 그러면 더 그 녀석 엇나갈 텐데.”
유정은 말없이 성헌을 노려 보았다. 삼촌이랑 똑같은 녀석. 그 집안은 나면서부터 잔소리 하는 법을 가르치는 모양이지.
“그러지 마세요. 애들도 다 싫어해요.”
“그렇지만......”
“작년 일은 아세요?”
유정은 입을 다물었다. 성헌은 자꾸만 주제를 넘고 있었다. 유정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학생이 참견할 일이 아니었다.
“작년에......”
“하성헌.”
유정이 몸을 폈다. 성헌도 빗자루질을 멈췄다.
“그만하면 됐어. 너도 돌아가.”
성헌이 묵묵히 유정을 마주 보았다. 잘생긴 이마에 주름이 졌다.
“이거 드리고 갈게요.”
성헌은 아까 유정에게서 빼앗은 가정통신문 묶음을 내밀었다. 통계 조사까지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고맙다.”
유정은 일부러 싸늘하게 말했다. 성헌은 아무 말 없이 한숨을 내뱉고는 책가방을 들었다.
“갈게요. 주말 잘 보내세요.”
성헌이 나가자, 유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학생에게 충고를 들은 것이 치욕스럽고 불쾌했다. 편애라니. 저들은 사정을 알고나 지껄이는가.
무시하고 싶었으나 무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유정쌤, 아직 안 올라왔더라, 부탁한 거.”
인기가 유정을 기다렸던 듯이 교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아 곧 하려고요.”
“얼른 해. 뭐 시간 걸리는 일이라고.”
그런 자기 손으로는 기안 하나 작성 안하면서.
유정은 이마로 바람을 훅 불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래, 하자, 나도 모르겠다, 다 골치 아프다.
어차피 시켜서 한 일이니까. 잘못된 일인 거 알지만 시키는 대로 안하면 내 1년이 너무나 불안하니까. 그래도 정인기가 잘해줄 땐 잘해준다고 수연쌤이 그랬으니까.
대충 다른 수학 교사가 올린 계획서를 보고 비슷하게 만들어서 올렸다. 수업 개설이 완료되었다. 반 학생들 아이디로 들어가서 신청까지 완료해 버렸다.
이제 집에 가서 주말 동안 푹 쉬면 된다.
유정은 양 손바닥을 얼굴에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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