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잠깐 나 좀 봐2017.06.11.
“재밌는 말이 들렸는데?”
준서의 눈을 마주한 종훈이 뒷걸음질을 쳤다.
“아, 아니에요, 제가 한 말.”
“그럼, 내가 했을까?”
욕 한마디 안하고도, 준서는 표정과 말투로 상대를 짓밟아 버렸다. 종훈은 숨을 들이마셨다.
“죄송, 합니다.”
준서는 대답 없이 뚫어지게 종훈을 보았다.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적요했다. 종훈은 한 손으로 뒷머리를 긁다가 고개까지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준서는 픽 웃고 닫힘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는 숫자가 내려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 종훈은 참았던 욕을 뱉었다. 그러나 많이 놀란 듯이,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텅.
그 순간, 그가 들어가려고 했던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너무 놀라서 어어 소리를 내지르는데,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집에서 나왔다.
“어, 종훈이 왔냐?”
그 뒤이어 나온 건우가 반가운 눈을 해 보였다.
“마침 잘됐구나. 네 담임 선생님께서 오셨어.”
종훈의 눈이 유정을 아래 위로 훑었다. 유정은 순간 기분이 상해서 한 걸음 물러섰다. 담임 교사를 대하는 태도부터가 글러 먹었네.
아니 아니, 편견을 가지고 대하면 안되지. 난 종훈이를 바꿀 단 한 명의 교사야. 종훈이는 상처가 있는 아이고, 날카로워 보이지만 분명 순한 본성을 가지고 있을 거야.
“반가워. 난 서유정. 앞으로 네 담임을 맡게 됐어.”
다시 용기를 내어 종훈의 앞에 다가온 유정은 호기롭게 손까지 내밀며 말했다. 종훈은 이게 또 뭔 시츄에이션인가 싶어서 무시하려다가, 조금 전에 간 준서를 떠올리고 입술을 와락 깨물었다.
그 새끼는 왜 떠나서도 존재감이 있고 지랄이야.
담담히 손을 내밀자, 유정이 그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이것 봐, 순하지. 나한테는 순한 녀석이야, 이 녀석은.
“오늘 왜 안 왔어? 계속 기다렸는데.”
“죄송합니다.”
안하던 말을 한 번 하고 나니 두 번째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건우의 눈이 커졌다. 저런 말을 할 줄 아는 녀석이었나.
“내일은 꼭 나와. 지각하지 말고. 갈게.”
조금 전에 준서의 손이 닿았던 어깨를 툭툭 친 유정이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치마 아래로 드러난 다리가 곧았다.
나이는 좀 들었지만, 다리가 예쁜데.
“들어가자.”
공손히 인사하고 난 유정이 엘리베이터를 타자, 건우가 종훈을 잡아 끌었다. 건우는 이미 종훈의 시선이 어디에 닿았는지 알고 있었다. 유정이 그런 것에 무심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막 나선 유정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첫 담임이라 많이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았다.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단지를 나서던 유정은, 자신의 옆에 멈추어 서는 세단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차창이 내려갔다.
스토커에요?
목구멍에서 몽실대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유정은 눈빛으로 물었다. 대체 왜 당신이 여기 있는 거냐고.
“민종훈이 만나러 온 거 맞습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마침 만나러 오는 길이니까. 근데 서유정 선생님이 한 발 빨랐군요.”
교과서 정리로 부족해서 이제 등교하지 않은 학생들까지 직접 만나고 다니시는 건가.
“바쁘신데 뭘 이런 걸음까지. 제가 잘 만나고 왔어요.”
“감사합니다. 일거리를 덜어 주셔서. 가는 김에 같이 가죠.”
“아, 네.”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어서 유정은 옆자리에 올라탔다.
“저도 감사합니다. 이렇게 저희반 학생까지 신경써 주셔서.”
“그런 것이라기 보다는, 민종훈은 좀 특이한 녀석이라서.”
말 끝을 잘근 잘근 씹는 준서를, 유정은 자기도 모르게 흘겨 보았다. 이제 첫 담임이지만, 자기 학생을 함부로 판단하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은 과히 좋지 않았다.
“그런데 서유정 선생님께서 다행히 잘 해주고 계신 것 같아서 안심이군요.”
“앞으로도 저한테 맡겨주세요. 제가 담임이잖아요.”
유정은 애써 기분을 누그러뜨리고 일부러 온화하게 말했다.
“그래서, 무슨 대화를 하고 오셨습니까?”
그러나 준서는, 유정이 감정을 일부러 눌러 참고 말한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물었다. 유정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니까, 종훈이 일은 제게 맡겨달라고요.”
“아, 오해하셨군요. 궁금해서 질문한 겁니다. 대답하기 싫으면 안하셔도 되고요.”
그러나 찌르는 듯이 유정을 보는 시선에는 분명한 답을 요구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종훈이 아버님이랑 이야기 나눴어요. 종훈이는 나갈 때 잠깐 봤구요.”
유정은 그렇게만 말했다. 종훈의 사정을 낱낱이 이야기하기는 어려웠다. 좋은 사정도 아니었고, 또 종훈에게 편견을 가지게 되는 사정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를......”
“뭐 작년 사건 사고 그런 거요.”
유정은 그렇게 말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듯이 시선을 차창으로 돌렸다. 준서는 그런 유정의 태도에서, 자신이 아는 정보를 그녀도 알고 있음을 확신했다.
실상 유정이 들은 이야기는 종훈의 사정 뿐이었고, 종훈의 아버지는 작년에 그가 일으켰던 사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그렇군요.”
준서는 더 길게 이야기해봐야 유정도 기분이 별로일 거라는 생각에 마무리를 했다. 종훈이 그런 녀석인 것을 알았으니, 나름 착잡하기도 할 것이었다.
“서유정 선생님의 실력이나 열정을 존중합니다. 잘하실 거라고 생각하고요. 다만 첫담임에 너무 큰 녀석을 맡아서, 우려가 되어서 그런 것이니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별로 안 크던데요. 교장 선생님이 더 크세요.”
유정은 비식 웃으며 그렇게 농담을 하고는 혼자 웃었다. 준서는 미간을 구겼다.
“설마 웃기려고 한 얘깁니까?”
“뭐야, 뭐야 입술 꽉 깨물고 안 웃으려고 용쓰는 것좀 봐, 웃기면 웃으세요!”
“전혀, 조금도 웃기지 않습니다.”
“참고 있으면서. 이런 거 수업 시간에 하면 빵빵 터지거든요!”
“우리 학교 학생들이 참 착한가 보군요.”
끝까지 삐딱하게 나가는 준서를 흘긋 보다가 유정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친해지기 어려운 인간이야.
한 주가 흘러서 벌써 금요일이었다. 어떻게 흘렀는지, 뭘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게 바빴다.
다행히 종훈은 그 다음부터 학교에 잘 나왔다. 종종 지각을 하고, 수업 시간에 떠든다는 다른 교과 선생님들의 지적이 있긴 했으나 심한 정도는 아니라고 여겼다. 유정은 일부러 종훈에게 더 밝게 웃어주고 한 마디라도 더 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관심을 가질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3월 첫주는 특히 반 학생들에 대한 조사로 바빴다. 하루에도 가정통신문만 사람당 5-6장이 나갔고 그 중 대부분은 적은 종이를 돌려 받아서 통계를 내야 하는 것이었다.
쉬는 시간, 공강 시간에도 가정통신문을 정리하다 보면 시간이 다 갔다.
“서유정 선생님.”
가정통신문으로 조사한 사항을 표로 작성하고 있는데, 옆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또 염탐질인가. 홱 고개를 돌린 시선 끝에 준서가 아닌 그보다 조금 갸름한 남학생이 서 있었다.
“어, 성헌아.”
하성헌. 임시 반장이기도 한 그는 첫날의 분위기를 죽 이어가는 중이었다. 학생 누구나와 친했고 밝고 성실했다.
“에이, 그런 건 저 주세요. 작년에도 제가 다 했는데.”
유정이 하는 작업을 흘긋 보던 성헌이 말했다.
“니가?”
“네. 작년에도 반장이었거든요.”
“이거 내가 하는 건데 왜 널 시켜?”
마침 자리에 앉은 수연이 웃었다.
“에이, 애들 할 수 있는 건 그냥 애들 시켜. 이런 간단한 통계 정도는 괜찮아.”
“그래도...... 너희 공부해야 하는데.”
망설이는 유정의 손에서 성헌이 가정통신문을 빼앗아 들었다.
“야, 지금 뭐......”
“설마 공부 때문에 안 맡기신 거에요? 그런 거면 걱정하지 마세요. 저 중간고사 2주 전까진 공부 안하거든요.”
“그거 어떻게 하는 줄은 알아?”
“작년에 다 제가 했다니까요. 앞으론 제가 걷어서 통계까지 다 내서 드릴게요. 선생님은 선생님 업무 보세요.”
성헌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교무실을 걸어 나갔다. 무언가 당한 기분으로 가만히 교무실 입구를 노려보는 유정의 어깨를, 수연이 툭툭 쳤다.
“좋겠다 유정쌤. 든든한 아군이네?”
“그런데 정말 이래도 돼요?”
“왜 안돼? 너무 다 하려고 하지 말고 주위 보면서, 어떻게들 하는지 보고 그래. 설문지 걷어서 정리하는 거 정도는 반장 시켜도 되는 일이니까 너무 눈치 보지 말고.”
유정은 미간을 살짝 모았다. 수정이, 그래 수정이가 그랬었다. 수정이 하는 일은 성헌이 가져간 일 정도가 아니었다. 정말 담임 선생님이 해야 하는 업무까지 그녀는 다 했었으니까.
“근데 쟤가 하성헌이지? 교장 선생님 조카인가? 인기 많겠다.”
“뭐, 그렇긴 한 거 같은데.”
“성격도 서글서글하니. 저런 애부터 친해져봐. 반에 대한 것도 물어보고.”
“뭘 그래요?”
“뭐 그러긴. 쌤 있을 때랑 없을 때 반이 달라진다니까? 수시로 이야기 들어보고 해도 파악이 안되는데.”
그래도 유정은 그것까지는 내키지가 않았다. 첩자를 심어둔 것도 아니고, 몇몇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반을 확인하는 것은 어쩐지 감시자가 된 것 같았다.
이번주 바쁜 것 지나가면 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학생 한 명 한 명을 모두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봐야지. 유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유정은 파일을 열고, 다음 주부터 시작될 방과후 수업 조사서를 정리했다. 마침 수업을 마치고 들어온 인기가, 유정의 모니터로 얼굴을 쑥 내밀었다.
“어어, 잠깐만 유정쌤.”
등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는 촉감에 유정은 인상을 찌뿌렸다. 얼굴을 돌리니 담배 냄새가 훅 끼쳤다. 이미 옷에 완전히 배어 버린 냄새였다.
“나 좀 볼까.”
인기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네?”
“지금 방과 후 업무 하는 거 맞지?”
“네.”
“잠깐 나 좀 봐.”
인기는 먼저 걸음을 떼었고, 유정은 불안한 얼굴로 일어섰다. 무심코 수연을 바라보니, 수연도 걱정스런 눈으로 유정을 보고 있었다.
“가 봐.”
그러나 수연은 그렇게 말하고 손짓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불안함은 더 목을 죄었다.
“무슨 일일까요?”
“가보면 얘기할 거야.”
수연은 무언가 알고 있는 것 같았으나, 유정은 차마 더 물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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