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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19화 (19/102)

19. 재밌는 말이 들렸는데?2017.06.10.

“와우!”

유정은 말로만 듣던 타워팰리스 건물 밑에서 입을 딱 벌렸다. 여기가, 민종훈의 집이라고.

부모하고도 본인하고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결국은 집까지 찾아오고 말았다.

일과가 끝나고 나서 작년 종훈의 담임 선생님을 찾아갔었다.

“아휴. 그냥, 그냥 신경 꺼. 그래야 선생님이 오래 살아. 유정쌤 초임인데 어떻게 민종훈을 맡았어? 하긴, 다들 안한다고 떠밀다가 유정쌤 반으로 갔겠지. 나도 작년에 학을 뗐어. 종합의견은 정말 순화시켜서 쓴 거야.”

“그 정도예요?”

“그냥 알려고 하지 마. 말도 걸지 말고. 수업 방해하고 난리치면 그냥 벌점 주고 학생부로 보내 버려. 유정쌤이 터치하지 마. 어차피 작년에도 내내 학생부에서 살았어.”

그는 더 말하기도 싫다는 듯이 그대로 퇴근해 버렸다. 초임인 유정이 보아도, 그다지 열정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교사였다.

어떻게 교사가 학생을 포기하나. 유정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학생이 없으면 교사는 교사가 아닌데. 고민하다가, 유정은 포기하는 대신 초강수를 두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안 받으면 들어갈 수가 없는데.”

굳게 닫힌 유리문은, 입주자들의 카드가 아니면 통과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고민하던 유정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종훈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잔뜩 긴장한 채로 신호음을 듣고 있는데, 딸깍,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저음이 그녀의 귀로 스며들었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종훈이 아버님이시죠?”

“네, 맞는데 누구신지......”

“저는 종훈이 담임인 서유정이라고 합니다.”

잔뜩 굳어버린 목소리는 딱딱했다. 말끝에 쇳소리까지 난 것 같았다. 유정은 들리지 않게 큼큼 헛기침을 했다.

“담임 선생님이요? 아, 오늘이 3월 첫날이죠.”

“네, 그런데 종훈이가 학교에 안 나와서요.”

상대편에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종훈이 아버님?”

“네. 지금 어디십니까?”

유정은 몸을 살짝 떨면서 타워팰리스를 올려다 보았다.

“저, 실은, 종훈이 집 앞이에요. 혹시나 해서 찾아왔어요.”

“저희집이요?”

“네.”

“이런, 죄송합니다. 저희 애 때문에 선생님께서 고생하셨네요.”

예의 바른 사과를 들은 유정은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고쳤다. 아버지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인 것 같은데. 종훈이라는 녀석도 잘만 하면 정신 차리지 않을까.

문제 학생이 열정적인 교사를 만나서 제자리를 찾는 인생 역전 스토리라니. 어쩌면 종훈이에게 나는 평생 갚아도 못 갚을 은혜를 끼친 사람이 될 수도 있어.

유정은 뻗어나가는 상상을 애써 누르며 다시 큼큼 헛기침을 해서 목을 가다듬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한 것일 뿐인데요.”

“올라오십시오. 저도 집에 있습니다. 종훈이는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학교 간다고 나가긴 했는데 그 녀석 말은 저도 이제 믿지 않습니다.”

유정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리석 벽과 높은 천장을 보며 이 곳이 호텔 스위트룸인지 집인지 잠시 헷갈려하다가, 엔티크한 느낌의 가구들이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응접실인 모양이었다. 고급스런 쇼파들이 늘어선 가운데, 꼬부라진 다리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이 곳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여자가 차와 다과를 내왔다. 모든 것이 정갈하고 기품이 있었다.

여기가 민종훈의 집이구나.

“정말 감사합니다. 첫날부터 우리 아이한테 이토록 신경을 써 주시니.”

마주 앉은 남자는 많아야 오십대 초반으로 보였다. 젊었을 때에는 꽤 수려했을 얼굴은, 나이가 들어서 더 중후한 맛을 풍기고 있었다.

“담임라서 그런 건데요.”

“작년 담임 선생님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상처를 많이 받았죠. 그래도, 지난 일이니 지금은 그러려니 합니다.”

민건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는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입에 대었다.

유정은 잠시 눈을 깜박이며 생각을 골랐다. 우리 아이가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작년 담임 선생님은 종훈과 상종도 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누구 말이 맞는 걸까.

“우리 아이가, 실은 제 아들이긴 합니다만, 지금 같이 사는 아내의 아이는 아닙니다.”

생각에 묵묵히 잠겨 있는 유정의 위로 충격적인 말이 떨어졌다.

“네에?”

“혼외 자식이죠. 선생님께서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작년 담임 선생님은 지금도 모르실 겁니다.”

유정의 머릿 속에, 저절로 한 얼굴이 떠올라 왔다. 치밀하게 단정한 얼굴. 아무도 모르는 어둠. 유정의 마음 속에 종훈이 아주 가까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나쁜 학생은 없어, 나쁜 교사만 있을 뿐이지. 작년 담임 선생님이 잘못했어. 난 다르게 대해야지.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걸 내가 해낼 거야. 나에게는, 그럴 수 있는 이유가 있으니까. 수정이가 내게 특별해졌던 것처럼.

너도 나에게 특별해질 수 있을 거야.

“그렇......군요.”

유정은 떨리는 눈으로 건우를 마주 보았다.

“그래서 투정 부리는 겁니다. 사랑해 달라고. 그런데 작년에는 그게 없었어요. 툭하면 징계나 내리고. 공부 좀 못한다고 구박하고.”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이 건우는 씩씩거렸다.

“잘못해도 기다려 주고, 사랑을 주면 녀석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아요. 제 앞에서는 예의 바르고 착한 아이인데, 학교에서 그렇게 대하니 그런 겁니다.”

“맞아요, 교사가 참아야지요. 교사가 잘하면 문제 학생은 없어요.”

무엇인지 모를 충동에 휘감겨, 유정은 그렇게 말하고 주먹까지 꽉 쥐었다. 건우의 눈이 유정에게 화살처럼 꽃혔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동까지 한 듯이 건우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도는 것처럼 보였다. 유정은 무언가 이루어 낸 듯한 뿌듯함에 건우를 마주보고 웃어 주었다.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종훈이 아버님 말씀 들으니까 저도 참 좋아요. 종훈이를 얼른 만나보고 싶어요.”

“내일은 제가 어떻게든 달래서 보내겠습니다. 좋은 선생님이 오셨다고 하면 녀석도 마음을 돌릴 거에요.”

그래, 학교에 대한 상처 때문이었어. 그것 때문에 마음을 닫은 거야. 유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잘해낼 수 있을 것이다. 난 진심이 통하는 교사니까.

“좋은 데서 사네.”

준서는 타워팰리스 건물을 올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민종훈. 그에 대한 정보는 이미 다 수집했다. 작년 담임과 학생들까지 만나며 사실 정보를 수집했고 그것은 종합의견란에 적힌 말보다 더 놀라운 사실을 보여주었다.

“부모가 와서 사정 사정을 하는데, 어쩔 수 없이 그 항목은 뺐죠.”

담임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마 뒷돈을 받았겠지. 준서는 차가운 어투로 알겠다고 말하고는 바로 차를 돌려 이 곳으로 온 참이었다.

학교 안의 문제는 학교에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문제라면, 그리고 권력을 가진 부모가 그런 문제를 은폐하려고 한다면, 그건 다른 문제가 된다.

지난 일을 되짚어 그 때도 내리지 않았던 징계를 내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올해만큼은 조용히 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다가가서 동호수를 누르려고 하는데, 키가 훤칠한 남자 하나가 옆으로 다가섰다. 값비싸 보이는 가죽 자켓을 입은 그는 성큼 성큼 다가와서 준서를 흘긋 보고는 카드를 꺼냈다. 문이 열리자, 준서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주민이예요?”

남자의 눈에 날이 서 있었다. 그러나 표정에 비해 얼굴은 앳되 보였다. 준서는 생활기록부에 흐릿하게 인쇄된 얼굴을 떠올렸다.

“민종훈?”

남자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잠시 후, 입꼬리를 살짝 올린 그는 머리를 가볍게 넘기며 숨을 토했다.

“뭐야, 담탱이? 벌써 가정방문?”

준서는 종훈의 눈길을 피해 엘리베이터로 걸었다.

“뭐야, 사람 무시?”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되어서 한국말이 서툰 모양인데.”

멈추어 선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준서가 뇌까리듯 말했다.

“한 번만 더 그 따위로 말해라.”

“하, 담탱이, 해보자는 거야?”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종훈이 입꼬리를 올리며 어쩐지 비열해 보이도록 웃었다. 마치 이런 도발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준서의 시선이 종훈을 향했다. 종훈도 눈을 똑바로 떴다.

잠시 정적이 공간을 지배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유선, 표해영, 설주인.”

준서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듣는 종훈의 얼굴빛은 점차 색이 죽어가고 있었다.

“뭐야?”

종훈은 준서에게 다가서며 입술을 와락 깨물었으나 준서는 태연한 표정으로 종훈을 마주했다.

“걔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 않아?”

“뭐?”

준서의 눈에 웃음이 번졌고 종훈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아, 알아? 연락해요?”

“그럼, 걔네들 입 한 번 뻥긋하면 넌 바로 철창행인데.”

“내, 내가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 아빠가 그렇게 해주겠다고......”

“내려.”

준서가 눈짓으로 가리켰을 때에야 종훈은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는 것을 알았다.

탈 때와는 다르게, 바들 바들 떠는 몸으로 종훈은 내렸다. 몸은 크지만 나이는 아직 열 여덟이었다. 몸집을 부풀릴 줄은 알아도 머리는 쓸 줄 몰랐다.

준서도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종훈이 건드려서 전학을 갈 수 밖에 없었던 여학생들이고, 종훈의 약점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 집에 가서 말씀을 드릴 생각인데.”

준서는 엘리베이터 앞에 멈추어 선 채 종훈을 똑바로 노려 보았다.

“저, 그거, 아빠도 다 알아요, 아빠가 막아주신 거라......”

“알아, 나도.”

“그런데 왜 굳이......”

“그래도 안부 정도는 말씀을 드려야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마음이 바뀌진 않았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마음이 바뀌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 선생님, 제발.”

종훈이 집 앞을 막아섰다.

“제가 잘 할게요. 내일부터 학교도 나갈 테니까 제발.”

“그리고 나 너 담탱이 아니야.”

종훈은 말없이 눈만 꿈벅거렸다.

“내일 진짜 담임 선생님 만나거든, 똑바로 인사 드리고 오늘 등교 못한 것도 정중하게 사과드려. 지켜볼 테니까.”

준서는 손을 뻗어 종훈의 어깨를 툭툭 치고 몸을 돌렸다. 엘리베이터문이 닫히자, 종훈은 표정을 바꾸어 욕설을 내뱉었다. 그런데 내려갈 줄 알았던 층수는 그대로였고, 문은 다시 열렸다.

“재밌는 말이 들렸는데?”

준서의 눈을 마주한 종훈이 뒷걸음질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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