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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18화 (18/102)

18. 한 마디로 쓰레기야.2017.06.10.

부장 회의가 길어졌다. 준서의 강압적인 운영 방식에 대한 불만, 갑자기 많아진 업무에 대한 토로가 이어졌다. 곧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수업 준비할 시간도 빠듯하지 않냐는 성토도 이어졌다.

수업 준비는 미리 미리 해 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준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함부로 그런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정 그러면 업무에 대해서는 외부 업체 도움을 받는 걸로 하겠습니다. 특히 방과후 수업 관리는 다른 학교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요.”

방과후 수업 관리에서 유독 횡령이 많았던 것을 준서는 알고 있었다. 대부분 전 교장과 연구부장 정인기의 뱃속으로 들어간 돈이었다. 수업료를 현금으로 받아서 책정된 것보다 더 받거나, 수업을 취소했을 때 환불되어야 할 돈을 돌려주지 않는 등의 부정으로 꽤 많은 돈을 챙겼을 것이었다.

“아니, 그러면 비용이 발생할 텐데......”

인기의 말에 준서는 말없이 그를 쏘아 보았다. 작년에 네가 해먹은 돈의 십분의 일만 토하면 해결할 수 있는 일 같은데.

인기는 결국 작년의 돈을 토해내지 않았다. 그리고 횡령한 액수를 적은 엑셀 시트만 달랑 제출했다. 그것도 준서가 만날 때마다 다그쳐서 얻은 수확이었다.

그 이후, 인기는 준서가 보지 않는 곳에서는 배로 그를 씹어댔지만 다행히 보이는 곳에서는 어느 정도 말을 듣는 눈치를 보였다. 계속 다닐 학교라면 계속 이렇게 척을 지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준서가 가진 설립자 빽이 통해서 그렇기도 했다.

“학기초라 수업 연구나 학생 관리에 교사 인력이 집중되어야 한다는 의견은 저도 동의합니다. 비용이 발생하더라도 추진할 겁니다. 업무를 소홀히 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어느 업무를 어느 업체를 선정하느냐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이어지다가, 각자 맡은 업무에서 필요한 인력을 정리해서 다시 모이기로 하고 회의를 마쳤다. 그러고 나니 벌써 입학식 및 개학식 시간이 다 되었다.

준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교장 선생님 훈화 준비를 하나도 못했는데. 단상에 올라가서 그냥 할 말 없다고 하고 내려와 버릴까.

자존심 버리고 유정에게 쓴 거나 보여달라고 할 걸 그랬다. 준서는 메신저로 불러볼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가서 죽을 쓰든 말든 내가 해야겠지,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니까.

“교장 선생님, 지금 나오셔야 합니다.”

노크 소리가 울리고, 교감이 들어섰다.

“알겠습니다. 곧 나가겠습니다.”

준서는 심호흡을 했다. 남은 시간 길어야 5분. 머릿 속은 하얘져 있었다.

유정은 2학년 3반 학생들을 인솔해서 강당으로 들어섰다. 출석 체크를 해보니 첫 날인데 두 명이 오지 않았다. 한 명은 작년에도 겨우 출석 일수를 넘겨서 2학년으로 진급한 학생이다. 종합평가도 굉장히 좋지 않았다. 다른 한 명은 출석 일수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안녕하세요?”

늦은 학생 답지 않게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키가 큰 학생 하나가 유정에게로 걸어왔다.

“누구? 아.”

유정은 생활기록부에서 보았던 얼굴을 기억해 냈다. 아마 1년 내내 자신을 불편하게 할지도 모르는.

성인만큼 큰 키에 비해 얼굴은 아직도 솜털이 보송했다. 깎아지른 턱선과 또렷한 이목구비는 집안 내력인가 싶기도 했다.

“하성헌입니다.”

예의 바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가 든 그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어렸다.

“서유정 선생님이시죠?”

유정은 자기도 모르게 존댓말을 할 뻔했다. 매끈한 태도, 꿀을 바른 듯한 목소리. 이 집안 사람들은 인사 훈련 같은 거라도 하나. 준서도 그러더니.

설립자의 증손자이자 교장인 준서의 조카. 아버지는 현직 국회의원이며 같은 재단의 신영 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었다.

그러나 생활기록부에 적혀진 기록은 유정을 당황하게 했다. 성적도 좋고 수상도 꽤 했는데, 오히려 종합의견란에 적힌 말은 칭찬보다는 우려가 가득했다.

“시작할 거 같으니까 얼른 자리 앉아.”

유정은 성헌을 자리에 앉히고는 그 옆에 섰다.

입학식이 시작되었다.

애국가를 부르고 난 후 자리에 앉은 학생들 앞으로 준서가 걸어 나왔다.

교장 선생님을 처음 본 학생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2월에 전 교장 퇴임식을 했기 때문에, 새 교장이 취임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새파랗게 젊은 사람인 줄은 처음 알았기 때문이었다.

준서는 그 모든 소요를 묵묵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그의 목소리는 스피커를 통해 강당에 가득차도록 크게 울렸다.

“교장 하준서입니다.”

학생들의 반짝 반짝한 눈이 앞을 향해 있었다. 담임을 비롯한 교사들은 실소했다. 교장 선생님 말씀에 이토록 학생들이 집중한 적이 있었나.

간단한 인사말을 한 준서는, 잠시 목을 가다듬으며 학생들을 보았다. 그들의 눈에 어린 호기심이, 준서의 그 시절을 생각나게 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입니다.”

무언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아 학생들은 눈을 반짝였다. 공짜로 줘도 안 읽을 교훈적인 이야기를 줄줄 내뱉는 훈화하고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자살을 했습니다.”

숨소리 하나 나지 않도록, 강당이 적막해졌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기대했던 학생들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교감 석훈은, 준서가 또 무슨 일을 벌일까 불안해서 안절부절하며 준서와 학생들을 번갈아 보았다.

“자살은 최대한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게 처리되었습니다만, 그것이 제 마음에 끼친 영향까지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좌절했고,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학교를 그만 다닐 생각이었고 그저 이름 없이 아무도 모를 곳에 가서 쓸쓸히 생을 마칠 생각이었습니다.”

준서는 긴 숨을 쉬었다.

부장 회의가 끝나고 5분 동안, 그는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준비한 것은 그저 눈을 감고 생각을 고른 것 뿐이었다.

이 곳에 이르기 직전, 백지 같던 준서의 머릿 속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어떤 말을 전하기보다, 그냥 내 진심을 이야기하면 어떨까.

“그런데 제 할아버지께서 그런 저를 꾸중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힘을 기르라고, 그래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요.”

훈화 말씀이라는 거창한 이름이라도, 결국은 학생들을 만나는 자리라면.

“그것이, 제가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이유입니다.”

내가 누군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장 간단하고 명확하게 전달하는 건 어떨까.

“좋은 학교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 학생과 같은 불행한 선택을 하는 학생이 없도록 교육 문화를 바꾸고 싶습니다.”

준서의 눈과 그를 바라보는 눈이 만났다. 그 안에 있는 열정을 학생들은 이해한 듯이 손을 들어 박수를 했다.

아, 저것이 '할아버지가 시켰다'는 사정이었군. 그 말을 들었을 때에도 어쩐지 신뢰는 가지 않았는데. 저럴 줄 알았어. 시킨 것을 고분고분할 인간은 아니지.

유정은 아침에 학생들 앞에 서서 이야기를 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누군가를 다스리는 존재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이야기하고 관계를 맺으려 한 것. 유정은 어쩐지 준서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 반갑고 기뻤다.

“휴, 하루가 어떻게 간지 모르겠어.”

3월 2일이 끝났다. 내내 긴장했던 것이 발 끝으로 밀려가는 느낌이었다. 유정은 힘없는 몸을 의자에 부리고 더운 숨을 삼켰다.

종례를 마치고 온 수연이 캔음료수를 유정의 책상 위에 놓아 주었다.

“그러게요. 진짜 어떻게 간지 모르겠어.”

“몇 년이 지나도 나는 3월 2일은 적응이 안돼. 참 반 애들은 어때?”

“좋아요. 순한 거 같아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에이, 처음이라 그런 거지. 이제 눈치 슬슬 보면서 기어오르기 시작한다고. 그 때 확 눌러야 해. 안 그러면 1년 내내 고생이니까.”

유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게 잘 안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유정은 선천적으로 모진 성격이 못 되었다. 누군가를 강압적으로 누르는 것은 체질에 맞지 않았다.

선배 교사들은 하나 같이, 연기로라도 그렇게 하라고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들의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유정은 어쩐지 그게 싫었다. 학생들을 다루어야 하고 관리해야 하는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서.

“그렇겠죠?”

그러나 수연과 그런 것으로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아서, 유정은 그렇게만 대답하고 입을 닫았다.

유정의 머릿 속에, 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리 보아도 눌러질 것 같지 않은 능글능글한 웃음. 성헌은 종례 전에 벌써 학급 학생들을 모두 사귄 듯했다. 강적이 될까 아니면 가장 필요한 아군이 될까. 지금으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삼촌!”

한창 일을 하던 준서는 문이 벌컥 열리며 들리는 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준서와 키가 거의 엇비슷한 남학생이 교장실문을 닫고 큰 보폭으로 성큼 성큼 걸어왔다.

“학교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마라.”

“진짜, 교장이야? 삼촌이?”

준서의 말은 귓등으로 들은 듯이 성헌은 명랑한 표정으로 말했다. 준서의 얼굴이 우그러졌다.

“말은 드럽게도 안 듣지. 3월 첫날에 지각이나 하고.”

“허, 어떻게 알았어?”

“교무행정시스템으로 출결 관리 다 되니까. 서유정 선생님이 제일 먼저 올리셨던데. 참, 너희 반에 민종훈이라고......”

이번에는 성헌의 얼굴이 찌뿌려졌다.

“하, 그 새끼. 작년에도 아버지 찾아와서 빌고 빌어서 겨우 진급한 거 같던데. 거의 학교 안 나왔거든.”

“그런데 어떻게?”

“출석부야 만지면 되는 거니까. 아버지가 그냥 왔겠어? 몇 푼이라도 찔러줬겠지.”

“애새끼가 말하는 거 하고는.”

준서는 눈을 흘겼으나 성헌은 다시 얼굴을 펴고 웃었다.

“나도 알 거 다 알거든.”

“괜히 어른인 척 하지 마라. 그건 그렇고, 민종훈은 어떤 놈이야?”

“뻔하지 뭐. 집은 좀 사는 것 같은데, 한 마디로 쓰레기야.”

준서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반편성 누가 한 거야, 신입 교사 반에 이런 녀석을 넣으면 어쩌자는 거야.”

“서, 설마, 교장 선생님, 우리 삼촌이, 우리 담임쌤을......”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가. 나 바빠.”

준서가 손을 내저었으나 성헌은 싱글거리며 아예 쇼파 위에 앉아 버렸다.

“알았어, 삼촌. 내가 담임쌤 하는 말 토씨 하나 안 빼고 물어다 줄게.”

“시끄러워. 나 올해 가을에 결혼하는 거 몰라?”

“집안끼리 하는 거잖아. 참, 삼촌도 재미 없게 산다니까.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요즘 누가 그렇게 결혼하냐? 담임쌤 이쁘고 좋은데.”

“나가라고, 좀!”

준서가 벌떡 일어서자 성헌은 그제서야 놀란 듯이 쇼파에서 일어섰다.

“알았어, 알았다, 첫날이라 이 귀하신 몸이 친구들 다 뿌리치고 놀러오니까 내쫓네.”

성헌은 그렇게 말하고 문으로 살살 걸어가다가 문을 열기 직전 갑자기 돌아섰다.

“그럼 삼촌, 내가 우리 담임쌤한테 대쉬해도 돼?”

다시 자리에 앉아 일에 열중하던 준서가 전과는 확연히 다른 사나운 눈빛으로 성헌을 노려 보았다.

“뭐라고?”

“하, 진짜 무서워. 얘기만 했는데.”

성헌이 입을 딱 벌렸다. 성헌의 능글 맞은 태도에도 준서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지 열이 나는 머리를 넘기고 상대를 쏘아보았다.

“학교 선생님을 뭘로 보고 그 따위 말이야? 고등학생씩이나 되어서 그렇게 개념이 없어?”

준서가 진심으로 화를 내는 것을 느낀 성헌은 입을 조용히 다물었다.

“다른 녀석 쓰레기니 뭐니 판단할 거 없어. 너나 잘해. 지각하지 말고.”

“알았어. 마음 상했으면 미안.”

성헌은 그렇게 말하고 조용히 문을 열었다. 준서는 성헌을 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문이 닫히고 나서 준서는 눈을 감아 버렸다.

갑자기 화가 뻗쳐오른 이유는 뭘까. 학생이 되어서 교사를 감히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괘씸해서 그랬겠지. 그런데 그 이유만이었을까.

준서는 고개를 저었다. 일하는 곳에 자꾸만 사적인 감정이 끼어들면 안된다. 더군다나 수정의 친구라면. 준서는 깊이 숨을 내쉬고 나서,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교육행정시스템에 접속해서 생활기록부를 확인했다. 민종훈은 과연 출석 일수 턱걸이로 2학년에 진급했다.

징계를 받은 건도 있고, 종합의견도 매우 좋지 않다.

오늘은 학교에 오지도 않았고.

유정이 잘 해내야 할 텐데. 준서는 가만히 그의 주소를 검색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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