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첫 인사2017.06.09.
“걔요?”
준서가 되묻자 유정은 놀라서 말도 못하고 얼굴을 감싸 잡았다.
차는 어느덧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준서의 머릿 속에는 조각 조각 나뉘어 있던 퍼즐이 맞추어졌다. 설마 했던 것이 정말이었구나. 안 그래도 궁금해서 물으려던 참이었는데.
“신기하네요.”
준서는 주차장으로 차를 몰면서 무심히 말했다. 유정은 입술만 달달 떨고 있었다.
“성격이 정 반대로 보이거든요. 하긴 그런 부분이 보완이 된 점도 있었겠지만.”
“아주 반대는 아니에요. 수정이가, 막 표현을 다 하는 친구가 아니라서.”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주차를 하고 나서 준서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벨트를 풀었다.
“아직 10분이 남았네요. 덕분에 아침 든든히 먹고 출근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네, 뭐.”
“여러 가지로 바쁜 하루가 될 텐데, 힘내십시오.”
준서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표정과 말투로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유정도 차에서 내려 묵례를 하고 빠르게 교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유정의 입술이 이에 와락 씹혔다.
그는 자신을 그저 직장 동료로 대하고 있는데, 나는 왜 오버를 하면서 약혼녀까지 들먹이다가 친구라는 사실을 들키고 마는가.
그래, 차라리 잘된 것일 수도 있다. 이제는 동료로, 또 약혼녀 친구로 적당히 거리를 둘 수 있을 테니까.
유정은 갑자기 추워져 오는 것을 느끼며 몸을 옹송그리고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교장실로 들어선 준서는, 책상 위에 놓인 일정표를 보았다. 이전 교장에게는 이렇게 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준서에게는 필요 없는 종이였다.
마침 노크 소리가 울리고 교감 석훈이 들어섰다.
“아침에 부장 회의가 있습니다. 10시부터는 입학식 및 개학식이 있는데 전교생이 강당에 모이게 됩니다. 식이 끝나고 나서는......”
“알고 있습니다.”
준서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앞으로 이런 일정표는 준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교감 선생님도 할 일이 많으실 텐데 제 비서 업무까지 맡겨드릴 이유는 없죠. 제 일정은 제가 알아서 관리합니다.”
“아, 네......”
“부장 회의 때 봅시다.”
준서는 그렇게 말하고 석훈이 나가기를 기다려 책상 앞에 앉았다. 뻑뻑한 눈을 내리 감았다 뜨고, 머그컵을 집어 들었다. 아침에 빵만 먹어서 입안이 텁텁했다. 원두를 내린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지만 있는 것은 믹스 커피 뿐이었다. 이거라도 먹어야지 하고 일어섰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더 보고할 게 남았나. 준서는 컵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들어오세요.”
석훈이 아니었다. 들어선 사람은 또각 또각 구두 소리를 울리며 다가와서 머그컵을 책상 위에 내려 놓았다.
“저번에 커피 주신 것에 대한 값.”
준서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게 싫으시면 동기 사랑이라고 생각하셔도 되고요.”
여전히 말이 없는 준서를 향해 유정은 입꼬리를 올리며 마지막 말을 뱉었다.
“그것도 싫으면 약혼녀 친구의 호의라고 생각하세요.”
“커피입니까?”
“제가 가루로 된 원두 커피를 마시는데, 좀 남았더라고요. 그래서 남는 컵에 탔어요. 참, 이 컵은 작년에 제 책상 속 먼지 구덩이에 있던 거에요. 물론 닦긴 닦았는데, 다 닦였을려나 모르겠네요.”
“준비는 다 하고 이러시는 겁니까?”
딱딱한 말투에 유정의 미간이 다시 찌뿌려졌다.
“절 뭘로 보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교과서 다 외웠어요.”
“교과서 말고.”
“네?”
“오늘 수업만 할 거 아니잖습니까.”
유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반 학생들하고 첫 만남이잖아요? 할 말 준비했냐고요.”
유정의 얼굴이 충격을 받은 듯이 굳어졌다. 담임은 처음이라, 그 부분까지는 생각을 못한 것이었다.
“아니, 뭐, 이름 소개하고......”
“안했군요.”
“아, 진짜, 수업 때문에 머리 터질 것 같았다고요. 아휴, 뭐라고 하지?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세요?”
준서는 말없이 일어서서 책꽂이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서가를 살피던 그의 손에 얇은 책 한 권이 들려졌다.
“좋은 이야기 담은 책인데, 급한 대로 쓰십시오.”
“아하, 감사합니다. 아아, 차암!”
유정은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들어선 김에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겠다.
“저, 제가 생각하기에는 교장 선생님은 이런 거 전혀 생각 안하시는 것 같긴 하지만, 실은 작년까지 훈화 말씀을 제가 썼거든요.”
“훈화 말씀이라뇨.”
“오늘 강당에서 개학식 입학식 있잖아요.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이요.”
준서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제가 무슨 얘길 할지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학생들하고 첫 만남이나 신경 쓰세요.”
“아, 혹시나 말씀드린 거였어요. 그럼 올해는 필요 없는 거죠?”
유정은 다짐하듯이 묻고 나서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몰라서 써두었는데......”
문이 닫혔다. 유정이 사라진 곳을 준서의 시선이 아련하게 좇았다.
“하......”
머리를 넘기며 준서는 한숨을 토했다. 깜박 잊었다. 이것 저것 신경 쓰다가, 정작 훈화 말씀은 생각을 못한 것이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미리 써 두었다고 하니 유정이 무슨 말을 썼는지 보기라도 하고 싶었으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훈화 말씀 같은 거...... 없는 게 제일 낫지 않나?”
준서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유정이 가져온 커피를 입에 대었다.
고소한 맛이 혀에 감겼다.
“그것 봐, 이번 교장은 그런 거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수연이 유정이 쓴 훈화를 읽으며 말했다.
“그런데 정말 유정쌤 이런 거 하나는 대단해. 어쩌면 이렇게 잘 써?”
“그러면 뭘해요. 오늘 만날 학생들한테 할 말은 생각을 못했는데.”
“그건 나도 생각 안했는데. 그걸 왜 생각해, 그냥 몇 번 으르렁 거리면 알아서 저 사람은 살살 기어야 할 사람이구나 생각하는 걸. 첫날에는 겁만 주고 나오면 되지.”
수연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정이 가지고 온 얇은 책자를 보며 관심을 가졌다.
“이건 뭐야? 혹시 아침에 할 말 생각해서 가지고 온 거? 와, 센스 넘치는데?”
“아니, 제가 가져온 건 아니고.......”
“오, 이거 괜찮다. 철새가 함께 이동할 때 누구도 뒤쳐지지 않게 앞에 있는 새를 계속 바꾼다는데? 이거 학급에 적용하면 딱이겠어. 나 이것 좀 쓸게.”
수연은 책자를 복사한 후에 유정에게 넘겨 주었다.
“아휴, 아침부터 그 새끼 얼굴을 봐야 하니. 유정쌤, 내 대신 부장 회의 좀 들어가라.”
유정이 다시 책자를 받아들고 살피는데, 언제 왔는지 책상 앞으로 다가온 인기가 말했다. 물론 농담이지만, 유정은 얼굴빛이 파리해지고 말았다.
“네? 제, 제가 왜요?”
“신입이 시키면 해야지. 들어가.”
“그러니까 제가 왜요.”
“어디서 젊은 놈의 새끼가 까불어. 내 한주먹도 안되는 놈의 새끼가.”
인기는 유정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면서 교무 수첩을 챙겼다.
“참, 유정쌤, 오늘은 빵 같은 거 안 싸왔어? 학기 초에는 종종 싸왔었잖아.”
“아, 네, 아, 오늘은 못 싸왔어요.”
“좀 싸와. 아휴 혈압 올라. 뭐라도 먹어야지 원.”
그러면 지가 싸오든가. 유정은 속으로 욕을 삼키며 책자를 거칠게 열었다. 그러나 머릿 속은 하얗게 비어져 가기만 했다.
인기를 비롯한 부장들이 회의에 들어갔다. 학생들이 등교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으나, 유정은 초조함에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나도 모르겠다, 막상 만나면 무슨 말이든 나오겠지, 안 나오면 말고.’
유정은 심호흡을 하고 교실에 들어섰다. 와글대던 학생들이 자리에 앉았다. 유정은 작년에도 2학년을 가르쳤기 때문에, 올해 2학년 학생들은 처음이었다.
팽팽한 긴장감.
유정은 기대와 불안이 어린 눈동자를 마주하며, 머릿 속이 하얗게 지워지는 것을 느꼈다. 준서가 준 책자를 읽어 보았으나 기억에 남는 것은 어느 것도 없었다. 유정은 공연히 헛기침만 큼큼 했다.
“서유정입니다.”
지나치게 딱딱한 인사인가. 뒤돌아서 칠판에 이름을 쓸까 했으나 너무 고전적인 방법이라서 칠판으로 돌아서던 몸을 다시 학생에게 돌렸다.
“써 주세요!”
그러나 누군가 소리쳤고, 그 소리를 시작으로 몇몇 학생들이 칠판에 적어달라고 소리를 쳐댔다.
생각보다 밝군.
유정은 깊은 숨을 내쉬고 칠판에 이름을 적었다. ‘서유정’ 돌아서니 학생들의 눈은 더 반짝반짝해져 있었다.
“저, 실은 어제 잠을 거의 못 잤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유정은 자신의 상태부터 솔직히 말했다.
교사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다가가는 것. 장점은 얼어버린 관계를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이고, 부작용은 학생들이 지나치게 교사를 가깝게 느낄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통제’는 어려워진다.
그러나 유정은 학생들을 별로 통제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교사와 학생도 하나의 관계이니까. 진실하게 다가가면, 그들도 진실을 보여주지 않을까.
과연,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몇몇 학생들이 ‘나도요’라는 동의를 했다.
“네, 첫날이라서 그럴 거에요. 저도 예전에 돌아보면 담임 선생님 누굴까가 제일 궁금했었거든요. 이상한 담임 걸리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도 했고요. 아, 저는 종교가 없어요. 그런데 필요할 때면 기도가 나오더라고요.”
몇몇 학생들이 웃기 시작했다. 나도 기도했다는 수군거림이 이어졌다. 학생들의 눈에서 긴장감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유정은 숨을 후욱 뱉었다.
“아마 여러분들도 그랬을 거에요. 제가 여러분이 만족할 담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첫담임이라 부족한 점도 많겠지만, 누구보다 마음은 크다는 거,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인상적인 어구도 없고 멋있는 말도 모르지만, 유정은 진심은 통하리라 믿었다. 그리고 유정의 바람대로, 학생들의 눈에는 호의적인 빛이 어렸다. 유정은 어색하게 웃었고 그러자 곳곳에서 ‘예뻐요 선생님’ ‘몇 살이세요’ ‘남자 친구 있으세요’ 같은 질문이 터져 나왔다. 유정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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