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걔요?2017.06.07.
“약혼자, 만나는 거야?”
“응, 여기로 오기로 했어.”
전화를 끊은 수정은 차창을 보면서 가볍게 입을 벌렸다. 그녀의 눈에도 피곤이 어려 있었다.
“왜, 오늘 꼭 만나야 한대?”
“좀 바쁜 사람이라. 괜찮아.”
“피곤하면 다음에 보지.”
유정의 걱정 어린 표정을 수정의 담담한 눈이 받았다.
“아니. 나야 집에서 노는 것이 일인데 피곤하긴.”
집에 있는 것이 가장 피곤하겠지. 유정은 혼자 생각했다. 차라리 준서에게 들들 볶이면서 학교에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 살얼음판 같은 집에 있는 것보다.
그래, 수정에게는 결혼이 답일 지도 몰랐다. 사랑 운운하는 것은 그녀에게는 사치처럼 느껴질 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망할 사랑인지 뭔지 때문에 수정이 겪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 그렇다.
“결혼은, 어디서 하는데?”
무심코 질문을 꺼내고, 유정은 어쩌면 자신이 지금 무언가 실수를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 다른 이에게 같은 것을 물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유정의 그 불안을, 수정은 증명하듯이 무심한 어투로 대꾸했다.
“강남 B호텔.”
올해 가을. 강남 B호텔. 유정은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듯이 어지러웠다.
“좋은, 데서 하네.”
“누가 또 거기서 결혼해?”
수정은 유정의 눈 안에 서린 불안을 정확히 읽어냈다. 유정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 거기, 유명한 데잖아. 그래서.”
“유명한 데인가. 난 이번에 처음 알아서.”
“그것도 다 정해진 거야?”
“그렇지. 그래서 난 할 게 없어. 편해.”
수정은 여유롭게 웃고는 피곤한 듯 눈을 내리 감았다가 떴다.
“참, 너 어느 학교랬지?”
수정의 시선이 유정의 얼굴에 곧게 떨어졌다. 유정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어쩐지 대답을 하는 순간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모른다고 하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았다.
긴장한 혀끝을 구부린 채, 유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라 모르겠다, 고 생각하는 순간 수정의 휴대폰이 울었다.
“왔나 보네.”
“그럼 나는 가볼게.”
유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수정이 붙들기도 전이었다. 손을 내저으며 빠르게 카페 입구로 나오니, 주차된 차 운전석에서 누군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깔끔하게 맞춤 슈트를 갖춰입은 모습이었다.
얼른 반대편으로 방향을 트는데, 보폭이 큰 걸음이 그녀에게 다가섰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의심은 확신이 되고,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유정은 눈을 깜박이다가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 뭐, 약속 있어서요, 그런 교장 선생님은......”
“저도 약속 있어서요.”
그는 대답하고는 눈을 깜박였다.
“안 피곤합니까? 일주일 내내 강행군하고 또 약속까지.”
“아니 주말에 내 마음대로 놀지도 못해요?”
팩 쏘아붙이듯이 말하자 준서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책망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놀 때 놀아야죠. 이제 놀 날도 없을 텐데.”
유정은 대답 없이 입술을 씹었다. 여전히 그는, 얄밉다. 재수도 없고.
“안에 기다릴 텐데 들어가세요.”
유정은 그렇게 말하고 먼저 가려다가, 순간 소름이 돋아 입을 막았다. 돌아보니 준서도 같은 것을 느낀 듯이 말없이 유정을 보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계십니까?”
곧게 떨어지는 눈빛에 유정은 몸을 흠칫 떨었다. 눈을 깜박이던 그녀는 애써 미소하며 대꾸했다.
“아니,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약속 있다고 하니까 드린 말씀이죠.”
“그렇군요.”
준서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즐겨 쓰는 페라리향이 유정의 코끝에 스쳤다.
“오래 기다렸어?”
준서는 자신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서는 수정에게 다가갔다.
“아뇨.”
“이 앞에서 아는 사람을 잠깐 봤어.”
“아는 사람요?”
수정의 미간이 살짝 모아졌다가 풀어졌다.
“신기하네요.”
“응. 여기서 볼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누구요?”
수정의 시선이 준서에게 닿았다. 순간, 준서는 그녀가 이렇게 호기심을 보이는 것이 이제껏 만난 이후 처음이라는 생각을 했다.
무언가 늘 벽이 있었던 관계였는데. 준서는 팔을 들어 손가락으로 가볍게 테이블을 두들겼다.
“그냥, 가볍게 아는 사람.”
말을 해도 상관 없을 텐데,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충동에 준서는 그렇게만 대답하고 팔을 내렸다.
“갈까? 식사 해야지.”
수정은 대답 없이 준서를 보았다. 무언가, 불편했다.
이제까지의 준서는 늘 매너 좋고 깍듯했다. 이 관계가 정해진 관계라는 것을 잊지 않았고 거기까지만 관계의 속도를 진척시켰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약간 서두르는 것도 같고, 허둥지둥하는 것도 같았다. 어울리지 않는 거짓말까지 하는 듯하다.
“조금 앉았다 가도 돼요. 친구랑 커피 마셨거든요.”
수정의 앞에는 아직 반 정도 남긴 커피가 있었다.
“오랜만에 동창들 만났어요. 둘은 약속 있다고 가고, 한 친구랑 직전까지 있었어요. 준서 씨 소개시켜 줬으면 좋았을 걸, 아까 통화하는 거 보자 마자 급하게 나가는 바람에.”
“급하게?”
준서의 눈이 조금 전의 기억을 좇았다. 급하게 카페를 나서던 여자. 혹시. 준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3월 2일.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전 교사들이 긴장하는 바로 그 날. 첫 만남과 첫 수업, 모든 시작이 이르는 날.
유정은 지끈 울리는 골을 누르듯이 머리를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왜 알람이 울리지 않을까 생각하며 휴대폰 시계를 본 그녀는, 괴성을 지르며 이불을 젖혔다.
“망했다, 지각이야!”
3월 첫날부터 지각이라니. 그것도 학생도 아닌 교사가. 급히 옷을 주워 입고 BB크림만 겨우 바른 후 현관으로 뛰쳐나가는데 그녀 앞에 무언가가 달랑거리는 것이 보였다.
“가져가서 먹어.”
모닝롤 안에 샐러드를 넣은 빵이었다. 그녀가 바쁠 때 엄마 혜신이 종종 해주는 아침 대용이었다.
“엄마, 땡큐!”
“얼른 가라.”
요란하게 집 밖으로 뛰쳐 나갔다. 버스를 타면 백퍼센트 지각이었다. 콜택시 회사에 연락을 해 보았으나 만차라고 했다. 유정과 같은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얼른 차부터 구입해야 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벅벅 긁던 유정의 머릿 속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정말 그럴 리는 없겠지만.
유정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밑져야 본전이지.
신호가 갔다.
“여보세요.”
“저, 교장 선생님, 저 서유정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몇 시죠?”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네?”
“지금 시간이 몇 시냐고...... 허!”
“혹시 지금 일어나신 거예요?”
준서가? 그 전교사 대상으로 호통치던 하준서가 3월 첫날에 늦잠을 잔 거야?
“일단 끊으시죠.”
“아니, 그게 저도 지금 나왔는데......”
“그럼 집 앞에 있으세요. 5분 걸립니다.”
5분이라니, 지금 일어났으면서 뭐가 5분이야. 설마 파자마 차림으로 등장하는 건 아닐 테지.
유정은 그래도 준서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세단은 10분 후에 도착했다. 놀랍게도 준서는 말끔한 차림이었다.
“빨리 준비하셨네요.”
그 사이, 모자랐던 화장을 마친 유정은 얼른 차에 올라탔다.
“덕분에요.”
“3월 첫날 늦잠 자는 건 나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일단 가죠.”
준서의 눈에는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긴장이 서려 있었다.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아서 그대로 출근하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잠든 모양입니다. 고맙습니다. 큰일 날 뻔했어요.”
“왜요? 일이 그렇게 많아요?”
“일이 많다기 보다는, 제가 좀 예민한 편이라서요.”
예민하다니. 내성적인 남자가 예민하기까지 하구나. 유정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웃기다는 표정이군요.”
“독심술사세요? 오늘은 3월 첫날이라 심기 안 건드리려고 노력한 건데.”
“그 소중하게 끌어안은 거나 열어 보십시오.”
준서의 눈이 유정의 빵봉지로 툭 떨어졌다.
“네에?”
유정은 그제서야 빵봉지 사이로 솔솔 흘러나오는 냄새가 차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이거......”
유정은 슬그머니 봉지를 풀었다.
“하나, 드려요?”
준서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엄마가 당신 먹으라고 싸준 건 아니지만, 뭐, 상사에게 잘 보여서 나쁠 건 없겠지.
빵을 내주는데, 준서가 손을 오므렸다. 운전을 하는 중이라 시선은 앞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준서의 손은 빵이 아닌 유정의 손을 스쳤다. 놀라 손을 오므렸다가, 유정은 던지듯이 준서의 손에 빵을 넘겼다.
“빵 좋아하거든요.”
“아, 그러세요?”
“삼시 세끼 빵만 먹어도 살 것 같은데. 한의사 친구에게 맨날 욕 먹습니다. 밀가루 좀 그만 먹으라고.”
“그러게, 밀가루 별로 안 좋대요. 살만 찌고.”
“그러면 앞으로 이런 건 가져오지 마세요.”
준서는 빵을 두 입 만에 입에 넣어 버렸다. 정말 좋아하는 구나. 가져오지 말라고 하면서 거지처럼 먹어대기는. 유정은 음료수가 있을까 살폈으나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학교 가면 정수기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유정의 태도만으로도 준서는 그녀가 뭘 찾는지 아는 듯이 말했다.
“아니, 뭐 꼭 그래서는 아니고 저도 목이 말라서요.”
대답이 없는 그에게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준서는 또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 남자가, 우리 엄마가 싸준 거라고. 돼지 같이 다 먹으려는 건가.
“살 찔까봐요.”
“그럼 그만 드셔야죠.”
“서유정 선생님이요.”
“아, 진짜아!”
유정이 참다 못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준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나만 더 주세요. 설마 그거 하나가 끝이라고 하진 않겠죠. 기별도 안 가는데.”
“저도 먹어야 하거든요.”
“꽤 많던데.”
“교무실 사람들도 나눠줘야죠. 수연 언니하고 정부장님하고! 아휴 정부장님은 이런 거 싸오면 적어도 세 개 이상 먹어댄다고요.”
“그럼 정부장님 것을 저 주십시오. 욕은 제가 먹을 테니.”
“이미 엄청 드셨거든요?”
“알고 있습니다. 먹는 김에 더 먹으면 되니까 빵이나 더 주세요.”
유정은 준서의 손에 다시 던지듯이 빵을 내밀었다. 두 입 만에 먹어 치우는 꼴을 묵묵히 보던 유정도 참지 못하고 빵에 손을 뻗었다.
차 안은 금세 고소한 샐러드빵 냄새가 퍼졌다.
“어머님 솜씨가 대단하시네요. 그만 먹어야 하는데 하나만 더 먹읍시다.”
“몰라요, 교무실 사람들 안 주죠, 뭐.”
“잘 생각하셨습니다. 오늘 이건 우리끼리만의 비밀로 합시다.”
결국 도착하기도 전에 빵봉지가 텅 비어 버리고 말았다.
“오늘 서유정 선생님댁에 오길 잘했네요.”
“앞으로는 안 이러셔도 돼요. 오늘은 제가 급해서. 약혼녀도 있으시잖아요.”
준서의 시선이 의문을 담고 유정을 향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이었다.
“아, 아니, 그러니까, 제가 약혼녀라면 이렇게 카풀해주는 게 불편할 수도 있다는 얘기죠.”
“남자 친구 있어요?”
전혀 엉뚱하게 뻗어나간 이야기에 유정의 얼굴이 공연히 달아 올랐다.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요?”
“그냥 궁금해서요.”
“당연히 없...... 아니, 항상 없었던 건 아니고요, 지금은 일에 집중하려고요.”
“그렇군요. 제 약혼녀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카풀 가지고 뭐라고 할 사이는 아니라서.”
무심하게 답하는 준서의 옆얼굴을 유정이 노려 보았다. 뭘 알고서 하는 말인가.
“그, 그게, 여자는 말하고 감정이 다르다고요. 겉으로는 괜찮다고 해도 안 괜찮을 수도 있고요. 걔가 또 표현을 잘하는 성격도 아니고.”
“걔요?”
준서가 되묻자 유정은 놀라서 말도 못하고 얼굴을 감싸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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