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사랑, 그것 참 좋은 말이네2017.06.06.
“아휴, 한 주가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다.”
유정이 정교사가 되었다고 한울 고등학교 4총사가 모였다. 유정, 호연, 수정, 지선. 십년 전에는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과목을 공부하던 그들이, 지금은 각자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호연은 카드 회사에 들어가서 지금 2년차였다. 수정은 유학을 다녀와서 결혼 준비 중이었고, 지선은 로스쿨 준비 중이었다.
“왜? 일주일 전에는 신나서 전화하더니.”
호연의 물음에 유정은 쓴웃음만 삼켰다.
그 일주일 전이 아득히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수업 계획서를 작성했더니, 이제 준서는 담임 계획서까지 제출하라고 했다. 그 후에는 교사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면담까지 했다. 잔뜩 긴장하고 갔더니, 신학기 앞두고 고민되는 것이 뭐냐는 질문을 던졌다. 물론 끝은 그의 주특기인 잔소리였지만.
“담임을 어떻게 하라는 정답은 없을 겁니다.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는 건 경험이 있어야 가능하겠죠. 1년차에는 그저, 아무 거나 저질러 보십시오. 제가 뒤는 다 막아드릴 테니. 주차장에서 고기를 굽든지, 교장실에 트램블린을 설치하고 놀든지 말입니다. 제출하신 계획서에도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만 적어 놓았던데, 서유정 선생님만 할 수 있는 참신한 것들도 생각해 보십시오. 실패를 해야 발전을 하는 법입니다.”
덕분에 2월 내내 야근이었다. 이래서야 3월에 어떻게 힘을 낼 수 있겠느냐고 교사들은 만나기만 하면 불평을 터뜨렸으나, 작년에 비해 여러모로 많은 준비를 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일이 너무 많아서, 개학도 하기 전에 힘 다 뺐어.”
유정은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닫았다. ‘약혼녀’에 대한 말을 들은 이후로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교장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이후로는 같이 출퇴근을 하지도 않았고 필요에 의하지 않고는 만나지도 않았다.
준서도 뭔가 생각을 한 듯이 그 이후로 유정에게 따로 샌드위치 부탁을 하거나 사적으로 말을 걸지 않았다. 말을 하는 것도 업무에 대한 것 뿐이었다.
“그래도, 정교사라니 완전 니가 제일 잘된 거 아니냐? 난 삼십대 중반 되면 목 날아간다더라. 넌 육십 살까지 문제 없잖아.”
호연이 말했고 지선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니까. 니가 제일 잘됐어. 참, 결혼하는 너하고.”
지선의 눈이 다소곳이 앉아서 미소를 짓고 있는 수정에게 향했다. 수정은 아아, 라고 말하며 진한 미소만 머금었다.
“그러게, 너 유학 다녀온 지 얼마 안 됐잖아. 누구랑 결혼하는 거야? 남자 친구도 혼자 안 사귀다가...... 니가 제일 배신 때린 거 알지?”
“그런...... 건가?”
호연의 짖궂은 말에, 수정은 포크를 가만히 내려놓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지만 유정은 그런 표정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지금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
“그러게, 누군데에?”
지선이 수정의 팔을 잡고 가볍게 흔들자, 수정이 그 크고 예쁜 눈을 내려뜨며 또렷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정략이야. 약혼을 한 건 3년 전이고.”
“3년? 너 유학 가 있었잖아.”
“그래서 제대로 만난 건 몇 달 안 됐어.”
세련된 어투로 말하고는 수정은 큰 눈에 미소를 담았다. 대외적인 표정을 질 줄 아는 그녀였다. 아마 이 중에서 가장 그런 표정에 능숙할 것이었다.
10년 전에도 그녀는 비슷했다. 당시 반장이었던 그녀는 학급 일 뿐만 아니라 담임 교사가 해야 할 업무까지 완벽하게 소화했다. 늘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성적도 탑이었고 못하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유정은 그녀가 불쌍하다기 보다는 기이했다.
“정략, 와, 하긴, 너는 우리랑 레베루가 다르잖냐.”
지선이 말하면서 질시 어린 눈길을 수정에게 보냈으나, 수정은 그 눈빛을 가볍게 받아내며 웃기만 했다.
“다르긴.”
“그래서? 그 남자는 누군데? 정략이라면...... 그 쪽 집안도 상당한 거 아냐?”
수정의 아버지는 4선 국회의원이었다. 이번에 당대표로 선출되었고, 서서히 차기 대권 주자로 물망에 오르는 중이었다.
“교육 쪽이야.”
수정은 그렇게만 말하고 아메리카노를 들어 마셨다. 유정의 미간이 좁아졌다.
“재단이 꽤 커. 약혼자 형이 아버지 후배고. 이번에 당선됐거든.”
“형이?”
“약혼자랑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편이라. 아마도 그것 때문에 우리 쪽에 손을 뻗었겠지. 그 형을 시작으로 정치에도 관심을 가질 모양이야.”
수정의 눈은 지나칠 만큼 차분했다. 자신의 결혼 이야기인데도 다른 이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유정은 계속 불안해지는 숨을 삼켰다. 교육 쪽이고 재단이 크다, 국회의원도 있다. 설마. 유정은 신영 고등학교가 소속되어 있는 신영 재단에 대한 소문들을 세세하게 알고 있지 못했다. 그런데 자꾸만 수정이 이야기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관 없어, 난. 좋은 사람인 거 같고, 그거면 됐으니까.”
“야, 그래도 사랑이 있어야 결혼을 하지.”
호연의 말에 수정이 눈썹을 꿈틀했다. 사랑, 이라는 말이 그녀의 심기를 긁었는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손톱 끝으로 머그컵을 매만지던 그녀가 고개를 살짝 젖히며 웃었다.
“사랑, 그것 참 좋은 말이네.”
수정은 웃으며 말했으나, 유정은 그 말의 이면에 실린 그녀의 냉혹한 감정을 읽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없이 커피를 들어 마시는 수정을 보며 세 사람의 눈이 굳었다. 호연은 유정의 손등을 가볍게 치며 화제를 돌렸다.
“너 합격했는데 우리 어디 여행이라도 갈까?”
“술도 안했는데 취할 것 같다.”
호연과 지선을 먼저 보내고 난 수정의 얼굴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호연과 지선이 특별히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에도 내내 네 명이 몰려 다녔으니까. 다만 특별한 이유로 유정이 불편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었다.
“우리끼리 가서 한 잔 할까?”
“아냐. 너 피곤하잖아. 가서 쉬어.”
유정이 그렇듯이, 수정도 유정의 기분을 귀신 같이 맞췄다. 실상 아까부터 유정은 계속 정신이 까무룩한 것을 참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야근을 한 여파는 아직도 몸 곳곳에 남아 그녀를 두들겨 댔다.
“나도 전에 인턴 한 번 하고 나니까 온 몸이 다 쑤시더라. 주말에는 어디 가지 말고 푹 쉬어. 3월이면 더 바빠지잖아.”
언니처럼 어른스럽게 조언하며 유정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교사는 이 친구가 해야 했을 거라고 생각하며 유정은 고개를 들었다.
“그럼, 결혼 말고 취업 준비는 안하는 거야?”
“일단 결혼에 집중하라고 하셔. 딱히 준비하는 것도 없고 결혼도 가을인데. 뭐, 요리라도 배워야 하나.”
결혼이 가을이라는 말에 유정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래도, 너 대학도 그렇고 유학도 다녀왔는데 아깝잖아.”
“몸값 늘리려고 다녀온 거지. 알잖아. 일단 팔아 치우면 신경 안 쓸 테니까 그 때 어디든 알아봐야지.”
팔아 치우다, 를 말하는 수정의 입이 묘하게 비틀렸다. 유정은 더 할 말이 없었다. 남의 집안 사정에 함부로 그녀가 끼어들 수는 없었다.
“잘됐다, 너. 고생한다고 하지만 난 부럽네.”
수정은 서늘한 시선을 유정에게 돌렸다. 까만 눈 저 편의 세상. 유정은 아려오는 마음을 애써 담담히 털어내며 웃어 보였다.
“그렇지, 오랜 꿈이었으니까.”
“너 좀 적응하면 우리끼리 한 번 또 자축하자.”
수정은 그렇게 말하고 마침 울리기 시작하는 전화기를 들었다. 유정의 눈이 긴장했다.
샤워를 마친 준서는 일주일 만에야 겨우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눈을 감은 채 쇼파에 가만히 몸을 기대고 있다가,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들었다.
이렇게 시간이 날 때가 많이 없을 텐데, 오늘 만나서 잠깐 차라도 마셔야 하지 않을까.
민수정이라는 이름을 누르고 조금 있으니 신호가 갔다.
“여보세요.”
얼굴 만큼이나 똑바른 목소리. 물에 빠져서도 꼿꼿하게 걸어나올 것 같은 여자. 준서는 뻑뻑한 눈을 손으로 누르며 다듬어진 음성을 내었다.
“응, 나야.”
“네.”
“지금, 시간 있어?”
속을 알 수 없는 여자. 두어 달 전, 처음 보았을 때 준서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 감추어진 막이 있어서, 웃어도 그것이 웃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말을 하는 것이나 태도나 군더더기 없이, ‘교육 잘 받고 자란 여자’의 티를 내지만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지껏, 그녀가 준서 앞에서 위태로웠던 적은 없었다.
“개학하면 시간을 전혀 못낼 것 같아서. 지금 시간 되면 잠깐이라도 보고 싶은데.”
“봐요.”
두어달 전 처음 만났다. 3년 전에 약혼을 했으나 바로 유학을 간다고 했던가. 준서는 막 유학에서 돌아온 터라 엇갈리고 말았다. 식만 간단히 올린 후 때때로 전화 통화를 하거나 메일을 보내긴 했으나 얼굴을 보지 않고 친분을 쌓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 만난 그녀는 준서에게 연상이니 말을 놓으라고 주문했다. 준서가 만난 지 얼마 안되니 말은 천천히 트자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어쩔 수 없이 말을 놓으니 생각보다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의도한 건가. 준서는 여자의 혜안에 놀랐다. 결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말부터 터서 심리적인 거리를 줄이려는 목적이 그제서야 읽혀서. 거기에다 여자는 늘 준서가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이해하고 챙겼다.
하지만 묘하게, 준서는 그런 부분들이 거슬릴 때가 있었다. 싫은 것이 아니라, 어쩐지 그녀가 길들여졌다는 느낌을 주어서였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하도록 교육을 받아서 그것을 기계적으로 자신에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이제까지 만나온 느낌은. 적어도 이 여자와 결혼하면 쓸데없이 속을 끓이거나 힘들어질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현명했고, 처신도 잘했으니까.
“지금, 어디야?”
준서는 셔츠 위에 재킷을 걸치며 물었다. 여자가 대답하는 곳을 머릿 속에 입력하고 마침 방에서 나온 미혜를 돌아 보았다.
“약속 있어요. 먼저 주무세요.”
요즘 미혜가 듣는 말의 90퍼센트가 ‘먼저 주무세요’였다. 준서가 집에서 하는 유일한 일은 아침을 먹는 것이었다. 그것도 늘 조금 밖에 먹지 않아서, 미혜는 자신이 대체 여기 자러 왔는지 일을 하러 왔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네.”
언제나처럼 준서는 그렇게 대답하고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신발을 막 신으려던 준서는 고개를 돌렸다. 멀뚱히 서 있는 미혜는, 평소와 다른 준서의 태도에 바짝 긴장하며 그를 마주 보았다.
“혹시, 필요하신 거라도......”
“생일이 언제죠?”
“네?”
미혜는 눈을 크게 떴다. 다짜고짜 묻는 말의 진의가 파악되지 않았다.
“미혜씨 생일이요.”
준서는 명확하게 말하며 상대를 쏘아보듯이 멈춰 서 있었다.
“아, 저, 내달 10일입니다.”
“3월 10일이요?”
“네......”
“지나지 않아 다행이네요. 그 즈음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준서는 그렇게 말하고 마저 신발을 꿰어 신었다. 문이 닫힐 때까지, 미혜는 어디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가만히 준서가 사라진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뭐야, 갑자기 생일은 왜 물어봐,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녀는, 문득 이력서에 적었던 생년월일을 떠올렸다. 그 즈음이라고 기억했다면, 설마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걸까.
여기 저기서 일을 해 보았지만 생일을 챙겨주는 고용주는 없었다. 미혜는 고개를 갸웃했다. 첫날을 제외하고는 따로 주문하는 것도 없고, 늘 조용한 가운데 식사를 하고 출근을 하는 남자였다. 말이 없어서 그렇지 불편한 주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생일은 왜 물어본 거야. 설마 챙겨주려고?”
기쁘기는 커녕 소름이 돋는다. 미혜는 어깨를 한 번 추어 올리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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