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더 이상은 이런 죽음이 없도록 해야지.2017.06.05.
정확히 한 시간 후, 준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연은 더 있자고 했으나 유정은 피곤해서 집에 가겠다고 했다. 자리는 파했고, 상우와 수연은 각자 대리 기사를 불렀다.
“제 차 타고 가시죠.”
바를 나서자 마자, 준서는 유정에게 선택권 따위는 없다는 듯이 먼저 걸어가며 말했다.
“버스 타도 되거든요.”
“불안해서 그래요. 요즘 세상이 흉흉해서......”
“할아버지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준서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유정은 어쩔 수 없이 수연과 상우와 인사를 하고 준서를 따라 걸었다.
처음을 제외하고, 준서는 한 시간 내내 별 말 없이 수연과 상우, 유정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수연이었고, 상우는 적당히 호응을 했다. 유정은 어쩐지 마음이 복잡해서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앉아 있었다.
계속 분위기를 주도할 줄 알았던 준서가 의외의 태도를 보이자, 유정은 혼란스러웠다. 대체 왜 저러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꿍꿍이가 있어서 그렇다는 짖궂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피곤하세요?”
그래서 얻은 결론은, 말하기 피곤해서였다. 그러면 대체 왜 술자리를 마련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최선의 결론이었다.
“네, 저요?”
운전석에 오른 준서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안 피곤합니다.”
“아니, 말씀이 없으시길래.”
“저 원래 말 없어요.”
유정은 푸핫하고 웃었다. 오늘 들은 말 중에 가장 웃긴 말이었다.
“왜 웃으시죠?”
“말이 없다뇨, 어제 오늘 아침까지 저한테 계속 주절 주절 하셨잖아요?”
“주절 주절이라니, 참......”
준서는 차를 출발시키며 미간을 구겼다.
“아니, 표현이 좀 그래서 죄송한데, 여하간 계속 혼자 떠드셨...... 아니 그러니까 말씀하셨잖아요?”
“그거야 우리 둘 뿐이지 않습니까.”
우리. 유정은 입을 다물었다. 우리라, 벌써 우리가 된 걸까.
“그리고 서유정 선생님도 말씀이 없으시니까.”
“아니, 제가 무슨 말이 없어...... 제가 뭐 특별히 입 닫고 있었던 적 있었나요?”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라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필요할 땐 해요. 저를 어떻게 보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정은 아무리 보아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준서의 옆얼굴을 보았다. 여전히 깎아지른 듯한 턱선은 날렵하다. 날카로운 두 눈도.
준서는 그런 유정을 힐긋 보고 다시 앞을 보았다. 그녀 앞에서만 입이 자꾸 열리고, 잔소리를 빙자한 마음에 있는 소리들이 나온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처음 알았네요. 내성적인 성격이신 줄.”
유정이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하자 준서가 피식 웃었다.
“재밌다니까.”
왜 말은 갑자기 짧아지는 건데.
“네?”
“서유정 선생님이요. 재밌다고요.”
“뭐, 뭐에요, 저 재미 없어요. 이상하네 진짜. 내성적이라고 하는 것부터. 무슨 다른 세계에서 오셨어요?”
“재밌는데. 몰라요, 본인이?”
“아니, 재미 없다니까요. 저 수업하면 애들 깨우느라 바빠요. 재미 없다고 해서......”
“그거랑 그거랑은 다르죠. 이렇게 엉뚱한 면도 있고.”
유정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준서를 보았다. 도대체 이 남자,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심장이 고장나서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쿵쿵대는데, 자꾸 이렇게 날 도발하면 내가 무슨 짓을 할 지 모르겠다고.
확 고백해 버려.
갑자기 휴대폰 울리는 소리가 났다. 유정의 소리는 아니었다. 준서는 번호를 확인하고는 이어폰을 귀에 연결했다.
“죄송합니다. 잠깐 통화 좀 할게요.”
“아, 네. 하세요.”
유정은 그렇게 말하고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준서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퇴근하는 중.”
유정의 눈이 준서에게 향했다. 형제인가. 늘 존대만 하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반말이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그래. 오늘은 별 일 없었고?”
챙겨주는 걸 보니 동생인가.
“바쁘지. 곧 신학기니까. 그래. 운전 중이라 가서 또 통화하자. 그래.”
자상한 듯하면서도 무심한 어투. 귀에서 이어폰을 뺀 준서는 신호 대기를 받는 차 뒤에 차를 세웠다.
“동생인가봐요.”
유정은 아무나 추측해서 말했다. 준서의 눈이 유정을 힐끔 보았다.
“약혼녀요.”
“네에?”
유정의 시선이 준서를 향했다. 준서도 고개를 갸웃하며 유정을 마주 보았다.
“왜요, 제가 내성적이라는 것보다 더 충격입니까?”
“야, 약혼녀, 가 있었어요?”
유정은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허물어지는 것을 느끼며 입술까지 달달 떨었다.
“네. 집안끼리 약속된 관계긴 합니다만. 그래도 결혼 전에 얼굴은 보게 해주네요.”
“아, 저, 그럼, 결혼은 언제......”
“올해 가을입니다.”
차가 다시 출발했다. 유정은 머리 속을 가득 채우는 열기에 자기도 모르게 차창을 열였다.
“더우신가요?”
“조금요.”
바람이 유정의 머리칼을 날리니, 몸 속 열기도 조금씩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혼자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설마 내가 좋아서 이렇게 데려다 주는 거겠어. 신입 교사고 만만하니까 그냥 그랬던 거지.
“저는 결혼할 사람도 없는 줄 아셨군요. 정략이 아니라면 그랬을 지도 모르죠.”
준서는 그런 유정의 옆얼굴을 살피며 농담조로 내뱉었다.
“그, 그럼, 결혼은 어디서 하는데요?”
“강남의 B호텔에서 합니다.”
“그, 그렇군요. 메뉴는요? 스테이크 겠죠? 스테이크 아니면 전 안가요.”
유정은 자기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줄도 모르고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스테이크 였던가? 그건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아니 자기 결혼식 메뉴도 몰라요? 제일 중요한 걸!”
유정이 준서를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자, 준서는 전방을 본 채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게,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 아마 제일 좋은 메뉴이긴 할 겁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가야겠네요. 공짜 음식 먹으러.”
유정은 그렇게 말하고 바보 같이 하하 웃었다.
“뭐...... 아직 가을이니까.”
준서는 그렇게 말하고는 유정을 힐끔 보았다.
“그럼, 내일도 일찍 일어나면 연락 주십시오. 무리는 하지 마시고요.”
어느새 도착이었다. 유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일부터는 저도 좀 느지막히 출근 하려고요. 기다리지 마세요. 저 진짜 연락 안 드릴 거니까.”
“그러세요, 그럼.”
준서는 순순히 답하고 웃어 주었다. 유정은 차 문을 자기도 모르게 쾅 닫고 나서, 아이고, 왜 이렇게 세게 닫았지, 하고 헤헤 웃다가 고개를 숙였다.
칵테일 취기가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집에 들어온 준서는, 어둡고 괴괴한 집안에 실내등을 켰다. 미혜는 들어가서 먼저 자는 것 같았다. 부탁한 것은 아침 식사와 집안 정리, 그리고 간헐적으로 있는 저녁 식사 뿐이었으므로 먼저 자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었다.
오늘은 미리 전화를 해서 저녁 식사는 필요 없으니 일 다 마치면 먼저 자라고 말해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집안은 어쩐지 황량했다. 준서는 폐 속을 깊이 침투하는 공허함을 느끼며 쇼파에 몸을 던졌다.
몸이 조각 조각 나뉘듯이 피로가 덮쳤으나 정신은 말짱했다.
약혼녀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 변하던 그녀의 표정이 떠올랐다. 당황해하며 빠르게 말을 뱉더니, 도망가듯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약혼녀가 아니라도, 직장에서의 연애라는 것은 해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그였다. 직장에서는 오로지 일에 집중하고 싶었고 다른 감정이 틈타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대체 이건 뭘까. 교무실에서 난데없이 체육복 소녀를 본 후부터, 그의 어긋남 없던 계획에 조금씩 차질이 생기는 느낌이었다.
“미련한 자식.”
교복을 입은 채 무릎을 꿇고 앉은 준서 앞에서, 윤택은 가볍게 혀를 차며 그의 맞아서 부어오른 뺨을 노려 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늘 전체 수석에 칭찬이 자자했던 그는, 한 순간에 공부를 싸움질이나 하고 다니는 망나니가 되고 말았다.
“걷어라.”
윤택은 회초리를 들었다. 윤택은 가족들에게 엄격한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였으나 이제까지 준서가 매를 맞을 일은 없었다.
준서는 일어서서 바지를 걷어 올렸다. 여전히 굳은 표정을 하고서였다.
“이건 스스로에게 무책임한 것에 대한 벌이다.”
윤택이 회초리를 휘둘렀고, 준서는 맞는 순간 윽, 하고 여린 신음 소리를 내었으나 곧 이를 악물고 다리를 곧게 폈다.
윤택도 준서도 아무 소리를 내지 않았다. 방 안에는 매를 치는 소리만 요란했다.
준서의 종아리는 곧 빨갛게 부어 올랐다. 애써 다스리려던 감정이 아픔과 함께 스멀 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준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준서의 부모는 이미 몇 차례 학교에 불려가고 나서 그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 순간에 변해버린 그를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준서가 어릴 때에 함께 살면서 그를 각별히 아꼈던 유택은, 부모의 간절한 부탁을 받아들였다.
“네가 왜 맞는 줄은 알아?”
매질을 그친 윤택이 준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스스로에게 무책임한 벌이라고 하셨잖아요.”
준서는 고개를 숙인 채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건 내 이유고. 네가 매를 맞는 이유 말이다. 아플 텐데도 참고 견디는 걸 보니 너도 매질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아니냐.”
준서는 미간을 모으며 할아버지를 내려다 보았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매를 맞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누구보다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은 자신이었다. 마지막에 내밀었던 손을 결국 잡아주지 못했다. 사지로 밀어넣고서도 뻔뻔하게 학교를 다녔다.
“네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준서는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마음을 들켜버린 것이 부끄러웠지만 차라리 다행이었다. 할아버지라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라면 자신을 멈춰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겠어? 그걸 다 네가 짊어지고 그러고 있었던 거야? 못난 놈.”
말 끝에 철썩, 매가 떨어졌고 준서는 물었던 입술을 놓고 신음을 토했다.
“불의를 막을 힘을 기를 생각은 않고 스스로를 죽일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내 너를 한참 잘못 봤다.”
“불의를 막을 힘이라니요.”
준서의 눈이 윤택을 향했다.
“학교 현장을 봐라, 성적으로 사람 평가하고 몇몇 성적이 좋은 이들에게만 특권적인 지위를 주고. 정작 학생의 삶이나 관계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그게 너는 의롭고 공정한 거라고 생각하냐? 결국 큰 틀 안에서 봐야 하는 거야. 그 녀석의 죽음도......”
준서의 눈에 이슬이 반짝였다.
“뭘 더 해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같이 죽을 생각이었어? 그러면 뭐가 달라지는데?"
윤택은 회초리를 내려 놓았다. 준서의 바지를 내려 주고, 그 위로 손을 얹어 맞은 곳을 쓰다듬었다.
“난 말이다. 지금의 교육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늙었고 뭘 해보기에도 이미 늦었지. 하지만 너는 아니다.”
준서는 천천히 윤택의 앞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나는 널 믿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지금 네가 왜 이토록 방황하는 줄도 알고 있고. 그러니 준서야, 일단 힘을 길러라. 네가 바꿀 수 있는 힘, 무언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힘 말이다.”
“힘을 길러서요?”
준서의 목소리가 떨렸다. 윤택이 준서의 손을 모아 잡았다.
“그래서, 더 이상은 이런 죽음이 없도록 해야지.”
준서가 고개를 숙였다. 소리 죽인 흐느낌이 그의 목에서부터 흘러나왔다.
윤택은 손을 펴서 준서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는 윤택의 어깨에 고개를 얹은 채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찬장에서 잭다니엘을 꺼냈다. 얼음도 없이 잔에 따라서 그대로 들이켰다. 배가 뜨끈하면서 머리가 울렸다.
그의 인생이 바뀐 그 열여덟 살로부터 벌써 십여년이 흘렀다. 한눈 팔지 않고 오직 하나를 위해 달려온 인생이 발 아래에 펼쳐진 듯했다.
그러나.
지금 드는 이 불청객 같은 감정은 대체 뭘까.
준서는 도로를 따라 늘어선 차들을 보면서 취기 어린 눈을 깜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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