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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13화 (13/102)

13. 시키면 해야 해요.2017.06.03.

“내일 일정도 있으니까 딱 한 시간만. 그러면 부담 없겠죠?”

“아니 누가 시간 때문에 부담이 된다고......”

“가는 길에 제가 종종 가는 바(Bar)가 있습니다. 분위기도 괜찮고 칵테일도 맛있어요.”

“오호, 교장 선생님 센스가 넘치시네요.”

수연이 다시 손뼉을 치며 말했고 그 모습을 본 준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럼 저 따라 오십시오.”

준서가 자신의 차로 돌아가고, 상우도 차로 간 후에 유정은 말없이 수연을 노려보고 섰다.

“우리도 가자, 얼른.”

“이수연 선생님.”

“뭐야, 왜 갑자기 호칭이 그렇게 딱딱해?”

수연은 유정의 팔짱을 끼며 콧소리를 냈다.

“직장 생활 기본 수칙, 몰라? 상사한테 잘 보이면 편하다고. 내가 교장 선생님 딱 보니까 어디에도 꿀리지 않을 스타일이야. 자기 사람 만들 스타일. 이럴 때에는 그냥 자기 사람 되어 주는 게 편해. 재단이사장 빽이잖아.”

하지만 수연의 얼굴에는 그것만이라도 볼 수 없는 홍조가 어려 있었다.

“자기 사람 안 되어도 불이익 주는 스타일 같진 않은데요.”

결국 수연의 옆자리에 올라타게 된 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뇌까리듯 말했다.

“하긴, 그 말도 맞는데...... 그래도 멋진 남자 둘하고 같이 술 마시는 게 싫은 건 아니잖아.”

“이제야 본모습이 나오시는 군.”

“으흐흐흐흐 몰랐어? 나 올해는 결혼 좀 해야 하지 않겠냐.”

속 없이 웃는 수연을 보고 유정은 그제서야 얼굴을 펴고 웃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막막하고 힘들었던 작년, 이렇게 속 없이 잘해주는 수연이 아니었다면 유정이 지금처럼 학교에 적응하기는 어려웠을 것이었다.

“그래요, 잘되길 빌어요. 교장하고 잘되면 설립자 빽까지 생기니까 엄청 좋겠네.”

“아휴,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아.”

수연은 유정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치고 나서 다시 흐흐 웃었다.

“와, 진짜 분위기 좋네요.”

어둑한 실내는 테이블마다 켜진 촛불로 은은했다. 창 밖으로는 서울의 거리가 한 눈에 보였다. 수연은 들어서자마자 기분이 좋은 듯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준서는 그렇게 말하고 촛불에 비친 눈을 멀리 창 밖으로 보내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유정은 준서의 맞은편에 앉게 되었는데, 슈트 차림으로 가만히 창 밖을 주시하고 있는 준서의 갸름한 얼굴이 정면으로 보이니 왠지 모르게 민망했다.

“가끔 생각할 거 있을 때 혼자 오기도 하는 곳입니다. 조용하고 음악도 좋아서요.”

이름 모를 재즈곡이 어두운 홀을 휩싸고 흘렀다. 준서는 창에서 눈을 떼고는 메뉴판을 유정에게 넘겨 주었다.

“고르시죠.”

“칵테일 마실까?”

유정의 옆에 앉은 수연이 물었고 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은 준벅을, 유정은 피치 크러시를, 상우는 생맥주를 마시겠다고 했다.

준서는 그들이 말한 것을 주문한 후, 말을 보탰다.

“그리고 오렌지 쥬스 한 잔 주십시오.”

“아니, 무슨 쥬스에요, 여기서?”

“또 일해야 합니다.”

준서는 가볍게 웃고는 수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수연의 얼굴이 벌개졌다.

“이수연 선생님은, 벌써 5년차시네요.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유정은 준서의 눈이 수연에게 깊이 집중한 것을 느꼈다. 마음 속까지 세세하게 열어보일 것처럼. 수연은 당황한 듯이 눈을 내리깔았다.

“아뇨, 뭐, 별로. 그냥 시키는 거 하는 성격이라서요.”

“그래도 정인기 부장 선생님 밑에서...... 제가 험담을 하는 건 아닙니다만, 쉽지는 않으셨을 것 같네요.”

“그런데 또 챙겨주실 땐 챙겨 주시니까요. 그리고 부장 선생님들 다 그러세요. 이젠 적응되어서 괜찮아요.”

수연은 웃으면서 말했고, 유정은 그런 수연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런 말을 하면 교사가 저러면 안된다느니 하면서 설교를 시작한다고.

그러나 준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상우에게 돌려 버렸다.

유정은 자기가 뭔가 속은 것을 느끼며 준서를 노려보았다. 왜 나한테 하는 말을 수연에게 하지 않는 걸까. 수연이 나이가 더 많아서 조심하는 걸까.

“윤상우 선생님은, 다른 일하다 오셨다면서요? 무슨 회사 다니셨습니까?”

“아, 저요. 진성에 있었습니다.”

“대기업 계셨네요. 그런데 어쩌다가 오신 겁니까?”

“그게, 대기업은 언제 짤릴 지도 모르고, 불안하더라고요. 아무래도 교사가 더 안정적일 것 같아서 교육대학원에 들어갔어요.”

유정은 공포에 질려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이건 정말 한 마디 들을 타이밍이구나. 안정적이라니. 교사의 생명은 수업에 있다 운운한 사람 앞에서 지금 그게 할 말인가. 나이도 준서보다 어리니 이제는 그냥 넘어가지 않겠지.

“그렇군요. 대단합니다. 진성을 그만 둘 생각을 하시다니.”

그러나 준서는 그렇게 말하고 또 넘어가 버렸다.

유정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음료가 도착했다. 유정은 달달한 피치 크러시를 머금고,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 준서를 살폈다.

당신 대체 무슨 꿍꿍이야.

왜 나한테만 설교질 충고질이야.

“참, 서유정 선생님은......”

유정의 눈이 바짝 긴장했다.

“작년 여기 오시기 전에 다른 학교 계셨다고 하셨었죠. 중학교 였습니까?”

“네.”

그거야 이력서를 보면 다 나오는 내용이니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중학교에서 왜 고등학교로 지원하신 겁니까?”

유정은 가만히 준서를 마주 보았다.

여전히 찌르는 듯한 눈빛으로 상대를 보고 있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지원한 까닭은, 여러 학교를 경험해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정은 왠지 지금은 그렇게 답하고 싶지 않았다.

“중학교는 보충 수업이 많지 않거든요. 그런데 고등학교는 보충 수업도 있고 자기주도학습 감독도 있어서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어요.”

그래, 나한테도 어디 잔소리 안하나 보자.

유정은 단단히 팔짱을 끼고 준서를 노려 보았다.

그런 유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준서는, 갑자기 픽 웃었다.

네 의도 따위는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왜요? 이런 제가 교사의 사명이나 그런 것 따위는 별로 고려하지 않는 아주 이상한 선생님 같죠? 더군다나 초임 교사가 이런 마인드이니, 학교의 장래가 걱정되지 않으세요?”

내친 김이었다. 유정은 준서를 정면으로 쏘아보며 내뱉었다. 준서는 그런 유정의 눈빛을 묵묵히 받고 있다가 웃음을 지우고 정색하며 대꾸했다.

“돈을 많이 벌고자 하는 게 사명이 없는 게 아니죠. 많이 벌기 위해서 그만큼 노력하면 되지 않습니까? 노력도 안하고 돈만 벌려고 하는 게 문제죠.”

유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당했다. 저 인간하고 말을 섞는 게 아니었는데.

“이 정도로 하고, 그냥 다른 얘기 합시다. 학교 밖에 나와서 학교 이야기 하려니 머리 아프네요.”

유정의 이글거리는 시선을 피하며 준서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먼저 이야기 꺼내 놓고는.

“그런 교장 선생님은 어떻게 여기 오시게 된 거에요?”

준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수연이 물었다. 준서가 픽 웃고는 대꾸했다.

“방금 학교 이야기 싫다고 했는데.”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아뇨. 농담입니다. 제가 여기 온 건......”

준서는 쥬스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얼른 삼키지 않고 머금은 채, 음미하듯이 허공을 주시했다. 무슨 쥬스를 와인 맛 보듯이 하나. 유정은 그런 준서를 살짝 노려보다가, 갑자기 취기가 오르듯이 심장이 뜨거워져 와서 눈을 내리 깔았다.

촛불에 은은히 비추는 얼굴이 매혹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의 특히 까만 동공이 불빛 아래 반짝이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시켜서입니다.”

이제까지 중 가장 어이 없는 대답이 그의 입에서 나오자, 유정 뿐만 아니라 수연도 당황한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그럼 교장 선생님 의지가 아니라......”

“명색이 교육자 집안인데 저희 집안이 좀 그렇습니다. 시키면 해야 해요.”

준서는 세 사람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찬찬히 보며 말했다. 그런데 시키면 하는 것 치고 지나치게 열정적이지 않은가. 정말 시키는 것을 할 생각이라면 지난 교장 선생님처럼 해야 하는 거지.

유정은 그런 메시지를 수연과 눈으로 주고 받았다.

“저도 아는 거 없습니다. 하나 하나 배워가면서 해볼 생각입니다. 물론 혼자 할 수는 없죠. 같이 도와주셔야 가능합니다. 잘 못하면 제가 할아버지께 혼이 납니다.”

준서는 연이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내고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쥬스를 머금었다. 알면 알수록 이상한 인간이라니까. 유정은 달달한 피치 크러시로 입 안을 채우고 나서 잠시 말이 없어진 준서를 살폈다.

그 사이, 준서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는지 약간은 쓸쓸한 빛이 어려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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