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출퇴근 동지에게 배신을 당하다니2017.06.02.
“이건 이렇게 해왔던 거라서......”
“바꾸세요.”
“네.”
준서는 교감 석훈과 마주 앉아서 업무 중이었다. 기존에 ‘해왔던’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석훈은 대부분 고분고분 따랐다. 원래 남과의 충돌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적인 기질이라, 다투기 보다는 자신이 일을 더 하는 쪽을 택하곤 했었다.
“피곤하시죠?”
일은 더디기만 했다. 학기 앞두고 할 것이 산더미인데, 기존 것을 하나 하나 다시 살펴보는 작업이 석훈도 만만치 않게 힘들 것이었다.
“아닙니다, 저도 뭐......”
“죄송합니다. 제가 못나서.”
준서는 고개를 들고 싱긋 웃었다. 석훈도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침침한 눈을 감았다 떴다.
“교감 선생님 정말 부지런하시고 열심히 하십니다. 교감 선생님 아니었으면 이 학교가 이렇게까지 유지가 되기 어려웠을 겁니다.”
“아닙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석훈은 고개를 저으며 대꾸하다가, 잠시 준서를 바라 보았다.
석훈이 이 학교에 초임 교사로 왔을 때 당시 교장은 지금 준서의 할아버지인 윤택이었다. 꼬장꼬장한 성격에 불 같은 면도 있어서 교사들을 교장실로 불러 눈물이 쏙 빠지게 야단도 치곤 했었다.
그런데 초임인 석훈에게는 오히려 윤택이 밥도 사주고 격려도 해 주면서 친절하게 대해 주었었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된 후에는 불러서 혼을 내기도 했으나, 석훈은 그런 것이 오히려 싫거나 밉지 않고 고마웠다.
무엇보다, 혼내고 힘들게 하는 만큼 교사들을 챙기고 북돋아주는 면도 있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 때에는 교사 생활을 하는 것이 즐거웠었다.
준서는 어느 면으로 보나 그 시절의 윤택을 떠올리게 했다. 꼬장꼬장한 성격도,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밀어 붙이는 것도.
“할아버지께 말씀 들었습니다. 좋으신 분이라고요. 제가 이렇게 갈 수 있는 것도 교감 선생님 덕분입니다.”
준서의 한 마디에 석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보통 녀석이 아니야. 피곤을 애써 몰아내고, 석훈은 다음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 다음은 재량휴업일에 대한 것인데요. 기존에는 추석 명절 앞뒤에 하루씩 더 쉬었는데 올해는 어떻게 할지......”
“언니, 끝나고 뭐해요?”
퇴근 시간이 임박해 오자, 유정은 구원을 바라듯 수연의 손을 굳게 잡았다.
“끝나고? 아휴, 나 이거 수업 계획서까지 하면 늦게 끝날 텐데?”
“기분도 꿀꿀한데 한 잔 하자고요.”
오늘은 절대, 절대 그 차를 탈 수 없다. 또 버스 정류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안된다.
내가 무슨 팔자에 그런 싸이코를 마음에 담게 되어서.
이것은 교무실에서 완전히 ‘왕따’가 되어 버린 그를 향한 동정일까, 아니면 그가 내게 해준 격려에 대한 감동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저 남과 다른 길을 가는 이를 향한 동경일까.
무어라고 정확히 해석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독특한 행보가 관심을 끌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그들의 마음을 들어주는 것이 좋아 교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그래서인지 의지가 박약하고 쉽게 사람들에게 휘둘리는 면이 있기도 한 유정에게 준서의 그런 면은 확실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절대 그 사람과 더 이상은 가까워지면 안된다. 그 인간 연애 시작하면 어떻게 연애할 건지 연애 계획서부터 작성해서 가져오랄 것 아닌가.
생각만해도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지는 일이다.
“아휴,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일이 너무 많네. 일곱시 전에 마치면 한 잔 하는 걸로 하자.”
“그러죠. 나도 할 거 많아요.”
그러고보니 퇴근 시간인 다섯 시인데 가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어제는 다섯 시가 되자마자 사람들이 다 증발해 버렸었는데.
실력을 보이라는 말이 상당수 교사들의 자존심을 긁었는지, 각자 자리에서 수업 계획서를 작성하느라 다들 정신이 없었다.
대부분의 교사가 퇴근을 못하는 가운데 여섯 시가 되었다. 갑자기 교무실 문이 열리더니, 헬맷을 쓴 남자가 큰 박스를 들고 교무실로 들어왔다.
“누구 찾으시죠?”
문하고 가까이 있던 교사가 일어나 묻자, 남자는 박스를 열며 말했다.
“아, 이거, 교장 선생님께서 여기로 배달해 달라고 하셔서요.”
곧 자리마다 토스트 하나씩이 놓였다. 고소한 냄새가 금세 교무실에 가득했다.
“교장이? 하준서 교장이 이거 하나씩 다 돌리는 거야?”
“뭐야, 병 주고 약 주고도 아니고.”
불만과 함께 토스트를 씹는 소리들이 울렸다. 토스트 뿐만이 아니었다. 과일 쥬스도 함께 배달되어 자리마다 놓였다.
“어머, 뭐야. 우리 다 야근하는 거 아나보다.”
수연은 토스트와 과일 쥬스를 번갈아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유정은 자신의 자리에 놓여진 토스트와 과일 쥬스를 말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겨우 생각 안하고 있었는데, 이 인간 또.
“언니 먹어요.”
유정은 수연 자리에 토스트와 쥬스를 놓아주고는 다시 컴퓨터 앞에 다가 앉았다.
“왜? 이거 엄청 맛있어 보이는데? 그리고 나 배불러서 다 못 먹을 거 같애.”
“못 먹으면 나줘.”
백만년 만에 야근 중인 인기가 토스트를 낚아 채갔다. 유정은 그것도 못본 체하고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띠링.
메신저가 울었다.
설마.
유정은 떨리는 손을 메신저에 가져다 대었다.
‘안녕하십니까. 교장 하준서입니다.
학기 시작도 전에 부담을 드려서 저도 불편하고 죄스러운 마음입니다.
학교를 같이 이끌어가는 입장으로 너그러운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늦게까지 남아 계시는 선생님들께서는 꼭 기안 올려서 야근 수당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늦게까지 남아 있을 예정입니다. 올리는 대로 바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약소하나마 간식을 준비했습니다. 맛있게 드시고 하루의 피로도 푸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흥, 병 주고 약 주고 맞네.”
“이런다고 누가 좋아할 줄 아나. 밀당해?”
쑤군거림을 뒤로 하고 유정은 아예 턱까지 괜 채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문득, 그가 고심하며 메신저 문구를 쓰고 지우는 광경이 상상이 되었다.
괜히 딱딱하게 굴기도 하고 괜히 웃기도 하는 그이지만, 속마음은 누구보다 여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것 봐. 멋있지 않냐?”
수연이 유정을 쿡쿡 찔렀을 때에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응?”
“아휴, 내가 왜 이러냐.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리다는데.”
“서른 두 살이에요?”
“응, 몰랐어? 하긴 보기에는 서른도 안 되어 보이더라.”
네 살 차이. 유정은 손가락을 꼽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야.
“술 마셔요, 오늘, 꼭이요.”
“알았어. 나 얼른 일 좀 하고.”
눈을 반짝이며 컴퓨터를 두들기는 수연을 보다가, 유정도 하던 작업을 계속 이어 나갔다.
일곱시라고 했으나, 일이 끝난 시간은 아홉시가 넘어서였다. 평소 퇴근 시간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늦어진 것이었다.
수연은 컴퓨터를 끄자마자 업데이트 때문에 기다려야 한다고, 유정 먼저 나가 있으라고 했다.
“아휴, 왜 업데이트는 꼭 컴퓨터 끄면 한다는 거야.”
“같이 나가요.”
“아냐. 먼저 시동 켜고 히터로 덥히고 있어. 밤이라 쌀쌀해서.”
유정은 수연이 왔을 때 차가 따뜻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시키는 대로 먼저 나왔다.
차 안에 들어와서 히터를 켜고 있는데, 상우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같은 신입이라 그런지 남 같지 않아, 유정은 차에서 나와 손을 흔들어 보였다.
“퇴근하세요?”
“아, 네.”
상우가 고개를 꾸벅하며 유정에게 다가왔다.
“서유정 선생님도 지금 끝나셨나 봐요.”
“네. 이것 저것 하다 보니까요. 상우쌤도 지금 끝났어요?”
“네. 저도, 이것 저것.”
상우는 머리를 긁으며 순진하게 웃었다. 유정보다 한 살 많다는 그는 나이보다 순박해 보였다.
“참, 교직 경험은 처음이시라고 저번에......”
“네. 회사 다니다가 왔어요.”
“아 그렇구나. 대단하네요.”
“아뇨. 회사는 잘 안 맞아서요.”
상우는 다시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유정은 그런 상우를 보며, 누군가와 딱 반반씩 섞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도 좀 이렇게 부드러웠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그는 지금 왜 수연과 함께 걸어나오고 있는가.
“이수연 선생님이 계셔서 든든합니다.”
유정은 자기도 모르게 눈쌀을 찌뿌렸다. 그녀를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차갑고 딱딱하게만 보이던 사람인데, 지금 수연을 대하는 것을 보니 그렇지만도 않았다.
원래 아무에게나 저런 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었나. 그럼 나에게 좋은 교사가 될 거라고 한 말도 그냥 빈말이었나.
“아뇨, 교장 선생님이 오셔서 저도......”
“아, 여기 다 모여 계셨네요.”
준서는 유정과 상우를 보면서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다라뇨......”
유정은 ‘다’의 기준이 뭘까 생각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었다.
“어제 같이 교과서 작업한 전우들 말입니다. 어제 안 그래도 식사할까 했었는데, 오늘 좀 늦었지만 회포 좀 풀까요?”
이봐요, 회포는 우리끼리 풀어야지 교장 선생님이랑 무슨 회포에요, 사장님 나이스 샷도 아니고.
말없이 입술을 깨무는 유정을, 수연이 흔들었다.
“그럴까? 그러자. 저는 좋아요.”
이렇게 속이 없으니 맨날 정부장한테 이용이나 당하지. 유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는 집에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왜에? 아깐 나보고 먼저 술 먹자고 했잖아.”
“아니, 그건 아까고 마음이 변했어요.”
“혹시 저 때문입니까?”
준서의 시선이 유정에게 투명하게 꽃혔다. 유정은 눈을 다른 데로 돌려 버렸다. 그런 그녀의 귀에 수연의 목소리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그럴리가요. 아까도 우리끼리 교장 선생님 좋다고 이야기 했는데......”
“아, 누가요, 누가!”
수연의 말을 유정이 막으며 팩 쏘아 붙였다.
“아, 나만 말했나? 하긴 유정쌤은 그냥 듣기만 했지.”
“저 때문 맞군요. 이런 어쩌나. 서운하네요. 출퇴근 동지에게 배신을 당하다니.”
조금도 서운하지 않은 음성으로 말하는 준서를 유정이 살짝 노려 보았다. 누가 출퇴근 동지야. 눈을 험악하게 뜨는 유정 앞에서 준서는 싱긋 웃기만 했다.
“출퇴근 동지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수연이 눈을 반짝였고, 유정은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들켜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들킨 기분이었다. 그것을 들키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지만.
“저희 집이 서유정 선생님 댁 부근이라서요. 앞으로 시간 맞으면 같이 출퇴근 하기로 했습니다.”
“누가요, 오늘만 그런 거에요. 앞으로는 저 출근 시간 5분 전에 올 거에요.”
“그럼 잘됐다, 오늘 같이 술 마시고 유정쌤은 교장 선생님 차 타고 퇴근하면 되잖아.”
수연은 유정의 기분을 모르는 듯이 손뼉까지 치면서 반가운 소리를 냈다.
아니 왜 내 퇴근까지 멋대로 정하는 건데. 유정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었다.
“아니, 난 안 간다고요. 안 간다고.”
“그러지 마. 그럼 나 혼자 가야 하잖아.”
“아휴, 언니도 안 가면 되잖아요.”
“난 가고 싶단 말이야. 교장 선생님이 사주신다는데.”
두 살이나 어린 교장 선생님이 뭐가 좋다고 이 여자는 이러는 건지. 유정은 한숨을 푹 내쉬고 수연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럼 가긴 가는데, 딱 한 시간만.”
“무슨 회식이 수업이야? 한 시간만 하게.”
“그럽시다.”
준서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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