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지금 교장실로 오십시오2017.05.30.
준서는 출력한 기안 서류를 책상 위에 내던졌다. 해보자는 거지. 어제 그렇게 나를 찔러서 혼나게 만들었으니 이제 길들였다고 오만방자해진 건가.
덜컥.
문을 여는 기척도 매우 거칠었다.
“무슨 일이시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개기름이 번질 번질 흐르는 인기의 얼굴은 웃음마저 담고 있었다.
“앉으십시오.”
준서도 애써 감정을 다스리고 인기를 응접실 테이블 앞 쇼파로 안내했다.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준서는 방금 올라온 품의서의 항목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인기는 당연히 모르는 일이었다.
“아, 그거, 수연, 아니, 서유정 선생님이 아실 겁니다.”
“왜 부장님이 모르는 걸 서유정 선생님이 아실까요?”
준서의 시선이 인기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아니, 그야, 제가 모든 업무를 다 파악하지......”
“방금 올라온 기안이고 부장님께서 직접 작성하신 건데요. 이런 정도의 기억력이면 수업이며 업무가 불가능할 정도 같은데, 병원 진료는 받아 보셨습니까?”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비꼬는 어투는 여전했다. 인기는 입술을 꽉 깨물고 준서를 노려 보았다.
“어제 제가 회의 때 한 말 기억합니까? 딱 한 마디였는데.”
준서는 그런 인기의 눈을 여유롭게 받으며 다리를 꼬았다.
“허, 지금, 뭐하시는......”
“기억 못하시겠죠. 조금 전 작성한 기안도 기억을 못하시니. 상식이 통하는 학교를 만들어 보자고 했습니다.”
“아니 제가 뭐 못한 거 있습니까?”
얼굴이 붉어진 채 인기가 소리쳤다. 준서는 잠시 묵묵히 있다가, 픽 웃었다.
“우, 웃어요?”
“기가 막혀서요.”
“지, 지금 태도하며, 대체 뭐하는......”
“나이도 드실 만큼 드셨으니 옳고 그름을 모르지는 않으실 테고. 자꾸 이런 행동 하시는 건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인데.”
말을 딱 멈추고 준서는 다시 인기를 뚫어지게 보았다. 스무 살 가까이 어린데도, 상대에게 느껴지는 위압감은 만만치 않았다. 인기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 침을 꿀꺽 삼켰다. 목구멍으로는 아무 것도 넘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그러셔도 소용 없습니다.”
준서는 꼬았던 다리를 펴고 상체를 숙여 인기에게 고개를 가까이 내밀었다.
“저 학창시절 별명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꼴통이었어요. 아무리 때려도 말을 안 들어서요. 죽어도 아닌 건 아니라고 하는 바람에 지옥 같은 학창 시절을 겪었죠.”
준서의 눈에 순간 음울한 기운이 스쳤다. 인기의 미간이 모아졌다.
“그, 그래서, 지금 위협하시는 겁니까?”
“경고하는 겁니다. 누굴 믿고 이러는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난 안 바뀝니다. 끝까지 잔소리 할 거고, 끝끝내 이뤄낼 겁니다.”
말 끝에 준서의 허리가 세워졌다. 반듯하게 떠진 두 눈에 빛이 어렸다. 단정하게 다물린 입술은 조금 전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범적이고 깍듯한 교장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 이 양반이......”
“어제 말씀드린 거나 빨리 제출하시지요. 그건 누구 시키기도 부끄럽지 않습니까?”
“네, 뭐, 뭐요?”
“하루 더 기회 드리겠습니다. 내일까지도 제출 안하시면 교무실에 방송할 겁니다.”
험악하게 일그러진 채 부들 부들 떨리는 얼굴을, 준서는 여유로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기안도 이제는 직접 하시고요. 오늘은 교장실이었지만, 다음부터는 모두가 보는 교무실에서 망신 당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 정말, 당신......”
“덕분에 아직도 무릎이 저리네요. 어제 두 시간 넘게 할아버지 앞에서 야단 맞았거든요. 그런데 두 시간이 아니고 네 시간이라도 전 얼마든지 견딜 겁니다. 그러니 오늘 일도 되도록 빨리 말씀드리세요. 그래야 저도 빨리 퇴근을 하고 할아버지 댁에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미소까지 지으며 하는 말에 인기는 그만 질려 버리고 말았다. 독한 놈. 험악한 시선을 받으며 준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 드릴 말씀은 끝났으니 그만 가 보십시오.”
인기는 벌떡 일어나 인사도 없이 교장실을 나가 버렸다. 어제처럼 인기의 뒤통수 앞에서 쾅 닫히는 문을 준서는 묵묵히 보고는 책상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학교는 네 소유가 아니야. 네 꿈을 대신 이뤄주는 곳도 아니고. 사람이 사는 곳이고 다수의 이해 관계가 얽힌 곳이다. 왜 네 마음대로 뒤집으려고 해. 그건 나중에, 내가 기회를 준다고 하지 않았어.’
무서운 질책과 꾸중 끝에, 윤택이 달래는 어조로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준서의 머릿 속이 떠올라 왔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준서는 다 식은 커피를 들어 목으로 넘겼다.
다음을 위해, 나중을 위해, 지금 눈 앞의 부정을 다 눈 감으란 말씀이십니까. 그 때처럼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어찌하시렵니까.
준서는 의자에 상체를 깊이 기대고 긴 한숨을 토했다.
“오늘까지 진도표 내 주셔야 합니다아!”
전체 메신저로 한 번 발송을 했으나, 메신저 확인을 안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유정은 일부러 큰 소리로 교무실 안에서 소리쳤다.
“안 내주시면 제가 찾아갑니다아!”
진도표는 한 학기 동안 나갈 내용과 교과서 페이지수를 적어서 제출하는 것으로, 맘 잡고 하면 5분도 걸리지 않는 일이었지만 전교사가 해야 하는 일이어서 늘 늦는 사람들이 발생했다.
유정이 속한 국어과는 막내인 그녀가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어차피 교과서 내용과 페이지수만 간략히 적는 것이어서 유정도 계속 기다리는 것보다는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이 편했다.
“아휴, 신입이 찾아온다네.”
“일부러 하지 말아야 겠다.”
짖궂은 남교사들의 장난에 유정은 씨익 웃기만 했다. 작년에는 이런 공기가 불편하기만 했는데 그래도 1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물론 유정이 대학 시절 들었던 페미니즘 수업 담당 교수님이 이 상황을 본다면 매우 기함할 일이긴 했지만.
강의실에서 배운 그런 것 따위 사회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정은 하나 하나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진도표, 어떻게 하는 거예요?”
눈치로 보니 영어과의 진도표 모두를 담당하게 된 상우가 유정에게 슬그머니 다가와서 물었다. 유정은 웃으며 자신이 작성한 파일을 열어 보여 주었다.
“아하.”
“영어과 담당이신가봐요.”
“네, 감사합니다.”
상우가 캔커피를 유정의 책상 위에 올려 주었다. 유정은 당황한 눈을 돌려 상우를 보았다.
“어,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아, 여러 가지로 도와주셔서, 감사해서요.”
상우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자리로 돌아갔다.
“윤상우 선생님, 사람 괜찮은 거 같은데.”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수연이 유정을 쿡쿡 찔렀다.
“잘해볼 생각 없어?”
“뭐라는 거예요!”
유정은 내쏘듯이 말하고는 컴퓨터로 몸을 돌렸다. 할 일이 잔뜩 밀렸다. 진도표 작성하고 그 다음에는 또 뭘 해야 하나......
“하, 개새끼, 미친 새끼, 지가 무슨 왕인 줄......”
아 저 인간 일도 해줘야 하는 구나. 할 줄 아는 것이라곤 교장 욕하고 담배 피는 것 밖에 없는 인간.
유정은 인기를 한 번 노려보고는 다시 일에 집중했다.
“아, 거거, 진도표 말이야.”
인기는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이 유정에게 일어서서 걸어왔다.
“그거 수학과도 좀 해주지?”
“네에?”
유정이 고개를 돌렸다. 인기가 작년에 종처럼 부려먹던 수학과 막내였던 기간제 교사는 올해 다른 학교로 갔다.
“아휴, 알잖아. 수학과 사정. 우린 다 늙다리 뿐이라서.”
그런 건 직접 하셔도 되잖아요, 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유정은 꾹꾹 참았다. 일도 많은데 이 인간이.
“그거 저 주세요.”
유정의 눈치를 흘끔 본 수연이 선선히 말했다.
“아, 수연쌤이 해 줄 거야? 역시 우리 연구부의 보배 수연쌤이라니까.”
인기는 실실 웃으며 교과서를 수연의 자리에 넘겼다. 그리고 나서 또 담배를 핀다고 나가 버렸다.
“고마워요. 그런데 원래 저래요? 학생부장님보다 심하네.”
작년 학생부 소속이었던 유정은 부장의 등쌀에 첫해부터 몸살을 앓았었다. 그래도 학생부장은 뒤에서 힘든 것도 풀어주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 주었었다. 수연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킹 오브 킹이지. 심하면 수업도 대신 들어가라고 그래. 수업 시간에 들어가서도 내내 놀다 나오면서.”
“하, 나 그건 진짜 안하고 싶은데.”
“난 있지도 않은 생리통 있다고 핑계 댔었어. 그렇게까지 하긴 싫었는데 너무 심하니까.”
국어과 진도표는 금세 완성이 되었다. 국어, 문학, 작문, 문법, 화법, 독서. 대충 페이지수 적고 단원명만 적으면 되니 마음 잡으면 모두 해서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다했다. 정부장꺼 그냥 제가 할게요.”
“아냐, 나도 다했어.”
유정은 뻑뻑한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진도표를 모아서 기안만 작성하면 되었다. 기안, 기안, 기안. 이러다 얼렁뚱땅 3월이 되어 버릴 것 같아. 뭘 준비해야 할 거 같은데 담임 준비 전혀 없이 학생들을 맞아도 되는 걸까.
학교에 처음 들어온 건 이런 것을 기대해서는 아니었는데. 가끔은 내가 일반 회사원인지 교사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
기지개를 켜고 다른 업무를 하러 자리에 앉은 유정은, 메신저창에 깜박 깜박 불이 들어오는 것을 얼른 켰다. 벌써 진도표를 제출한 사람이 있나 보다, 빠르기도 하지.
유정은 1등으로 제출한 착한 선생님이 누굴까 생각하며 창을 열었다가 그대로 얼어 붙고 말았다.
“아휴, 내가 그 새끼 때문에 명이 줄어, 준다고.”
인기는 담배 냄새를 풀풀 풍기며 교무실로 들어와서 슬쩍 유정과 수연의 자리로 걸어왔다.
“다 됐어, 수연쌤?”
“네, 지금 제출만 하면......”
“제출할 필요 없을 거 같은데요.”
유정이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수연이 물으며 유정의 컴퓨터를 들여다 보았다.
“진도표, 제출할 필요 없다고요.”
유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 왜?”
수연이 멍한 눈으로 유정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새끼가 또 뭐라고 하는 거야?”
인기의 말을 뒤로 하고 유정은 천천히 교무실을 걸어 나왔다. 젠장, 내가 대체 무슨 실수를 한 거야. 꼼수 들킨 사람이 되어 버렸잖아, 아침에 잘못된 관습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을 한 사람한테 정면으로.
수연은 메신저창에 띄워진 글을 보고 있었다.
‘이런 형식의 진도표는 받지 않습니다. 지금 교장실로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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