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저를 방패 삼으려고?2017.05.27.
유정은 설렁탕 한 그릇을 맛있게 비우고 있는 준서를 보고 있었다.
설렁탕 광고 찍으러 온 것 같았다. 어떻게 저렇게 맛깔나게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안 드십니까?”
설렁탕에 고개를 박고 있길래 의식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유정은 그 말을 듣고서야 다시 뜨끈한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봅니다. 괜히 왔나.”
“아, 아뇨. 안 좋아하는 건 아닌데.”
유정은 뭐라고 할 말이 없어 국물만 말없이 삼켰다.
“아니면 저랑 같이 있어서 부담스러우신 겁니까?”
준서의 고개가 들렸다. 빙고. 유정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본 준서가 피식 웃었다.
“저 그렇게 부담스러운 사람 아닙니다. 어려워하실 거 없어요.”
“어려워하지 말라는 말로 어려움이 가신다면 세상에 어려움은 없겠어요.”
유정은 농담처럼 들리도록 최선을 다해 말했지만 준서에게는 전혀 아니었는지 그의 표정은 다시 굳고 말았다.
“그렇군요. 제가 어리석은 말을 했군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어렵더라도 좀 드십시오. 그래도 처음 사 드리는 건데.”
뭘까. 내가 사준 거 먹어, 안 먹으면 서운해, 뭐 그런 건가.
유정은 고개를 저어 바보 같은 생각을 떨어내고 다시 미소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하긴, 첫 출근 날에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은데 제가 이렇게 잡아두고 있으니 제가 원망스럽기도 하겠습니다.”
딱딱 마음을 알아 맞추면서도 여전히 자기 뜻대로만 하는 상대가 얄미워, 유정은 말없이 그를 노려 보았다.
“그런데 집에 가서 또 혼자 밥을 먹을 생각을 하니 막막해서. 혼자 살거든요.”
“아, 네.”
“유정 씨는, 아니 죄송합니다. 서유정 선생님은 댁이 어디십니까?”
준서는 자신이 한 실수에 조금 놀란 듯이 사레가 들러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유정도 당황해서 상대에게 시선을 떼었다.
실은 조금 전, 유정도 그냥 아는 사람과 식사를 하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었다. 학교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조금 부드러운 것도 같고 인간적인 면모도 보이는 것이. 그런데 준서가 그런 실수까지 하니 더 당황스럽기만 했다.
“저 소하동이에요.”
“아, 저도 그 쪽인데.”
놀랍게도 준서의 집은 유정의 집 바로 부근이었다.
유정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럴 리가. 그래서는 안되는데.
“같은 쪽이군요. 잘됐네요. 혹시 몇 시 출근하십니까? 같이 할까요?”
“아, 아니, 뭐, 그러실 필요는...... 제가 오늘만 일찍 출근한 거라서요.”
유정은 양 손을 내저으며 거절의 의사를 말했으나 준서의 눈빛은 집요했다.
“매일 일찍 출근하시면 되죠. 아직 차 없으시죠? 차 구입할 때까지만 같이 출근합시다.”
“저 원래 출근 시간 딱 5분 전에 와요. 하하, 오늘은 진짜 첫날이라서 그런 거.”
“매일을 첫날처럼 여기시면 되죠. 어차피 하루 하루는 남은 인생의 첫날입니다.”
어디서 되먹지도 않은 명언질인가. 저런 인간이 훈화 말씀이라고 하면서 ‘에 마지막으로’를 시작으로 명언을 한도 끝도 없이 말하지.
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상큼한 하루의 시작을 교장과 함께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잘생겨도, 젊어도, 옷을 잘 입어도 교장은 교장이었다.
“싫은 거군요.”
준서는 유정의 얼굴에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상처 받은 표정이었다. 또 왜 저래. 유정은 입을 비죽거렸다.
“예상은 했었지만 첫날부터 왕따라니. 외롭네요.”
울컥한 감정이 유정에게도 읽혔다.
“아, 아니, 그러면 첫날부터 뒤집어 놓고 안 그러기를 바랐어요?”
“제가 서유정 선생님께는 뭐 그리 잘못한 것도 없지 않습니까? 정부장님한테는 맞을 뻔하고 김부장님한테는 욕 먹고 서유정 선생님께는 눈 앞에서 거절 당하고.”
유정은 눈을 크게 뜨고 상대를 노려 보았으나 그 눈에는 이미 힘이 빠져 있었다.
“아, 아니, 제가, 제가 교장 선생님이 싫어서가 아니라 아침잠이 많다고요.”
“저도 많습니다.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거죠. 학교 다닐 때 별명은 한 때 지각대장이었어요.”
“정말요? 교장 선생님이요? 안 어울리는데.”
“지옥 같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더 학교를 바꾸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지도 몰라요.”
준서의 목소리는 잔잔해졌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암흑기였던 한 때였다. 그리고 그 전과 그 후,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하루도 학교를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죠.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변을 살펴봤는데, 저처럼 학교에 흥미가 없는 학생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더군요. 가고 싶은 학교, 즐거운 학교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그래서 언젠가부터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침부터 부장들 깬 것하고는 무슨 상관인데. 유정은 대답 없이 준서를 바라 보았다. 눈으로도 그런 메시지가 전달되는지, 준서는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평교사로 근무하면서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보이더군요. 학생들이 행복하려면 우선 교사들이 행복해야 하는 거구나. 그러려면 교사들을 함부로 대하고 그들을 지배하는 나쁜 관리자와, 그 밑에서 아부 떠는 걸로 모든 할 일을 다하는 줄 아는 부장 교사들에 대한 조치를 취해야 겠구나.”
유정의 머릿 속에 전구가 반짝 켜지는 것 같았다. 그저 꼰대짓이라고 생각하던 것에 그런 의미가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그저 자신의 지배력을 넓히기 위해서 길을 닦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래서 첫날부터 강하게 나갔는데, 내일부터는 어떻게 출근을 해야 할지 저도 무서워 죽겠습니다.”
준서는 말과는 달리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마쳤다. 유정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서 저하고 같이 출근을 하자는 거에요? 저를 방패 삼으려고?”
“네에?”
준서는 그게 무슨 황당한 말이냐는 듯이 되묻고는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냉랭한 모습만 마주했던 유정은 그가 크게 웃자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내가 저렇게 웃긴 말을 했나. 아니면 뭘 잘못 먹었나. 설렁탕에 약 탔나.
“의도를 정확히 알아줘서 고맙군요. 내일부터 제 대신 총알 받이 좀 되어 주십시오.”
준서는 웃음기가 묻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설렁탕 안에 숟가락을 집어 넣었다.
“아니, 제가 무슨 힘이 있어서......”
유정은 그렇게 말하다가, 설마 나를 놀린 건가 싶어서 묵묵히 먹기 시작하는 준서를 노려 보았다. 어느덧 불편함이 가시고 허기가 느껴져서, 유정도 내려놓았던 숟가락을 들고 나머지 국물을 떠 먹었다.
“여기군요. 정말 가깝네요. 저는 매일 6시 30분에 출근합니다. 도착하면 7시고요. 6시 정도에 연락 주시면 이리로 오겠습니다.”
유정의 집 앞에 다다른 준서가 말했다. 유정은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하며 빙긋 웃어 주었다.
“네, 연락 없으면 그냥 가세요.”
“지각하면 혼납니다.”
“허허, 지각 대장이 하실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유정의 농담에 준서는 말없이 싱긋 웃었다.
“살펴 가세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유정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차 문을 닫았다. 고개를 끄덕인 준서는 유정이 돌아서서 걸어가는 것을 보고 차를 출발시켰다.
묘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그녀가 기분을 좋게 만든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기분이 좋아지는 것 뿐만 아니라, 계속 더 만나고 싶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신선한 에너지 때문일까.
차라리 잘된 것인지도 몰랐다. 전 교장은 부장급 교사들과 친했지만, 준서는 반대로 신입 교사들이나 젊은 교사들과 더 친해지고 싶었다. 아직 학교에 적응하는 단계인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동시에, 그들의 순수함과 열정을 그 또한 본받고 싶었다.
그들과 힘을 합쳐 새로운 학교를 만들어가고 싶다, 준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집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휴대폰이 울린 것은 그 때였다.
살짝 눈을 내려 누군지 확인한 준서는 눈쌀을 찌뿌렸다.
차를 갓길에 대고,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준서입니다.”
- 너 이 새끼......
흥분을 잔뜩 억누른 목소리는 반쯤 쉬어 있었다.
- 미쳤어? 지금 나 몰아내고 그 자리 들어갔다고 잘난척 하는 거야, 뭐야?
준서는 대답 없이 옅은 한숨을 내쉬고 차창 밖의 아파트를 보았다. 유정이 들어간 곳이었다.
- 아직도 잘났다고 그러고 있지. 정부장한테 너 무슨 소리를 했어? 다 토해내라고? 어? 너만 잘났어? 제정신이냐, 너?
철균의 목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생생히 울렸다. 준서는 휴대폰 볼륨을 최소로 하고 지루한 표정으로 차창만 응시했다.
- 짤리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니 할 일이나 하는 게 좋을 거야. 내 사람들 건드리지 마. 마지막 경고야. 어차피 1,2년이면 돌아갈 거니까 너는 얌전히 니 업무나 해. 가져온 서류에 싸인이나 하란 말이야. 교감한테 나머지 일은 다 맡기고.
“하실 말씀 다 하셨습니까?”
- 하, 아직도 정신 못 차렸지, 너!
“피곤한데 1절만 하시죠. 그런다고 바뀌는 것도 없을 거고.”
준서는 휴대폰을 거치대에 놓은 후에 천천히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신경이 쓰일 것 같아 차를 세웠는데,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 뭐야! 너 이 새끼......
“정 그렇게 저를 못 잡아 먹어 안달이면 직접 오시든가요. 참, 소환 조사는 언제 받습니까?”
- 뭐, 뭐야! 야! 너 죽었어, 너 이 새끼 내가 아버지께 다 말씀드릴 거야! 그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새끼가......
전화가 끊어졌다. 준서는 씁쓸한 웃음을 삼키며 천천히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전화가 다시 온 것은 준서가 집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미혜에게 저녁은 먹고 왔음을 말하고 나서 막 씻으려고 옷을 벗는데 심상치 않은 소리가 울렸다. 어쩐지 안 좋은 느낌으로 휴대 전화를 확인한 준서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일찍도 연락하셨네.”
난리가 날 것이라고 예상은 했으나 생각보다 너무 일렀다. 아무래도 정인기가 퇴근을 하자 마자 난리를 친 것 같았다. 그렇게 담도 작으면서 무슨 그런 큰 일을 벌여서. 준서는 다시 옷을 챙겨 입었다.
“어디 가세요?”
“할아버지 댁에요. 늦을 지도 모르니까 먼저 주무세요.”
준서는 그렇게 말하고 휴대폰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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