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재수 없다고요?2017.05.27.
다시 단상으로 오른 교감이 회의를 진행해 나갔다. 전체 학교 일정 소개가 있은 후에 부장들이 나와서 업무 상황을 보고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회의가 끝나고 도로 교무실로 가면서, 수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싸이코라니까 그러네요.”
“근데 그렇게 나쁜 싸이코는 아닌 거 같애.”
“아니, 수연쌤은 정부장한테 욕 먹고 그런 소리가 나와요?”
유정이 발끈해서 소리치자 수연은 피식 웃었다.
“그거야 정부장이 꼬장 부린 거지. 한 두 번 일인가. 일 잘해도 지 기분 나쁘면 꼬장 부리는데 뭐.”
“그거야 그렇지만......”
“굳이 안해도 될 일을 하고 안해도 될 말을 하고. 그런데 그게 또 틀린 말은 아니고.”
“그래도 얄밉잖아요. 아까는 삼각 김밥, 아니다.”
유정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니 그럼 샌드위치만 먹는다고 처음부터 못을 박을 것이지. 사오니까 안 먹겠다는 건 뭐야.
“오전부터 부장들만 불러다 야단친 것도 그렇고. 그렇잖아. 솔직히 지금 부장 중에서 일하는 사람이 누가 있냐. 일은 평교사들이 다 하고 부장들은 교장 찾아가서 아부나 떨어대고.”
“그래요?”
“그래. 나도 작년에 죽는 줄 알았어. 내 업무도 힘들어 죽겠는데 정부장 업무까지 다 맡아서. 근데 그 부장들을 다 깨준 거 아니야.”
그런가. 듣고 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좀 신경 쓰이기도 해. 저러면 부장들이 가만히 있진 않을 텐데. 정부장부터도. 아무리 할아버지 빽이라지만.”
“뭐야, 걱정하는 거예요?”
“아니, 걱정이라고 하기는 오버고. 그냥.”
유정은 가만히 수연의 옆얼굴을 살피다가 픽 웃었다.
“반했구나?”
“뭐어!”
“반했죠? 우와, 이거 참 재밌겠는데요. 교사와 교장의 로맨스라.”
“아, 진짜 유정쌤!”
수연이 유정의 등을 퍽퍽 때렸으나 유정은 뭐가 좋은지 싱글거리기만 했다.
준서는 서류 정리를 마치고 나서 뻑뻑한 눈을 두 손으로 눌렀다. 생각해보니 잠도 거의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하루 종일 커피만 마셨다.
속은 부글거리고 머리는 아프고 정신은 하나도 없다.
내일도 살펴야 할 것이 한 가득이지만 준서는 일단 오늘은 일찍 퇴근을 하기로 했다. 오늘까지 야근을 하면 내일은 더 힘들어질 것 같아서였다. 3월이 되면 일찍 가고 싶어도 못 갈 텐데, 쉴 수 있을 때 쉬어두어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책상을 정리하던 준서의 눈에 희끄무레한 것이 잡혔다. 유정에게서 빼앗은 장갑이었다. 장갑을 빼앗기고 나서 황당한 눈을 들어 자신을 보았던 유정의 얼굴을 떠올리며, 준서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재밌는 친구란 말이야.
엉뚱하게 삼각 김밥을 사오는 것도 그렇고.
덕분에 밥을 쫄쫄 굶게 되어 버렸지만, 준서는 별로 그것이 불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잔뜩 긴장한 첫 출근 날에 유정을 만나 마음을 조금 느긋하게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동을 했다. 심부름을 시키고 장난까지 쳤다.
다른 이들은 잘 모르지만, 낯가림이 심하고 소심한 구석이 있는 그였다. 까닭에 냉정하고 쌀쌀맞다는 오해도 자주 불러 일으켰다.
특히 첫 이미지가 차갑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 왔었다. 그러나 가까워지고 나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장갑을 잘 접어서 책상 속에 집어 넣고, 준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낯설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바뀌어 갈 수 있겠지.
준서는 두려움을 지운 담담한 표정으로 가만히 책상 위를 응시하다가 몸을 돌렸다.
“데려다 줄까?”
“괜찮아요.”
유정은 아직 차가 없었다. 수연이 몇 번 태워주기도 했으나 집이 정반대라 계속 부탁을 할 수는 없었다.
“오늘 고생했어.”
수연과 인사를 하고 나서 유정은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잠도 자지 못한 몸으로 하루 종일 일을 하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버스 타면 바로 수면 모드로 들어갈 것 같다고 생각하며, 유정은 휴대폰을 켜서 무심코 그 사이 온 메시지가 없나 살폈다.
빵.
유정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검은 세단 한 대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앞유리가 천천히 내려갔다.
“서유정 선생님.”
유정은 운전석의 남자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집에 가는 길입니까?”
“저, 아, 네......”
“타십시오.”
내가 왜? 내가 이 차를 왜 타야 되는데?
“누가 점심을 엉뚱한 걸 사주는 바람에 배가 고파서요.”
상대가 말했다. 유정은 눈쌀을 찌뿌렸다.
“밥 먹으러 가는데 같이 갑시다.”
싫은데요.
유정은 대답하기도 전에 고개부터 저었다.
“너무하는군.”
상대의 얼굴이 굳었다.
“하루 종일 굶었습니다. 누구 덕분에.”
“아니 그래서 다시 사 드린다고 했잖아요?”
유정이 불퉁한 목소리로 소리쳤으나 오히려 상대는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같이 식사하자고요.”
“아니, 난 원하지 않는다고요.”
“배 안 고파요?”
유정은 잠자코 자신의 배를 보았다. 물론 고팠다. 미칠 것처럼. 하지만 이 인간하고 같이 밥을 먹을 이유는 없었다.
“실은 아까 교과서 정리하고 나서, 그 멤버로 같이 식사하려고 했는데 회의 끝나고 정리하고 나니 다 퇴근하셨더군요.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니 너무 부담 갖진 마세요.”
“부담을 안 갖게 생겼어요?”
유정이 톡 쏘아 붙이듯이 말하자, 준서는 오히려 더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뭐야, 이 인간, 왜 자꾸 웃어.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이나.
“일단 타십시오. 식사 생각 없으면 모셔다 드리기라도 하죠.”
“그러니까 제가 왜......”
“오늘 하루 종일 고생하지 않았습니까. 점심도 사다주시고.”
그 때 막 도착한 버스가 뒤에서 빵 소리를 냈다. 그 순간 유정은 자기가 오히려 놀라 차에 올라 타고 말았다. 준서는 버스를 비키려다가 옆자리에 올라타는 유정을 보고 다시 싱긋 웃었다.
“이런 기회 흔치 않으니까 먹고 싶은 거 말씀하세요.”
“그러니까 제가 왜...... 아휴.”
유정은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루 종일 이 인간하고 왜 이렇게 얽히는 거야.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라고 해 놓고는......”
준서는 작게 속삭이듯 말하며 신호 대기에 멈추었다. 유정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 얘긴 진짜 동기인 줄 알고 한 말이었잖아요.”
“진짜 동기 맞다니까요. 같이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장난하지 마세요. 급이 다른데 무슨......”
“급이 다르긴요. 교장은 교사를 행정적으로 돕는 업무를 하는 사람이에요. 실제 외국의 학교는 교장이 제 나이 또래도 많습니다. 그리고 말 그대로 업무 보조를 하죠.”
“그거야 외국의 경우구요. 한국 문화가 달라지겠어요? 저도 이 학교 저 학교 다녀봤지만 다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유정은 말해 자기 입만 아플 거 같아 도로 입을 다물었다. 준서는 여전히 여유만만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쌓인 게 많긴 많군요.”
“그런가보다 하는 거죠, 뭐.”
“그런가보다 하면 안돼요. 그러면 서유정 선생님도 다른 분들하고 같아지는 겁니다.”
준서가 담담하게 말했다. 유정은 샐쭉한 표정으로 준서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전 나이 들면 안 그러고 싶은데. 그런데 지금은 맞춰 드리는 것 밖에 방법이 없잖아요.”
“이해는 합니다만. 그래도 교사가 그러면 안되죠. 교사가 자존심이 없다면 학생은 누굴 믿고 따르겠습니까? 교육을 하는 사람은 자기를 지키고 표현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학생들이 믿고 따르고 배우게 되는 거죠.”
유정은 눈을 감았다. 내 실수다. 내가 잔소리가 너무 듣고 싶어서 여길 탔어. 오늘 들은 걸로 부족해서 더 듣고 싶어서.
“별로 듣기 싫군요.”
준서가 픽 웃으며 말했다.
“아니, 다 맞는 말씀이긴 한데, 그런데, 좀, 뭐랄까......”
“재수 없다고요?”
유정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그렇게 적절한 표현을 스스로 할 수 있는지.
“알아요. 전에 근무할 때도 많이 들었던 말이라.”
“그, 그랬......”
“그 때는 아무 것도 아닌 평교사였으니 더 그랬죠. 그래도 제 말에 따라주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나중에는 적인 줄 알았던 사람이 슬그머니 다가와서 고민 상담도 하고 그러더군요.”
그래요, 잘나셨습니다, 아주.
“댁이 어딘지도 안 묻고 무작정 달렸군요.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식사나 합시다.”
“마음대로 하세요.”
유정은 더 말을 하기도 싫어서 그렇게 대꾸하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루 종일 굶었더니 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네요. 설렁탕 어떠십니까?”
“하루 종일이요? 아침도 안 드셨어요?”
유정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잠을 잘 못 자면 입맛도 없고요.”
“허...... 그러면 아까 다시 사오라 하시지. 기운도 없는데 교과서 나른 거예요?”
“괜찮습니다. 체력은 자신 있는 편이니까요.”
준서는 여유롭게 말하며 설렁탕집 앞에 주차를 했다.
“그래도 앞으로는 좀 챙겨 드세요. 제가 샌드위치 심부름 정도는 해 드릴게요.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의 정신으로.”
유정은 그제서야 그가 좀 걱정이 되어 말했고 그 말에 준서는 말없이 유정을 마주보았다.
차창을 뚫고 들어온 저녁 해가 두 사람 사이에 감돌고 있었다.
그 순간, 딱딱하게만 굳었던 준서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저녁 해를 받아 빛이 나는 두 눈도 둥근 호선을 그렸다.
“고맙습니다.”
부드러운 저음이 공간을 울렸고, 유정은 어쩐지 숨이 막히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준서는 차문을 열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유정은 마음에 무언가 쿵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뭐지, 이 느낌은.
유정은 입술을 깨문 채 문을 열었다. 2월말의 쌀쌀한 공기가 몸을 감고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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